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정조, 왕이 되다

화홍문에서 화서문까지, 홍인한&홍국영

by 김인숙

북암문(北暗門)

화성 둘레길은 끝까지 매끄럽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가다가 공사 중인 곳이 있으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구간이 있었다.


1 성곽길22.jpg 성곽길


방화수류정 바로 옆에는 외부로 나가는 문이 하나 있었다. 북암문(北暗門)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성벽 깊숙이 숨겨진 모양새였다. 암문은 비상문으로 적에게 들키지 않고 군수물자를 나르거나 사람이 드나들던 비밀 통로를 말한다. 화려한 장식 없이 벽돌로 단단하게 쌓아 올린 모습에서 실용적인 전략을 엿볼 수 있었다.


북암문0.jpg 북암문


북암문 표식.jpg
북암문.jpg
북암문 설명 글


화성에는 5곳의 암문이 있는데 모두 벽돌로 만들어졌다. 북암문은 지형에 맞춰 좌우 성벽까지 벽돌로 둥글게 만들었다. 이 북암문으로 나가면 화성에서 가장 멋진 연못인 용연을 갈 수 있다.


북수문, 화홍문(北水門, 華虹門)

북수문은 화성의 북쪽 성벽이 수원천과 만나는 곳에 설치한 수문이다. 일곱 칸의 홍예문 위로 돌다리를 놓고 그 위에 누각을 지었는데, ‘화홍문’이라는 별칭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화홍문2.jpg 화홍문 전경


누각은 원래 적군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지만 평소에는 주변 경치를 즐기는 정자로 쓰였다. 수문을 통해 흘러온 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장쾌하게 떨어지는 모습인 ‘화홍관창(華虹觀漲)’은 화성에서 꼭 보아야 할 아름다운 경치로 손꼽힌다.


1 북수문.jpg 북수문을 설명하는 글


화홍문은 조선 헌종 14년(1848)에 수문과 누각을 다시 지으면서 형태가 약간 달라졌다. 또 이곳은 1922년 홍수로 유실되었다가 1932년 ‘수원명소보존회’를 주축으로 수원시민이 힘을 모아 홍수로 무너진 누각을 다시 지었으며 2016년에 화성성역의궤를 근거로 창문을 복원했다.



화홍문 앞 전경.jpg 화홍문 앞 전경, 물이 얼어 있다.


화홍문 아래 돌의 형태를 다양하게 만든 이유는 물이 튀는 모양이 각기 다르게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물아래 쪽에는 정겨운 돌다리도 설치되어 있었으나 얼음이 얼어서인지 건너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장안문(長安門), 수원 화성의 정문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북문이지만 정문으로 쓰였다. 임금이 서울에서 오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북문을 정문으로 삼은 것이다. 정조는 장안(長安)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융릉)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풀이했다. 문 밖에 항아리 모양의 옹성(甕城)을 만들고 방어를 위해 좌우에 적대를 세웠다.


장안문10.jpg
장안문18.jpg


장안문 전경.jpg 장안문 앞과 뒤 전경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2층의 누각은 네 모서리 추녀가 길게 경사를 이루면서 용마루와 만나는 우진각 지붕 형태다. 길고 휘어진 목재를 구하기 힘든 조선 시대에 우진각 지붕은 궁궐이나 도성의 정문과 같은 건물에만 쓰였다.



장안문 소개 글.jpg
장안문 계단8.jpg
장안문 올라가는 계단


문루 처마 밑에는 다포(多包)라는 화려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받침 목재를 짜 맞췄는데, 다포식 건물은 18세기 이후 궁궐에서도 거의 백 년 동안 짓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강원도 출신의 승려 목수인 굉흡이 와서 건설을 도왔다.


서울의 숭례문, 흥인지문과 함께 조선 시대 성문을 대표하던 장안문은 한국 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1975년 다시 복원하였다. 석축에 총탄 자국이 남아 있다.



장안성11.jpg 둥그렇게 만들어진 이 길을 가면 반대편 길로 갈 수 있다.


정조로 906버길.jpg 성곽 위에서 바라다본 시내


장안문17.jpg
장안문 산책.jpg
장안문 성곽길, 산책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원래 장안문의 위치는 성 안쪽으로 있어야 했다. 그런데 장안문이 들어설 곳에 사람들이 이미 터를 잡고 있었고 다시 이주를 해야 했기에 지금의 위치로 멀리 옮겨지었다고 한다. 이 역시 정조가 백성들을 위해 배려한 것으로 애민사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장안문에서 화서문까지는 성곽길을 걷지 않고 내려와서 걸어도 된다. 이 일대에는 행리단길이 있어 화서문까지 예쁘고 눈에 띄는 건물들이 많다. 멋진 건물은 대부분 카페와 음식점이다.



