창룡문에서 방화수류정까지
연속적으로 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나마 한낮의 기온이 –2℃~0℃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2월 1일 수원화성을 찾았다. 지난 1월에 수원화성박물관과 화성행궁을 둘러본 뒤라 두 번째 방문이었다.
수원화성이 수원화성박물관이나 화성행궁 보다 먼저 다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날이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지난번에 수원화성의 정문인 장안문은 보았고 이번에는 창룡문에서 동북공심돈, 연무대, 방화수류정을 거쳐 화홍문, 화서문까지 걷는 코스를 선택했다.
모자 달린 패딩에 털목도리를 칭칭 감고 운동화 끈을 조였다. 그리고 보온병에 따뜻한 물, 지도 한 장, 보조배터리를 담아 작은 가방을 크로스로 둘러멨다.
사당역에서 수원행 광역버스를 타고 수원에 도착해 다시 11번 버스로 갈아탄 뒤 창룡문, 연무대 정류장에서 내렸다.
그런데 목적지에 내려서 보니 창룡문, 동북공심돈, 연무대, 활쏘기 터까지 한눈에 다 보였다. 워낙 지도를 펴놓고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공부하고 온 터라 생김새는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출발하기 전 창룡문은 다음으로 미루고 연무대부터 시작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이래서 백문이 불여인견(百聞不如一見)인가 보다.
먼저 안내소에 들려 자료를 챙기고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여기서 장안문까지 가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나요?”
“빠른 걸음으로 가면 25분쯤이요.”
“예? 한 바퀴 도는데 5시간 30분 걸린다고 하던데요?”
안내원은 씩 웃었다.
“그렇게까지는 안 걸리고 한 3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어요.”
“지도에서 보면 창룡문에서 장안문까지 꽤 멀던데……. 그러면 어느 구간에서 시간이 많이 걸려요?”
“아, 서장대에 가려면 팔달산을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이 많아서 시간이 좀 걸려요. 그리고 팔달문에서 성곽길이 끊기고 도로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해요. 팔달문 쪽에 시장이 있어서요. 지금 공사를 계속하고 있어서 언젠가는 연결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안내소를 나오는데 허탈했다. 화성은 한 바퀴 도는데 5시간 30분이 걸린다고 하기에 과연 5분의 1이나 볼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잘하면 하루 코스로도 가능했다. 먼저 창룡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원화성은 원래 군사용 방어시설로 세워졌으나 아름다움까지 고려해 설계되어 눈요기할 것이 많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시간을 넉넉히 두고 화성 둘레길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여의치 않다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원화성을 둘러볼 수 있다.
위의 지도는 수원화성 전체 지도다. 1번부터 출발한다면 8번까지 거리는 총 5,7km이며 3시간에서 넉넉하게 5시간이면 화성을 한 바퀴 돌 수 있다.
물론 번호와 관계없이 어느 곳부터 시작해도 상관없다. 내가 둘러본 코스는 6번 창룡문에서 3번 화서문까지였다. 나머지 서장대부터 봉돈까지는 한번 더 방문할 예정이다.
이 외에도 정조가 아들에게 양위하고 말년에 지내기 위해 지었던 화성행궁과 화성을 어떻게 축조했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수원화성박물관도 가볼 만하다.
편하게 둘러보고 싶으면 수원화성어차를 이용해도 된다.
화성어차는 수원화성의 주된 관광 포인트를 순환하는 관광열차로, 순종이 타던 자동차와 조선시대 국왕의 가마를 모티브로 하여 제작되었다.
화성어차는 동력차 1량, 객차 3량 등 총 4량으로 되어 있으며 36명이 승차할 수 있고 주행속도는 20km 내외다.
노선은 순환형으로 ①연무대(승차)→ ②화홍문(하차가능)→ ③장안문→ ④화서문(하차가능)→ ⑤매향교(하차가능)→ ⑥연무대(하차)로 돌아온다. 단 하차가 가능한 곳에서 내리면 다시 승차할 수 없으며 요금은 성인 6,000원이다.
