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 무사 야뇌 백동수
서장대를 둘러보기 위해 수원을 다시 찾았다. 이번이 세 번째 방문이다.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에 오르려면 몇 갈래의 길이 있다. 먼저 화서문에서 둘레길을 따라가는 방법과 수원행궁 뒷길을 오르는 방법, 그리고 팔달문에서 시작해 계단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어느 곳을 선택하더라도 가파른 계단을 피할 수는 없다. 팔달산의 높이는 146m, 남산이 270m니 그리 높은 산은 아니다. 실제로 올라 본 결과 어린아이들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길은 아니었다.
팔달산(八達山)은 들판 가운데 솟아 있어 수원 시내를 사방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팔달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팔달산에는 서장대, 서노대, 서포루, 화양루 등의 누대가 있다.
서장대는 지휘관이 성 주변을 살피면서 병졸을 지휘하던 곳이다. 사방 10리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은 팔달산 정상에 자리한 수원화성의 군사지휘본부였다.
화성에는 두 곳의 장대가 있는데 동장대는 평상시 군사들이 훈련하는 장소로 쓰고, 서장대는 군사훈련 지휘소로 썼다. 서장대에서는 멀리 용인 석성산 봉화와 융릉 입구까지 한눈에 살필 수 있었고 ‘화성행궁’을 내려다볼 수 있다.
나는 화성행궁에서 계단을 오르는 방법을 선택했다. 계단이 가팔랐으나 관광안내소에서 가장 단시간에 올라갈 수 있는 길이라고 추천해 주었다.
화성행궁 주차장을 지나 팔달산을 올랐다. 성곽에 바짝 붙은 계단 길과 그 옆에 조금 돌아가는 길이기는 하나 널찍하게 잘 닦인 길이 있었다. 일단 잘 닦인 길 쪽으로 들어섰다. 왜냐하면 행궁동 광장에서 높이 솟은 불상이 보였기 때문이다.
조금 걷자 대승원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절이라기보다 음식점이거나 카페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내가 들어간 곳은 후문이었고 정문은 안쪽으로 따로 있었다.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꽤 큰 절이었다.
대승원(大乘院)은 1954년 마하사(摩訶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고, 1968년 대승원으로 개칭되었다. 고봉(杲峰) 황성기(黃晟起) 스님이 대중 교화를 위해 ‘마하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대승원은 특정 종단에 소속되지 않은 사찰이다. 이 사찰에서 눈에 띄는 것은 19m 높이의 입상인 미륵불이다. 미륵불은 중생 구제의 희망을 상징하며, 팔달산 동쪽 기슭에서 행궁동을 내려다보고 있다.
미륵불 아래에는 동굴처럼 만들어진 법당이 있고 그 안에 약사여래상이 있다. 약사여래는 현세의 고통과 병을 없애주는 보살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계속해서 들어오고 나갔다. 나 역시 오래 머물지 않고 곧 절에서 나왔다.
조금 걸어가니 드디어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은 꽤 가팔랐다. 양쪽에 설치해 놓은 조명이 보였는데 저녁에 오면 꽤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단이 가파르기는 해도 금방 올라왔다. 보통 25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천천히 올라와서 그보다는 조금 더 걸렸다.
올라오면 툭 터진 광장이 나오고 가장 먼저 서장대가 눈에 띄었다. 수원 시내를 사진에 담았다.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하더니 오후 1시가 넘었는데 안개가 다 걷히지 않았다. 멀리까지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으나 아쉬운 대로 수원시를 둘러볼 수 있었다.
서장대는 아래층은 사면 3칸, 위층은 1칸으로 위로 가면서 좁아진 형태다. 아래층은 장수가 머물면서 군사훈련을 지휘하고, 위층은 군사가 주변을 감시하는 용도로 썼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 2월 12일 현륭원(융릉)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 훈련과 야간 훈련을 지휘했다.