KakaoTalk_20260207_213322133_04.jpg
KakaoTalk_20260207_213322133_03.jpg 행리단길 초입


움삭좀 6.jpg
0 음식점2.jpg
음식점3.jpg
음식점4.jpg
예쁜 카페와 음식점


화서문(華西門), 서쪽의 보물

화서문은 수원 화성의 서문으로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화성의 서쪽’이란 뜻이지만 서쪽에는 팔달산이 있어 서북쪽에 문을 두었다. 문밖에 넓은 평지가 있어 주변을 감시하기 위해 높다란 서북공심돈을 함께 세웠다.


화서문.jpg 화서문 전경


0 까치2.jpg
1 무기.jpg 성벽 곳곳에 놓인 무기


1 수원화성 화서문.PNG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수원시)


조선 시대 건축에는 일정한 위계질서가 있다. 같은 성문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은 높은 격식을 갖춘 반면 창룡문과 화서문은 한 단계 격을 낮춘 형태이다. 석축의 규모도 작고, 1층 문루는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졌다.


화서문은 창건 당시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18세기 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옹성 안 석축에는 공사를 담당한 감독관과 우두머리 석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화서문 공사 실명판.PNG 석공 이름이 새겨진 돌


화서문 건축에는 서울과 개성, 강화도에서 온 석공이 참여했는데 그중 박상길은 축성이 끝난 후 석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의 상을 받았다고 한다. 현판은 화성 축성의 총책임자였던 영의정 채제공이 썼으나 원본은 남아 있지 않다.


쉬는 곳.jpg 군사들의 쉼터




**정조는 세종과 함께 존경과 사랑을 워낙 많이 받는 임금이라 독자들이 알고 있는 내용도 많다. 그러니 정리 차원에서 썼다고 생각하고 아는 내용은 패스하기 바란다.**




정조의 어린 시절

세손(世孫) 시절 정조는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공부에 열중했다. 왕과 세자는 정기적으로 유학 강연을 듣고 토론했는데 왕이 하는 것은 경연(經筵), 세자가 하는 것은 서연(書筵)이다.


세손의 교재는 <효경>, <소학초략>, <동몽선습>에서 시작하여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경서와 <사략>, <강목>과 같은 역사서를 별도로 공부했고 17살에는 <성학집요>, <주자봉사> 같은 책을 별도로 강론했는데 서연은 하루에 세 번씩 열었다.


정조는 경학은 물론 무예도 열심히 익혔다. 특히 활쏘기를 잘했는데 활쏘기 결과를 기록한 <어사고충첩>에는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정조는 마지막 한 발은 늘 잘못 맞추거나 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신하들의 체면을 세워주고 제왕으로서 겸양의 미덕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활쏘기는 참으로 군자의 경쟁이니, 군자는 남보다 더 앞서려 하지 않으며 사물을 모두 차지하는 것도 기필코 하지 않는다."


사실 정조의 세손 시절은 지옥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고 어머니의 사가로 쫓겨나가 살기도 했다.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굴레는 노론 벽파에게 좋은 공격 구실이었고, 자객이 침소까지 침투하여 익명서를 놓고 갈 정도로 그의 목숨은 위태로웠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은 만약 정조가 왕이 된다면 제2의 연산군이 되어 아버지의 복수를 하리라 생각했고 조정에 피바람이 부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목숨도 보전할 수 없음을 염려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자신들의 책임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3 경희궁 정문3.jpg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


정조는 1759년 왕세손으로 책봉된 뒤 경희궁(慶熙宮)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그곳에서 14년을 생활했다. 당시 정조가 머물던 건물의 2층을 주합루(宙合樓), 1층을 존현각이라 불렀다. 영조와 정조는 모두 경희궁에서 오래 살았는데 존현각이 있던 터는 현재 역사박물관 자리가 들어섰다.


KakaoTalk_20260212_101226610.jpg 존현각 자리에 들어선 역사박물관


경희궁은 일제강점기에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건물 대부분이 헐렸고 면적도 절반 정도로 줄어들어 궁궐의 모습과 위상을 잃었다. 최근 경희궁지 발굴을 거쳐 정전인 승정전과 자정전, 그리고 태령전이 복원되었다.