또 플라잉수원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플라잉수원은 높이 32m 폭 22m의 규모로 최대 3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70m ~ 150m까지 올라간다. 플라잉수원은 계류식 헬륨기구로 헬륨 특성상 가볍지만 폭발성이 없어 안전하다고 한다. 요금은 성인 1인 기준 20,000원이다.
화성어차와 플라잉수원, 국궁 체험권은 모두 연무대 매표소에서 구매 가능하다.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 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회의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화성이 18세기 군사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동양과 서양의 군사 이론이 조화롭게 반영된 독특한 성곽이라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덕분이었다. 그동안 수원화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크게 파손되었다. 원래 유네스코는 원형이 많이 훼손된 유적은 등재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화성은 공사의 모든 과정을 기록한 <화성성역의궤>가 있었다. 이 기록 덕분에 설계 당시의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었고, 그 진정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성곽유산은 서울의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경기도 수원의 수원화성이 있다. 한양도성은 조선의 도읍지인 한성부(漢城府)의 궁궐과 종묘사직을 보호하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곽으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도성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수원화성 역시 화성행궁을 보호하고 백성을 안착시켜 대도시로 성장하고자 읍성을 축성하였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의 신도시 건설이라는 대과제 속에서 조선후기 건축기술과 미학이 집약된 조선읍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한국 성곽은 산성과 평지성이 분리되어 있었으나, 화성은 이를 합친 평산성 형태로 설계되어 방어력과 거주성을 동시에 잡았다.
화성의 둘레는 5,744m, 면적은 1.3㎢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다. 남쪽 팔달문(八達門), 북쪽 장안문(長安門), 동쪽 창룡문(蒼龍門), 서쪽 화서문(華西門)의 4대문과 화홍문(華虹門), 남수문(南水門)의 2수문 그리고 5개의 암문이 있다.
‘창룡(蒼龍)’은 푸른 용을 의미하며 동쪽을 상징한다. 창룡문은 성문 밖에 반달 모양의 옹성을 쌓아 대문을 보호하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다른 문들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소박하고 견고한 멋이 있다.
창룡문 앞 넓은 광장에는 연날리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늘을 보니 이미 연이 날고 있었다. 거대한 연이 어떻게 오를지 궁금해서 잠시 지켜보았다. 장군의 모습을 한 연이 준비를 마친 후에 두둥실 떠올랐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창룡문의 현판은 들어오는 쪽에 있어서 반대쪽으로 가니 현판이 보였다. 나는 이미 성 안에 들어와 있는 셈이었다. 성 밖으로 나가 높은 담벼락을 사진으로 담았다. 매우 웅장했다.
다시 안쪽으로 돌아와 둘레길로 연결된 계단을 올라갔다. 성문 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날이 좋으면 앉아서 쉬는 사람도 많다고 했는데 그날은 사람이 없었다.
창룡문에서 동북공심돈 쪽으로 성곽길을 따라 걸어갔다. 멀리서 보면 둥그렇게도 보이고 네모지게 보이기도 하는 이 건물은 생김새가 매우 독특했다.
동북공심돈은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독창적인 건축물로 안이 비어 있는 망루다. 내부 계단이 소라 껍데기처럼 빙글빙글 올라가는 구조라 ‘소라각’이라는 별칭이 있다. 이곳은 적을 감시하고 공격하기에 매우 유리한 입체적인 방어 시설이다. 안쪽을 보고 싶었는데 문이 잠겨있었다.
성곽길을 따라 동장대(연무대)에 도착했다.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지휘하던 곳인데 지형이 높고 사방이 트여 있어 성 안팎을 살피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곳은 넓은 마당이 있어 대규모 군사 훈련이 가능했으며, 건축물이 위엄 있었다.
성곽길은 연무대까지 이어진 후 아래로 내려왔다가 옆으로 나가서 다시 올라가야 한다.
내려온 김에 국궁 체험장 앞에서 활 쏘는 사람을 구경했다. 시간별로 있어서 사람이 텅 비었다가 시간이 되면 사람이 다시 북적거렸다. 조선시대에 곰의 과녁은 왕만이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성곽길은 오르락내리락했지만 길은 잘 닦여있었다. 아주 가끔 계단이 나오기도 했다. 오후가 되자 날은 조금 누그러졌으나 바람이 많이 불어 깃발이 대부분 펴진 상태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간다’라는 뜻처럼 주변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원래는 군사적 목적의 감시용 ‘각루’지만 건축미가 뛰어나 정자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방화수류정에 올라 성밖 아래를 보면 용연(연못)이 있는데 그 모습이 아름다워 화성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곳이다. 겨울이라 사람이 별로 없는 틈을 이용해 공사를 하는 곳이 많았다. 이곳도 공사 중이라 올라가서 멋진 용연을 바라볼 수 없었다.