정조가 직접 진두지휘한 군사훈련은 1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훈련에는 장용외영(壯勇外營) 친군위와 응원군 등 3,900명이 참여하였고, 대신들과 다른 영문(營門)의 군사 2,800여 명이 참관하여 군사훈련을 지켜보았다. 이를 현장에서 바라본 노론 대신들은 아마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주간에는 성곽을 동서남북 네 구간으로 나누어 군사들을 배치하고 성에 접근한 가상의 적들을 화포, 조총, 화살, 돌멩이 등의 무기로 퇴치하는 훈련이 진행되었다. 야간에는 횃불 훈련을 실시했는데 당시 명을 따르는 데는 나팔과 징, 북, 해금 등 각종 악기가 사용되었다. 군사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정조는 꽤 만족했다고 한다.
‘화성장대(華城將臺)’ 현판은 정조가 직접 쓴 글자를 복원한 것이다. 정조는 서장대에서 군사훈련인 성조식(城操式)을 거행한 후 견고하게 쌓은 화성 성곽에 대해 만족감을 드러내고 잘 훈련된 군사들을 칭찬했다. 그리고 이날의 훈련을 기념하고자 친히 현판의 글씨를 쓰고 오언율시(五言律詩)를 지어 서장대에 걸도록 했다.
어제(御製) 화성장대시문(華城將臺時文)은 가로 243㎝, 세로 765㎝, 두께 3.6㎝의 잣나무로 만들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원본을 따라 1795년에 복원하여 걸었다.
拱護斯爲重 經營不費勞(공호사위중 경영불비노)
현륭원 호위 중요하지만, 세금과 노역 쓰지 않았네
城從平地迥 臺倚遠天高(성종평지형 대의원천고)
성곽은 평지 따라 둘러 있고, 먼 하늘 기댄 장대는 높다랗구나
萬垛䂓模壯 三軍意氣豪(만타규모장 삼군의기호)
많은 성곽 구조 굳건하고, 군사들 의기 호기롭네
大風歌一奏 紅日在鱗袍(대풍가일주 홍일재린포)
대풍가 한 곡조를 연주하니, 붉은 햇살이 갑옷을 비추는구나
이 어제(御製-왕이 지은 글)와 어필(御筆-왕이 쓴 글씨)은 화성에서 유일하게 정조가 짓고 글씨를 썼다.
왕의 시문 현판 테두리에는 높은 위계의 칠보문(七寶紋)을 그렸다. 정조의 시문 현판은 원래 2층에 걸려 있었는데 시민들이 편하게 볼 수 있도록 1층으로 옮겨 걸었다.
13개의 나무 계단으로 된 2층 마루는 올라가지 못하게 자물쇠로 잠가두었다. 그리고 1층 마루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 쉴 수 있다. 사람들이 마루에 앉아서 내려오지 않아 사람이 없는 사진은 찍기 힘들었다.
서장대는 목조건물로 보존 가치가 상당히 높은 누각인데 지난 2006년 사회에 불만을 품은 20대가 방화를 저질러 누각 일부가 소실되었다. 화재는 신속한 신고로 전소는 막았으나 소중한 문화유산에 크나큰 흠집을 냈다.
노대는 다연발 기계식 활인 노(弩)를 쏘기 위해 높게 지은 시설이다. 서쪽에 있어 서노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노대는 적의 동향을 살피고 깃발을 이용해 적의 위치를 알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팔달산 정상에 있어 서쪽 일대를 한눈에 감시하기 좋았다. 높이는 약 5m에 달한다.
화성에는 서노대와 동북노대 두 곳이 있는데 서노대는 팔각형의 몸체가 위로 가면서 줄어드는 안정적인 형태로 안에는 흙을 채우고 겉은 벽돌로 마감하였다.
서장대와 서노대를 둘러본 후 내려가는 길은 팔달문 쪽으로 잡았다. 수원화성은 조금만 걷다 보면 성곽 외에도 볼 것이 많기에 귀찮더라도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는 것이 좋다.
암문은 성곽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도록 만든 출입구다. 사람이나 가축이 다니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화성에는 모두 5개의 암문이 있는데 그중 서암문은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는 암문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춰져 있다. 1796년(정조 20) 6월 18일 완공되었다.