경종과 정조가 경희궁에서 즉위했으며 숙종, 영조, 순조 등이 이곳에서 승하했다. 경희궁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왕은 영조다.




3 경희궁 관람안내2.jpg
3 경희궁 안내 글3.jpg
경희궁 설명 현판과 관람 안내


정조는 왕세손 시절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를 썼다. 세손이 주로 존현각에서 생활했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실제 일기는 전하지 않고 1777년(정조 1)에 간행된 <명의록(名義錄)>에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775년 2월 8일 일기에는 존현각 마루에 익명서(匿名書)가 던져진 사실이 기록되었다. 세손은 포도청에 알려 범인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이어지는 2월 11일 일기에는 범인으로 김중득(金重得)과 하익룡(河翼龍)이 체포되었고,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하익룡은 홍인한(洪麟漢)의 집안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세손은 이를 영조에게 알렸다. 당연히 영조가 극률(極律)로 다스릴 것으로 생각했으나 홍인한의 위세가 두려워 거스르지 못하고 포도청에 내려 죄를 다스리게 하는 데 그쳤다고 기록하였다. 사실 말년의 영조는 신하들에게 휘둘릴 정도로 힘이 없었다.


“나는 늘 두렵고 겁이 나고 걱정되고 불안하여 차라리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내가 과연 세손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존현각 일기> 1775년 5월 3일


말년의 영조는 근심이 많았다. 세손에게 왕 위를 물려주어야 하는데 세손이 과연 험한 조정에서 어떻게 견딜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영조.PNG 영조 초상화


재위 51년이 되는 1775년 81세의 영조는 치매 증상이 심해졌다. 영조는 자신의 증상을 치매나 노망이라 하지 않고 소화기 장애의 후유증으로 생기는 담증인 담후(痰候)라 불렀다. 기억력 장애 현상이 자신의 지병이었던 소화기 질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말년의 영조는 실제로 치매 증상과 난청 등을 겪었다.


“임금의 담후(치매)가 덜했다 더했다 오락가락하니, 하교(下敎)는 좋은 쪽으로 해석해서 동요가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헛소리로 한 하교의 반포는 절대 금한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전날 자신의 정신 상태가 어땠는지를 확인하기도 했다. 영조는 하반신이 붓는 등 여러 증상들이 나타나 실제로 치매가 아니라 다른 병증으로 인해 정신이 혼몽한 상태에서 헛소리를 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오만한 홍인한

당시 조정을 장악한 사람은 혜경궁 홍 씨의 숙부인 우의정 홍인한(洪麟漢)이었다. 홍인한은 1753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 교리에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홍인한은 화완옹주의 양자인 정후겸과 손잡고 영조 마지막 3년 동안 세도를 잡았으며 정조의 즉위를 필사적으로 막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국사를 생각하느라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어린 세손이 노론을 알겠는가? 소론을 알겠는가? 남인을 알겠는가? 소북을 알겠는가? 국사를 알겠는가? 조사를 알겠는가? 병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으며, 이조판서를 누가 할 만한가를 알겠는가? 이와 같은 형편이니 종사를 어디에 두겠는가? 나는 어린 세손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알게 하고 싶으며, 나는 그것을 보고 싶다.”


홍인한이 말하기를,

“동궁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 판서를 알 필요도 없습니다. 더욱이 조사(朝事)까지도 알 필요 없습니다.” <영조실록> 영조 51년 11월 20일 기사.


여기서 홍인한이 언급한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은 바로 '당파'와 '국사', '조정인사'에 대해 세손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영조와 세손을 함께 무시함은 물론 세손을 정치에서 배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지위를 박탈하려는 속셈이었다.


이에 소장(少壯) 관원들과 사관(史官)들은 홍인한의 건방진 발언에 대해 분개했다.


“국사(國事)나 조정(朝政)을 세손이 알지 못하면 누가 알아야 한단 말인가. 홍인한은 보필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군주(君主)의 간곡한 하교를 듣고도 오만하게 감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감히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반대하니 그 말이 비할 데 없이 패악했다. 홍인한이 조금도 딴마음이 없었다면 어찌 신자(臣子)로서 '삼불필지(三不必知)'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영조가 너무 늙어서 세손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려고 할 때 홍인한은 극구 반대하며 나섰다. 뿐만 아니라 영조가 대리청정의 명령을 내리자 홍인한은 영조의 전교를 쓰려는 승지 앞을 막아서며 어명을 듣지 못하게 방해했다.