수원화성을 지을 때 한 신하가 정조에게 질문했다.
“용맹하고 드센 모양새가 어울리는 군사시설인데 왜 아름답게 짓는 것이옵니까?"
“겉모양만 아름답게 꾸미고 견고하게 쌓을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면 옳지 않지만, 겉모양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적을 방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17년 12월 8일
정조는 수원화성의 ‘유려한 성벽’과 ‘아름다운 성곽’이 실제로 화포, 대포 같은 무기에 강하다는 실용적 이유로 연결해 설명했다. 이 말은 "아름다움이 적을 이긴다."라는 말로 회자되고 있다. 과연 정조다운 발상이다.
1789년 정조는 양주 배봉산(동대문구)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수은묘(垂恩墓)를 원(園)으로 바꿔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시켰다. 그리고 사도(思悼)를 장헌(莊獻)으로 존호를 올렸다.
사실 정조는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고 싶었으나 노론 벽파 때문에 생전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훗날 고종 때 장헌세자(莊獻世子)는 장조(莊祖)로 추존되었다.
무엇보다 노론 벽파를 견제해야 했던 정조는 안동 도산서원에서 별시를 치르고 남인 채제공을 영의정에 올렸다. 남인이 영의정에 오른 것은 숙종 이후 100년 만의 일이었다.
아버지의 묘를 옮기고 싶었던 정조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정조 13년 1789년 7월, 박명원이 “뒤를 이을 자손이 더디어지고 있으니 장헌세자의 묫자리를 천장(遷葬) 해야 한다”라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박명원은 정조의 고모부뻘 되는 친척이었다.
당시 정조는 원자 문효세자를 5살 때 홍역으로 잃었고 같은 해 9월에는 그토록 은애 했던 의빈 성씨마저 죽었다. 왕실에 좋지 않은 일이 연달아 일어난 것이다.
“청룡(靑龍)이 뚫려 있고 뒤를 받치고 있는 곳에 물결이 심하게 부딪치는 등 풍기(風氣)와 토성(土性)이 온전하지 못하고 자세가 좋지 않습니다. 또한 뱀이 무덤 가운데 똬리를 틀고 무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자리는 시신에 공기가 통하지 않는 흉지입니다.”
정조는 곧 동대문 밖 배봉산 아래에 묻혀있던 아버지의 묘에 사람을 보내 상태를 알아보게 했다. 심부름을 다녀온 신하는 잔디가 말라죽고 봉분으로 오소리가 들락거린다는 보고를 올렸다.
정조는 천장을 결심하고 신하들에게 후보지를 물색해 보라고 명했다. 문의 양성산, 장단 백학산, 광릉 주변의 달마동, 용인, 가평 등 10여 군데의 후보지가 올라왔다. 정조는 그중 효종의 무덤자리로 논의가 있었던 ‘산릉의(山陵議)’를 눈여겨보았다.
어느 날 정조는 천장(遷葬)할 능을 보기 위해 지관과 함께 길을 나섰다. 과천을 지날 때쯤 산중턱에서 묘를 쓰고 있는 한 총각을 만났다. 풍수지리에 일가견이 있던 정조가 총각이 쓴 묫자리를 살펴보니 조금만 더 높은 곳에 쓰면 좋은 길지였다.
"이곳보다 조금 더 높은 저곳에 장사 지내게, 그곳이 훨씬 좋은 길지네."
정조의 조언에 총각이 대답했다.
"저는 머슴살이를 하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도와주어 겨우 이곳에 산소를 썼습니다. 돈이 없어서 산소를 옮길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정조는 마음이 좋지 않아 쌀 열가마와 베 스무 필을 하사하여 산소를 옮기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이 자리를 점지해 준 지관을 불렀다.