효원의 종은 1991년 11월 수원시가 조성한 높이 3.54m, 지름 2.15m, 무게 12.5톤의 종이다.
종의 전면에는 수원시의 상징물인, 은행나무, 철쭉, 비둘기 등과, 화홍문을 비롯해 수원화성의 주요 문화재가 새겨져 있다.
효원의 종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다. 원래는 표를 구매하여 종을 쳐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다.
요금을 내면 효원의 종을 3번 타종할 수 있었는데 첫 번째는 부모님 은혜에 감사하고, 두 번째는 가족의 건강과 화목을 빌며, 세 번째는 자신의 발전과 소원 성취를 기원했다.
종각 근처에는 정조가 직접 썼던 한글을 각종 문헌에서 모아 집자한 ‘세계문화유산 화성’ 푯말이 있다.
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서북각루와 서장대 사이에 있으며 1796년(정조 20) 5월 30일 완공되었다.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3층의 내부를 비워두고 그 안에서 화포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서포루를 지나면 성밖으로 나가는 문이 보인다. 밖으로 나가보니 서장대 관광안내소가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갔다.
“팔달문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는 게 가장 편한 길인가요?”
“어느 쪽에서 올라오셨어요?”
“화성행궁이요.”
“계단이 조금 가팔랐죠?”
나는 대답 대신 웃었다.
“화성행궁에서 올라오셨으면 팔달문 쪽으로 내려가시죠. 그쪽 계단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내려가는 길이라 수월하고 볼 게 많아요.”
“혹시 행궁 앞에서 장용영 무술대회는 오늘 안 하나요?”
“화성의 모든 행사는 겨울에는 다 쉽니다.”
오늘은 서장대에 왔기에 장용영의 무술을 꼭 보고 싶었는데 겨울에는 쉰다는 말에 조금 아쉬웠다. 안내하시는 분은 굳이 밖으로 따라 나와 길을 알려 주었다.
“저쪽으로 가시면 화양루가 있어요. 화양루를 보시고 다시 돌아 나와서 팔달문 표지를 따라 내려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매우 친절하신 분이었다.
화양루를 향해 길을 걸었다. 서장대에서 화양루까지 가는 길은 소나무와 성곽의 운치가 가히 국보급이었다. 너무 아름다웠다.
걷다 보니 왼쪽으로 높은 탑이 보였다. 3.1 독립운동기념탑과 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 탑이 왜 이곳에 세워졌는지 왠지 생뚱맞게 보였지만 다가가서 설명문을 읽어보았다.
높이 4m에 이르는 3.1 독립운동기념탑은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왜경 노구찌 소위의 순국비를 허물고 그 자리에 세웠다.
원래 1969년 3월 1일에 중포산에 건립된 것을 1969년 10월 15일 수원 시민의 날에 삼일동지회가 팔달산으로 옮겼다고 한다.
대한민국독립기념비는 1948년에 수원 동공원에 세워졌다.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수원 시민들이 직접 세운 기념비인데 역시 삼일동지회가 팔달산으로 이전했다.
정조가 즉위했을 때 조선의 군사는 5군영이 담당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중 훈련도감이 설치되고, 1623년 어영청, 1624년 총융청, 1626년 수어청, 1682년 금위영이 차례로 설치되었다.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한양도성 수비와 궁궐 경비를 맡았고, 총융청은 북한산성, 경기 서북부, 수어청은 남한산성, 경기 동남부를 담당했다.
그러나 5군영은 정조의 편이 아니었다. 5군영은 이미 특정 가문의 세력권 아래 있었기에 정조는 믿을 수 있는 친위 세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정조는 무과시험을 수시로 치르고 실력이 뛰어난 무사들을 직접 뽑았다. 정조는 군사를 선발할 때 신분이나 가문은 보지 않았고 오직 실력만 보았다.