결국 영조는 정신이 맑은 날 기습적으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차후 왕 위를 물려준다는 교지를 남겼고 불과 석 달 만에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 원릉.PNG
원릉.PNG 영조의 원릉 전경(정순왕후와 쌍봉이다)-자료(디지털구리문화대전)


영조는 52년이라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다. 영조는 비상한 정치능력을 가진 데다 탕평책으로 인해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구축했기에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 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대책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치적을 쌓았다. 그러나 아들을 학대한 끝에 뒤주에 가둬 죽이는 임오화변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아버지로서는 최악이었다.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함에서 오는 심적 갈등이 심했으며 이복형인 경종의 독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때로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유언비어에 시달리기도 했고 왕으로서 존재를 부정당하는 이인좌의 무신 난을 겪기도 했다. 또한 역모를 모의하다 걸리거나 영조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괘서가 걸핏하면 나붙어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러한 현상은 영조가 집권한 지 거의 20여 년이 지나서야 겨우 잦아들었다.


이런 환경 탓에 영조는 때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이상 행동을 보이는 성격장애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조정의 인사 문제도 감정 기복에 따라 사소한 실언을 문제 삼았다. 삼상(三相)을 일시에 파직시켰다가 다음 날 복직시키기도 했고 이런 일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인간적 결점이 있었으나 영조는 역경을 딛고 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으며, 탕평에 의한 정국 안정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문제를 해소하고 민심을 얻었다.


무엇보다 영조는 검소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침실에는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개만 있고 식사는 아침에는 타락죽, 점심과 저녁에는 밥, 김치. 시금치, 청경채와 같은 채식과 고추장이 전부였다. 생일이나 명절, 잔칫날에도 소식(小食)했다고 한다.


승정원일기에도 영조는 보리밥과 채식을 즐기는 등 다른 왕에 비해서 검소한 식단을 유지했다고 적혀있다. 특히 영조의 가장 큰 업적은 왕실에 바쳐지는 공물진상을 스스로 줄이고 백성에게 부담이 덜 되는 방향으로 개혁했다는 점이다.


1776년 83세로 승하하니, 조선시대 역대 왕 가운데 재위 기간이 52년으로 가장 길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廟號)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90년(고종 27)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원릉(元陵)이며 계비 정순왕후와 쌍봉으로 묻혔다.


정조, 왕이 되다

정조는 24세에 조선 제22대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했다. 그것은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라는 여덟 자 흉언(凶言)을 유포시킨 일부 노론 벽파 측에 정면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KakaoTalk_20260207_213322133_06.jpg 황금갑옷을 입고 말을 타는 정조


정조는 참모였던 홍국영과 함께 외척 세력 제거에 나섰다. 홍인한은 전라도 여산으로, 홍인한과 함께 전횡을 일삼았던 정후겸(鄭厚謙)은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 왕실의 권위를 고려해 장인 홍봉한과 고모 화완옹주는 처음에는 처벌하지 않았다.


정조의 외척 세력 제거는 완벽하지 못했다. 장인 홍봉한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정순왕후 오빠인 김귀주 역시 유배를 갔을 뿐이었다.


고모 화완옹주는 정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괴소문에 시달렸는데 세손이 불임이라는 소문이었다.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에 따르면 “세손이 아들 못 낳는 병환이 있다”라는 풍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정조는 만 10세 때인 1762년에 세손빈 김 씨와 혼인했다. 불임이라는 소문은 혼인한 지 10년을 넘긴 뒤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마당에 할아버지 영조를 이어 차기 군주가 될 세손이 아이를 못 낳는다는 소문은 세손의 위상을 해치고도 남았다.


<한중록>은 그 소문의 출처가 김귀주라고 지목했다. 김귀주는 새 할머니인 정순왕후의 동생이다.


그런데 소문을 퍼트리는데 함께 기여한 인물은 정조의 고모인 화완옹주였다. 영조의 편애를 받던 화완옹주는 오빠인 사도세자가 비극적 최후를 맞도록 하는 데 관여했을 뿐 아니라 조카인 정조의 즉위를 훼방하는 데도 가담했다.


화완옹주(和緩翁主)는 영조의 아홉째 딸이며, 사도세자의 친동생이자 정조의 고모이다. 영조는 화순옹주, 화평옹주와 더불어 화완옹주를 대단히 총애했다.