"이 자리보다 저 윗자리가 훨씬 명당이거늘 어찌하여 그곳을 잡아주었더냐?"
그런데 지관 홍씨의 대답이 명언이었다.
"이 자리는 사시(巳時) 하관에 오시(午時) 발복 하는 자리입니다."
실제로 하관을 하자마자 정조의 눈에 띄어 쌀과 베를 얻었으니 그 말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다. 정조는 당대의 명지관 박상의와 현장에서 만난 지관 홍씨와 함께 다시 길지를 찾았다. 그렇게 찾은 땅이 바로 융릉(隆陵) 터였다.
그런데 이 땅은 윤선도가 효종의 묫자리로 이미 추천한 장소였다. 효종이 죽자 현종은 명당자리를 찾았다. 당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효종의 묫자리로 구리에 있는 동구릉을 추천했고 윤선도는 화성 융릉 자리를 추천했다.
조정은 송시열의 손을 들어주었고 효종의 능은 동구릉으로 확정되었다. 윤선도는 “반드시 10년이 지나 영릉(寧陵)을 천장하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후 실제로 효종의 능에 틈이 생기고 정자각 기와 석회석이 벗겨지고 석물이 허물어져 내렸다. 문제가 생기자 송시열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효종은 사후 14년 만에 여주 영릉(寧陵)으로 이장했다. 근처에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이 있어 두 묘역을 합쳐 영녕릉(英寧陵)이라 부르기도 한다.
정조는 윤선도의 문집을 읽고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윤선도가 명당이라고 점찍어 두었던 ‘산릉의(山陵議)’를 최종적으로 정했다.
정조는 <홍제전서(弘齋全書)>에서 윤선도의 풍수지리 학문을 '신안(神眼)'이라고 극찬했다.
“참의 윤선도는 호가 고산(孤山)인데 세상에서 오늘날의 무학(無學)이라고 부른다. 풍수지리 학문에 관해 본래 신안(神眼)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런데 천장(遷葬)을 하기 위해 사도세자의 묘를 파내니 광중(壙中)에는 물이 한 자가량 고여 있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묘 앞에 꿇어앉아 대성통곡했다.
때가 되자 상이 시복(緦服)을 갖추고 판위(版位)에 나아갔다. 계원(啓園)을 함에 이르러, 상이 옹가(甕家) 안에 나아가 사초(沙草)를 부여잡고 어루만지면서 정도에 지나치게 울부짖고 가슴을 쳤다. 이에 약원(藥院)의 제조와 각신·승지 및 여러 대신들이 번갈아 곡을 멈추기를 청했으나, 상이 모두 듣지 않았다. <정조실록> 28권, 정조 13년 1789년 8월 12일
정조는 새로운 능지를 택한 이유를 <홍제전서(弘齋全書)>에 기록해 두었다. <홍제전서>는 정조가 직접 남긴 어제문(御製文)과 명령문, 시문 등을 모은 책이다.
"산천의 기운은 인심을 다스리며, 능지의 터는 후세를 밝힌다. 아버지를 위한 자리이되, 백성을 위한 자리이기도 하다."
융릉은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반룡농주형(盤龍弄珠形)이다. 정조는 이장 때 직접 참석해 근처를 다시 살피고 묘 속의 흙을 살펴보았다. 흙은 금색의 진토라 정조는 하늘이 점지해 준 땅이라며 기뻐했다. 묘를 이장한 1년 후 왕자(순조)가 태어났으니 명당이 확실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과연 융릉은 명당이었을까?
정조는 효의황후(孝懿皇后) 김씨와는 자식이 없었고, 선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어린 나이에 일찍 죽었다. 세 번째 부인인 수빈(綏嬪) 박씨와 1남 1녀를 두었는데 1남이 제23대 순조다.
이후 순조는 2명의 부인에게서 1남 5녀를 두었으나 효명세자가 22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고 그 아들 헌종이 제24대 왕이 되었다. 헌종은 3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1녀만 낳고 일찍 죽었다. 결국 후손이 끊겨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방계 왕족 이원범이 왕위에 올랐으니 제25대 철종이다.
정조 이후로 자손이 귀하고 왕권이 약화되었으며 60여 년에 걸쳐 세도정치에 시달렸으니 명당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렵게 천장 할 자리는 찾았으나 인근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정조는 이곳에 있던 백성들을 수원 팔달산 기슭으로 옮겨가게 했다. 먼저 토지를 보상해 주고 이주비를 주어 생활터전을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망설였던 백성들이 점차 수원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정조는 수원도호부에 새 관아를 지었다. 즉 백성이 있으니 관아를 지었고 이 백성들을 살게 하기 위해 국영 시범농장을 설치했다. 그리고 수원화성을 지었다. 성곽 안 신도시 내에는 국제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국제무역시장과 전국적인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큰 규모의 시장을 만들었다. 대기업에 속하는 팔부가를 수원으로 보내고 중소기업인 점방이 들어섰으며 팔달문과 장안문 근처에서 남시와 북시를 열었다.
후일 수원도호부의 새 관아는 정조가 수원에 올 때마다 머무르며 점차 확장되어 화성행궁으로 삼았다.
1800년 1월까지 정조는 총 13차례에 걸쳐 현륭원을 방문하면서 화성행궁에 머물렀고, 1795년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치렀다.
사실 정조는 처음부터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면서 수원화성 신도시 건설을 계획했다. 이는 왕권 강화와도 직결된 문제였다.
즉위하면서부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천명했던 정조는 무엇보다 아버지의 명예 회복과 정치 개혁, 그리고 왕권 강화가 목표였다.
정조는 수원에 상업과 농업, 군사와 과학기술을 결합한 ‘이상적 신도시’를 구상했다. 장용영 친위부대를 주둔하게 했으며 과거시험, 조세감면 등 파격적 조치를 시행했다. 이는 분명히 행정적, 경제적인 특혜였다.
실제로 정조는 세자가 15살이 되면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으로 물러앉아 화성에 거주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화성은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어 행정적 위상도 높아졌다. 그러나 정조가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신의 짧은 생명이었다.
이처럼 정조는 겉으로는 아버지의 능을 찾는 효심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왕권 강화와 새로운 정치 실험의 공간으로 수원을 활용하고자 했다.
물론 기존 기득권 세력인 노론은 정조의 급진적인 개혁과 수원화성 건설 등에 경계심을 나타냈다. 노골적으로 반대하지는 못했으나 눈치 보기에 바빴다. 무엇보다 사도세자 죽음에 정치적 책임이 있던 노론 벽파는 정조가 아버지에 대한 슬픔과 원통함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때마다 불안과 두려움을 느꼈다.
화성은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를 이끈 정조와 천재 학자 정약용, 정조의 정치 짝꿍 채제공, 그리고 조선성역의궤를 그려 낸 단원 김홍도와 도화서 화원들의 합작품이다.
화성 건설은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정조는 이곳을 ‘강력한 왕권의 거점’이자 ‘경제적 자립 도시’로 만들고자 했다.
1792년 겨울, 부친상으로 3년 상을 치르고 있던 정약용은 정조에게 화성(수원성) 축조를 위한 기술적 설계를 지시받았다.
어지간하면 3년 상을 치를 때는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정조는 배다리를 성공적으로 만든 정약용이 꼭 필요했다. 정약용 역시 정조의 부름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정조가 참고하라고 준 여러 서책 중에서 정약용은 스위스 선교사가 지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의 도면을 참고했다.
정약용은 “백성의 고통을 줄이고 예산을 아껴야 한다”라는 원칙아래 다양한 기계를 발명하거나 개량했다.
그가 만든 획기적인 기계는 바로 거중기였다. 거중기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돌을 적은 힘으로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즉 40근의 무게로 625배 무게인 25,000근을 들어 올렸다.
정약용은 녹로도 만들었다. 녹로는 긴 나무 장대 끝에 도르래를 달아 돌을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는 일종의 크레인으로 성벽을 쌓을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돌을 실어 나르는 수레 유형거를 제작했는데 바퀴가 낮고 튼튼하게 설계되어 험한 길에서도 돌이 굴러 떨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6Km나 되는 성곽과 600여 칸의 화성행궁을 건립하는 큰 공사가 1794년 2월에 시작되었다.