화완옹주 역.PNG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화완옹주 역


1756년(영조 32) 화완옹주가 딸을 낳자 영조는 버선발로 달려갔다. 그런데 화완옹주의 딸은 생후 5개월 만에 죽었고 다음 달에는 남편 정치달이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사위가 죽은 날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 씨도 사망했다. 그런데 영조는 조강지처의 죽음은 안중에도 없고 딸을 위로하겠다며 화안옹주의 집으로 문상을 갔다.


딸에 대한 유별난 사랑이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본처를 얼마나 무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신들이 예법에 어긋난다며 모두 영조를 만류했지만 듣지 않았다.


영조는 혼자 남은 화완옹주를 궁궐에서 살게 했다. 왕세자 외에 중전이 낳은 대군도 혼인 이후에는 모두 궁 밖에서 살아야 했으니 파격적인 조치였다. 영조는 혼자 남은 화완옹주를 위해 양자를 들이게 했다. 남편 정치달의 먼 친척인 정후겸을 양자로 들였는데 당시 나이가 16살이었다.


정후겸은 화완옹주의 후광을 등에 업고 소과와 대과에 합격했고 빠른 승진길에 올랐다. 정후겸은 정조와 3살 터울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화완옹주는 정후겸을 앞세워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가 손잡은 사람은 홍인한이었다.


이후 정조의 정적으로 세손 시절 대리청정을 막고 모해한 죄로 화완옹주는 작위를 박탈당하고 서인으로 강등되었다.


처음에는 강화도 교동, 나중에는 경기도 파주 등으로 유배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대신들의 처벌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않다가 1799년(정조 23) 화완옹주의 죄를 없애고 용서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한중록>에는 정치달이 남편이라 ‘정처(鄭妻)’로 낮추어 쓰인 화완옹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한중록.PNG <한중록> 책


“정처는 항상 자기 아들 후겸은 글도 잘하고 예의 바르고 정중하여 기특하다고 하고, 세손은 제 아들만 못한 듯이 말하였으니, 어찌 감히 이러하리오.”


화완옹주가 양자를 칭찬하면서 은근히 세손을 폄하하는 일이 많았다고 적었다.


화완옹주는 세손 부부를 이간시키기도 했다. 정조가 18세 된 1770년부터 화완옹주가 조카 부부를 적극적으로 갈라놓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이 좋은 금슬로 행여 아들을 낳을까 겁나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세손은 불임’이라는 김귀주의 말로 민심이 소란스러웠다. 다행히 정조는 1782년 문효세자를 얻었고 1790년 순조를 얻어 소문은 잦아들었다.


사실 정조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집안은 홍인한과 함께 노론 벽파를 이끌던 홍계희(洪啓禧) 집안이었다. 홍계희는 시정의 무뢰배인 나경언(羅景彦)을 사주해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고하게 하여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었다.


정조의 보복을 두려워한 홍계희의 아들 홍지해는 홍인한과 함께 세손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하자 무력을 동원해 정조를 암살하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전군(恩全君) 추대사건’이 터졌다. 홍계희의 8촌인 홍계능(洪啓能)과 홍상범의 사촌인 홍상길(洪相吉)이 주도하여 정조를 살해한 후 사도세자와 경빈 박 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을 국왕으로 추대하고자 한 사건이다.


홍계능의 아들과 조카, 제자 등이 가담한 이 사건에는 전 참판 민홍섭과 전 승지 홍락임 등이 연루되었다. 홍락임은 혜경궁 홍 씨의 친동생이다. 즉 정조의 외삼촌이 조카를 살해하는 모의에 가담한 셈이다.


정조는 친히 국청을 열어 관련자 은전군을 자진(自盡)시키고 주동자 23명을 사형에 처했다. 이 사건으로 유배를 갔던 정후겸과 위리안치되었던 홍인한 역시 사사되었다.


존현각 자객 침투 사건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불과 1년 만인 1777년(정조 1년) 7월 28일 밤, 조선 역사상 가장 대담하고 충격적인 암살 시도가 벌어졌다. ‘정유역변(丁酉逆變)’이라 불리는 존현각 자객 침투 사건이다.


당시 정조는 경희궁의 존현각(尊賢閣)을 거처로 삼고 있었다. 침전이자 공부방이었던 이곳에서 정조는 밤늦도록 책을 읽으며 불면의 밤을 보냈다.