화성은 특별한 축조 방식이 있었다. 이전의 성벽들은 석재만 사용했는데 정약용은 불에 강하고 가공이 쉬운 벽돌(전돌)을 섞어서 사용했다. 이 방식은 실제 전투에서 유용했다. 석재는 대포에 맞으면 성벽이 무너졌으나 벽돌은 대포에 맞아도 구멍이 날 뿐이었다.
그리고 성문에 구멍을 뚫어 물을 부어 불을 끄는 오성지와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치성과 포루 등을 배치했다. 정약용은 수원 화성 축조에 효율적인 건축 시스템을 도입했다. 신속한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축자재를 원활하게 공급해야 했다.
정약용은 돌의 등급을 미리 매겨서 깎고 자르는 원칙을 정해 주었다. 커다란 돌을 대, 중. 소로 잘라 축성 현장으로 옮겼다. 당시 18만 개가 넘는 돌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은 것은 지금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수원화성에는 무엇보다 백성을 생각한 정조와 정약용의 깊은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임금이 내려준 모자 293입과 무명 4동 4필을 나누어주었다. <화성성역의궤> 1795년 11월 초10일
당시 조선에서 털모자는 정승급이 되어야만 쓸 수 있었고 일반 관료도 털모자는 쓸 수 없었다. 그러나 정조는 추위에 떨며 일하는 백성들에게 털모자를 하사한 것이다.
더위를 씻어주는 척서단 4천 정을 수원성 쌓는 곳에 내려주었다. <정조실록> 1794년 6월 28일
전교하기를,
“근일의 찌는 듯한 더위는 근년에 처음 있는 일이고 어제오늘의 따가운 햇볕은 근일에 처음 보는 일이다. 성을 쌓는 수고를 생각하면 자나 깨나 먹을 때나 쉴 때나 매우 걱정이 된다. (중략) 이번 성을 쌓는 일은 소중함이 어떠한가. 비록 한 사람의 인부나 한 사람의 장인(匠人)이라도 혹 더위를 먹고 갈증이 난다면 이것이 어찌 성을 쌓는 일로 인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성을 쌓는 공사장 중 돌을 뜨고 기와를 굽는 여러 곳에서는 뙤약볕 가운데 서있게 되므로 부역하는 일은 서늘한 기운이 생길 때까지 멈추도록 하라. 처서(處暑) 전에라도 서늘한 기운이 생기면 형세를 보아 일을 독촉할 것이다. 더구나 이 성 쌓는 문제는 일마다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는 데 힘써야 한다. 한 가지라도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설사 공사가 며칠 안에 이루어지는 효과가 있더라도 나의 본뜻은 아니다.”
하였다. <정조실록? 40권, 정조 18년 1794년 7월 6일
또 흉년에 비가 많이 오자 부역을 잠시 쉬도록 어명을 내리기도 했다.
“오늘 경들을 인견한 것은 수원의 성 쌓는 공사에 대해 묻고자 해서이다. (중략) 지금 와서 돌아보건대 전에 없던 흉년을 만나 백성들 사정의 황급함이 가을, 겨울에도 이와 같으니 내년 봄의 사정을 알 만하다. (중략) 나는 성 쌓는 공사를 정지하는 것이 현재 황정(荒政)의 가장 큰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부역을 정지시켜 비가 오거나 서늘한 기운이 생기기를 기다리도록 하라.”
하니, 영중추부사 채제공이 아뢰기를,
“이 공사를 중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현재의 공장과 모집한 일꾼들은 팔도에서 모은 사람들인데, 지금 만약 돌려보낸다면 몇 년 후에 다시 모으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또 자원하여 공사에 나와 입에 풀칠하고 몸이나 겨우 가리던 자들에게 있어서는 명줄이 관계된 것인데, 공사를 중지하고 돌려보낸다면 그 낭패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성 쌓는 공사도 흉년을 구제하는 한 가지 정책이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소를 세내어 돌을 운반하고 시설한 것이 적지 않은데 갑자기 중지한다면 훗날 물력의 소비는 반드시 처음보다 배가 될 것입니다.” <정조실록> 41권, 정조 18년 10월
원래 조선에서 나라의 부역은 백성들을 의무적으로 동원했고 급료도 없었으며 심지어 도시락까지 싸 와야 했다. 그런데 정조는 수고한 대가를 계산해 지불했으니 백성들은 오히려 쉬는 것을 꺼려했다.
정조는 돌을 다듬는 장인들에게 후한 값을 치르고 수시로 잔치를 열었다. 이에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은 더 힘을 내 공사에 임할 수 있었다.
정약용이 개량하고 발명한 건축 장비들은 공사 기간을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사람의 힘으로 들기 힘든 돌을 날라 주는 이 특수 운반 장치들은 백성의 수고를 더는 획기적인 장비들이었다.
그중 거중기는 중국의 거중기보다 4배나 뛰어난 성능이었는데 그 비밀은 바로 도르래였다. 위쪽에 도르래 4개와 아래쪽에 도르래 4개, 총 8개가 적은 힘으로도 쉽게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실제로 이 거중기는 요즈음 건축에도 개량되어 쓰이는데 바로 타워크레인이다.
현장에서 거중기보다 더 필요한 기계는 바로 녹로였다. 거중기는 성벽 밑에 가장 무거운 돌을 자리 잡는 용도로 쓰였고 녹로는 높은 곳에 돌을 쌓는 데 쓰였다.
화성성역의궤에 따르면 공사 현장에서 거중기는 11대. 녹로는 더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손쉽게 돌을 운반했던 유형거도 유용했다.
정약용의 과학 기구 덕분에 원래 10년 정도로 예상했던 공사 기간은 2년 8개월(32개월)로 단축되었다. 중간에 흉년이 들어 공사를 중단했던 6개월을 빼면 그야말로 초고속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수원화성은 1796년 9월에 완성되었다.
공사에 참여한 인원은 모두 70여 만 명이었고 돌덩이는 총 18만 7천6백 개가 사용되었다. 이 공사는 성과급제와 공사실명제를 시행해 본인이 공사한 구간에 실명을 적어두었고 혹 후일 보수를 하게 되면 공사를 한 본인이 와서 책임지고 고쳐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성성역의궤가 큰 몫을 했다. 이 책은 정조가 구상한 신도시 화성을 만드는 전 과정을 기록한 종합 보고서다.
<화성성역의궤>에는 공사의 계획, 운영 과정, 참여자, 소요 경비, 자재, 공법, 도면 등 화성 축성의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도설(圖說)'에는 건축 도면을 연상시킬 만큼 성곽과 부속 건물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 일제 강점과 한국전쟁으로 훼손된 화성을 실제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조선왕조 의궤는 2007년 일괄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고, <화성성역의궤>는 2016년 보물 제1901-7호로 지정되었다.
화성 성역 공사에는 총 87만여 냥(현재의 돈 가치로 약 600억 원)을 물자 조달과 인건비에 사용했다. 특히 돌을 다루는 석수는 가장 중요한 장인으로 매일 4전 5푼(약 3만 2천 원)의 임금과 쌀 6되가 제공되었다. 또한 사용된 못의 개수와 출퇴근 대장까지 일일이 기재되어 있다. 당시 화성 공사에는 전국에서 비숙련 임금노동자가 모여들었고 이들에게는 매일 2전 5푼(약 1만 8천 원)의 임금이 지급되었다.
<화성성역의궤>는 권수(卷首) 1권, 본편(本編) 6권, 부편(附編) 3권으로 이루어졌고, 총 10권 9책이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가 완성되었다. 상이 화성 유수(華城留守) 조심태(趙心泰)에게 이르기를,
“성을 쌓는 데에 든 비용이 거의 80만에 가까운데, 소중한 역사를 조금이라도 구차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본래 생각이었다. 이 책을 간행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성의 공사에 관한 본말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하였다.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796년 11월 9일
“정약용은 나의 장량(유방의 책사)이다.”
수원 화성이 완성되자 정조는 공사 비용 4만 냥을 아꼈다며 정약용의 노고를 극찬했다. 수원 화성 공사비는 나라 재정이 아닌 왕실 재정으로 지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한*
<정조실록(正祖實錄)>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나무위키
향토문화전자대전
<홍제전서(弘齋全書)>
<수원화성> 홈페이지
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