KakaoTalk_20260212_101226610_01.jpg 경희궁 자정전 잡상


홍지해의 조카인 홍상범(洪相範)은 역사인 전흥문(田興文)과 궁성을 경호하는 호위군관 강용휘(姜龍輝)를 포섭한 뒤 어둠을 틈타 궁궐 담장을 넘었다. 이들은 궁궐 수비대와 내시들을 미리 매수하여 정조의 침전인 존현각 지붕 위까지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대내(大內)에 도둑이 들었다. 임금이 어느 날이나 파조(罷朝)하고 나면 밤중이 되도록 글을 보는 것이 상례이었는데, 이날 밤에도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가 촛불을 켜고서 책을 펼쳐 놓았고, 곁에 내시(內侍) 한 사람이 있다가 명을 받고 호위(扈衛)하는 군사들이 직숙(直宿)하는 것을 보러 가서 좌우(左右)가 텅 비어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들리는 발자국 소리가 보장문(寶章門) 동북(東北) 쪽에서 회랑(回廊) 위를 따라 은은(隱隱)하게 울려왔고, 어좌(御座)의 중류(中霤)쯤에 와서는 기와 조각을 던지고 모래를 던지어 쟁그랑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형용할 수 없었다. <정조실록 4권> 정조 1년 7월 28일


정조는 지붕 위에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바짝 긴장했다. 정조는 평소에도 암살 위협 때문에 옷을 벗지 않고 책을 읽다 잠들 정도로 경계심이 심했다.


3 경희궁 9.jpg 경희궁 숭정문


정조는 곧 내관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주위를 살펴보라 일렀다. 자객들은 모래와 돌을 던지며 저항하다가 도주했다. 임금의 개인 공간인 침전 바로 위까지 자객이 침투했다는 사실은 조정 전체를 경악게 했다.


이들은 보름 뒤에 재차 경추문(景秋門) 북쪽 담장을 넘어 거사하려다가 수포군에게 체포되었다.


조사 결과, 이 사건의 배후에는 정조의 즉위를 반대했던 홍상범, 홍계능 등 노론 벽파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심지어 궁궐 안의 나인들과 호위 군관들까지 포섭하여 정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정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관련자들을 엄중히 처벌하며 왕권 강화의 고삐를 죄었다.


존현각 사건은 정조에게 엄청난 심리적 불안감을 안겼고 이는 홍국영에 대한 절대적 의존으로 이어졌다. 정조는 궁궐 수비대를 믿지 못하게 되자, 임금을 전담 마크하는 호위 부대인 ‘숙위소(宿衛所)’를 만들고 이 부대의 모든 지휘권을 홍국영에게 맡겼다. 그리고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겼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로 막강한 힘이 있었던 홍국영은 군사권까지 손에 쥐게 되었다. 왕의 생명을 지키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명분은 그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정당화해 주었다.


정조는 즉위 직후 홍국영을 도승지에 앉히며 전례 없는 권력을 위임했다. 정조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대신, 홍국영을 통해 반대파인 정후겸과 홍인한 등을 숙청했다. 홍국영은 정조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여 실행했다.


홍국영은 혜경궁 홍 씨 아버지인 홍봉한과 같은 풍산홍(洪)씨 가문이다. 홍봉한은 홍국영의 10촌 조부이며 혜경궁 홍 씨는 11촌 숙모에 해당한다.


홍국영은 영조 48년(1772)에 25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시강원 사서(司書)에 임명되면서 세손과 만났다.


원래 그의 가문은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홍국영은 시정의 거친 밑바닥 문화를 몸소 체험하며 자랐다. 그는 유학자들의 고리타분한 경전 읽기 대신,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법을 알았다.


홍국영.PNG
이산11.PNG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의 홍국영 & 정조 역


그는 술을 좋아하고 잡기에 능했으며 시도 잘 짓고 창도 잘 불렀다. 홍국영이 좋아했던 창은 ‘나비야 청산 가자, 호랑나비야 너도 가자’였는데 이 노래로 장안에 소문이 자자했고 잘생긴 외모로 인해 기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홍국영은 풍류를 알고 즐기는 남자였으나 주변에서는 그를 경박하다며 무시했고 같은 풍산홍씨 집안에서도 홍국영 집안은 무시의 대상이었다.


정조의 스승이 된 홍국영은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를 충실히 보필했다. 그는 정조를 위해 모든 정보를 상세히 제공하면서 정치적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고단한 처지의 정조에게 홍국영은 유일한 은신처이자 보호막이었다.


충신에서 권신이 된 홍국영

정조가 홍국영을 그렇게 믿고 따를만한 일이 세손 시절에 있었다. 이는 채제공이 쓴 <번암집(樊巖集)>에 있는 이야기지만 여러 드라마에서 대본으로 사용했다.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를 둔 영조는 콤플렉스가 심했다. 영조는 <자치통감강목(自治通鑑綱目)> 중 한 문제(漢文帝)의 “짐은 고황제 측실 소생이었다(側室之子)”라는 발언을 적은 어구를 매우 싫어했다.


어느 날 세손이 영조에게 문안하자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물었다.

“통감강목을 읽고 있습니다.”

영조는 곧 노기 띤 음성으로 물었다.

“강목 넷째 권에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것도 읽었더냐?”

놀란 세손은 엉겁결에 거짓말을 했다.

“그 대목은 읽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영조는 대전 내관에게 명하여 동궁으로 가서 세손이 읽던 책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세손의 속은 타들어 갔다. 임금에게 거짓을 고했으니 기군망상의 죄였다.


대전 내관이 동궁에 갑자기 찾아와 통감강목 넷째 권을 찾자 영민한 홍국영은 일의 전말을 눈치챘다. 홍국영은 책을 찾아주겠다고 말한 뒤 문제의 내용이 적힌 부분을 찢어서 내주었다.


대전 내관이 책을 가져오자 영조는 해당 구절이 적힌 곳을 찾아보라고 했고 내관은 그 부분이 찢겨 없다고 고했다. 영조는 직접 책을 받아 눈으로 확인한 뒤 그제야 웃으며 세손을 칭찬했다.


**영조는 통감강목이 아니라 <사기> '노중련전'나오는 "질차, 이모비야(叱嗟, 爾母婢耶-꾸짖어 말하기를, 네 어미는 종년이다)"라는 어구를 싫어했다. 그리고 실제 강목에는 위와 같은 대목이 없다고 한다.**




3 운현궁1.jpg 경희궁 전각


홍국영의 임기응변을 알게 된 세손은 “재생지은(再生之恩, 다시 살아나게 된 은혜)”이라고 말하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내가 만약 무사히 보위에 오르게 된다면 그대가 거병범궐(擧兵犯闕, 군사를 일으켜 궐에 쳐들어가는 것(역모))하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의 신변과 지위를 보전하겠소.”


정조는 이렇게 파격적인 약속을 하면서 홍국영을 자신의 최측근으로 삼았다. 정조는 자신을 위해 ‘수양제’의 금기된 기록까지 찢어버리며 위기를 막아낸 홍국영의 대담함과 영민함에 매료되었다.


이후 정조는 홍국영을 “무너지는 하늘을 한 손으로 버텨준 사람”이라며 신하 그 이상의 동반자로 받아들였다.

1776년 3월 승정원 동부승지(종 3품)로 출발했던 홍국영은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파격적으로 발탁되어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로 승진하였다. 이후 중앙 군영 중 하나인 금위영의 금위대장(종 2품)을 맡아 군사권까지 손에 쥐었다.


그리고 존현각 자객 사건 암살 위협 이후 정조의 신뢰가 극에 달해 수사 및 호위 전권을 장악했고 방위의 핵심인 훈련도감 대장직(종 2품)까지 겸하며 조선의 모든 병권을 장악했다. 또한 임금의 측근 호위를 전담하는 숙위소(宿衛所)가 창설되자 초대 대장에 취임하고 1778년 5월에는 규장각 요직인 직제학을 맡았다.


이쯤에서 홍국영이 만족하고 끝까지 정조의 신하로 남았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왕의 측근으로 권세를 누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홍국영은 점점 자신의 소임을 잊고 정조의 통치 노선과 배치되는 권신(權臣)의 길로 접어들었다.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孝懿王后) 김 씨는 병약하여 후사가 없었다. 이를 본 홍국영은 자신의 13살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갓 후궁이 된 여동생은 원빈(元嬪)이라는 첩지를 받았는데 으뜸 원(元) 자는 왕비만이 쓸 수 있는 단어였다. 또한 후궁이 빈(嬪)이 될 수 있는 자격은 아들을 낳아야만 가능했으나 원빈은 입궁하자마자 빈으로 불리는 등 특별 대우를 받았다.


홍국영은 왕과 담 하나 사이를 둔 숙위소에서 머물며 왕의 여자인 궁녀들과 의녀들을 데려다가 추태를 저지르는가 하면 삼정승도 그의 허락 없이는 왕을 볼 수도 없고 상소 하나도 올릴 수 없도록 언로까지 차단했다.


당시 조선의 모든 인사는 홍국영의 입에서 나왔고, 모든 보고는 홍국영의 손을 거쳤다. 삼정승이 그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서야 했고, 그는 맨발로 평상에 앉아 대신들의 절을 받을 만큼 오만해졌다.


그는 수군통제사에 세찬 물품을 자신이 개인으로 따로 받았으며 팔도의 방백과 수령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상납받았다.


국가 대사가 모두 홍국영을 거친 뒤 정조에게 보고됨으로써 홍국영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세상에서는 홍국영의 전정(專政)을 두고 세도정치(勢道政治)라고 불렀다. 정조 사후 60년 동안 진행된 세도정치의 효시가 바로 홍국영이었다.


이에 채제공을 비롯한 조정 원로들의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조의 묵인 아래 아무도 홍국영의 독재를 막을 자가 없었다.


20251120_101833.jpg 창덕궁 전각


행인지 불행인지 원빈 홍 씨는 자식을 낳지 못하고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홍국영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노력하여 겨우 왕의 외척이 되었는데 그 특별한 대우를 놓칠 수 없었다.


이성을 잃은 홍국영은 동생의 죽음을 독살이라 주장하며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중전의 궁녀들을 잡아다가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이는 정조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왕실 능멸’이었다.


홍국영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의 아들 상계군(常溪君) 이심(李湛)을 죽은 원빈 홍 씨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에 봉했다. 즉 죽은 누이의 양자로 차기 왕위 계승권까지 넘보려 했던 것이다.


홍국영은 송덕상을 이용해 왕세자 책봉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자 정조도 더는 홍국영을 봐줄 수 없었다. 정조가 나이가 많아 후사를 얻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홍국영의 행보가 상식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를 같이하여 채제공을 비롯한 조정 중신들의 상소가 은밀히 정조에게 올라왔다. 물론 홍국영이 눈치채지 못하게 에둘러 올라온 상소였다.


상소를 읽고 그동안 홍국영의 만행을 알게 된 정조는 조용히 홍국영을 불러 독대했다. 정조는 냉철했다. 자신을 위해 헌신했던 홍국영이었지만,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 순간 그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20251120_120041.jpg 창덕궁 후원의 정자


1779년 9월 26일,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지 꼭 7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날 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다만 면담 직후 홍국영은 모든 관직을 내려놓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상소를 받고 서른한 살의 청년 홍국영에게 은퇴한 노신하에게 주는 봉조하(奉朝賀)라는 명예 직위를 내렸다.


“그동안 나를 충심으로 돌보았으니 너를 죽이지는 않겠으나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


아마도 이렇게 단호한 절교 선언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정조는 곧 홍국영의 세력 기반이 된 숙위소 등을 일거에 폐지한 뒤 서명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켰다.


권력의 정점에서 줄줄이 탄핵까지 받은 홍국영은 강릉으로 유배를 갔다. 그는 강릉 바닷가에서 술로 울화를 달랬다. 홍국영은 매일 서울 쪽을 바라보며 “주상께서 곧 나를 부르실 것이다”라고 기다렸지만 끝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홍국영은 실각 2년 만에 서른셋이라는 젊은 나이로 병을 얻어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정조는 말했다.


“그가 죄에 빠진 것은 사려가 올바르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이는 나의 허물이기도 하다.”


한때는 가장 믿었던 신하를 자신의 손으로 내쳐야 했던 왕의 아픈 심정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정조와 홍국영의 관계는 필요에 따라 만났으나 욕망에 의해 갈라선 권력의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홍국영은 정조라는 태양을 가장 가까이서 받든 거울이었지만, 스스로 태양이 되려 빛을 반사하다가 결국 그 열기에 타버리고 말았다.


홍국영의 파격적인 승진은 곧 정조가 왕권을 확립해 가는 과정이자, 동시에 한 신하에게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었을 때 발생하는 부작용을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진정 열흘 이상 붉은 꽃은 없나 보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

<정조실록(正祖實錄)>

<홍재전서(弘齋全書)>

나무위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한중록(閑中錄)>

수원문화재단

디지털구리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