무과는 활쏘기, 말타기는 물론이고 각종 병기 다루는 법을 엄격하게 심사했다. 뽑힌 군사들에게는 다른 군영보다 높은 급료와 좋은 보급품을 지급했다. 이는 군사들이 생계 걱정 없이 훈련에만 매진하게 함으로써 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서얼(서자)이나 평민 출신이라도 무예가 뛰어나면 등용된다는 말에 전국에서 숨어 있는 무사들이 적극적으로 시험을 치렀다.
정조는 무려 37번의 무과시험을 치르며 매 시험마다 많은 무사를 합격시켰다. 1784년 9월에는 정원 외 합격자만 2천900명이 넘었다.
즉위 직후부터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정조는 자신을 충직하게 지킬 호위 무사 30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1785년(정조 9년)에 우선 국왕 호위를 전담하는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했다.
처음에는 규모가 작았으나, 1793년(정조 17년)에 이를 장용영(壯勇營)으로 격상시키며 5군영보다 더 강력한 위상을 갖게 했다. 정조는 서울을 지키는 ‘내영(內營)’과 화성(수원)을 지키는 ‘외영(外營)’으로 나누어 운영하며 수도권 방위 체계의 핵심으로 삼았다.
야뇌(野餒) 백동수(白東脩)는 조선의 최대 무사였다. 백동수의 호 ‘야뇌(野餒)’의 원래 뜻은 '들에서 굶주리는 자'를 뜻한다. 그러나 백동수는 '거친 황야에서 굶주리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이해서 썼다.
백동수의 증조부는 함경도, 황해도,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이름난 장수 백시구(白時耉)였다. 그런데 할아버지 백상화(白尙華)와 아버지 백사굉(白師宏)이 서자여서 백동수도 서자였다. 그는 같은 처지인 박제가, 이덕무 등과 어울렸는데 이덕무와는 처남매부지간이었다.
무사 집안에서 태어난 백동수는 소년시절부터 할아버지와 당대의 빼어난 무인, 장안의 협객들과 두루 사귀었다. 그의 스승은 조선의 검객 김체건의 아들로 ‘검선(劍仙)’이라 불리던 김광택이었다. 백동수는 평소 검술을 익히는 한편 병법을 깊이 연구했다. 무예가 뛰어나 당대에 창검(槍劍)의 일인자로 꼽혔고, 마술(馬術)과 궁술(弓術)에도 뛰어났다.
그는 학문에도 매진하여 문무에 모두 출중했다. 이덕무는 자신이 지은 글에 대한 비평을 백동수에게 부탁했다. 또 백동수는 서예는 물론 그림도 잘 그려 단원 김홍도와 화법을 논하기도 했다.
백동수는 좋은 가장은 아니었다. 그는 30대에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고 ‘천금’의 재산을 다 써 버려 끼니를 걱정할 형편이 되었다. 장사로 돈을 벌려고 일본 무역을 시도했으나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
백동수는 자신이 거처하는 사랑방을 '초어청'이라 이름 지었다. 초어청은 농부와 어부의 집이란 뜻이다. 인격이 훌륭했던 백동수의 사랑방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의 폭넓은 인간관계에 대해 박제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숙(백동수의 자)은 일찍부터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그분과 우정을 맺은 사람은 나라 안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위로는 정승과 판서와 목사와 관찰사가 그분의 벗이고, 다음으로 현인 명사 또한 그분을 인정하고 추켜세웠습니다. 그 밖에 친척이나 마을 사람들 그리고 혼인의 이를 맺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게다가 말을 달리고 활을 쏘며, 검을 쓰고 주먹을 뽐내는 부류와 서화, 인장, 바둑, 거문고와 가야금, 의술, 지리, 방기의 무리로부터 시정의 교두군, 농부, 어부, 백정, 장사치 같은 천인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에서 만나서 누구 하고나 날마다 도타운 정을 나눕니다.”
백동수는 1771년(영조 47), 그의 나이 29살에 병과(丙科) 무과에 18등으로 급제하여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서얼이라는 신분상의 한계와 숙종대 이후부터 관직 수가 턱없이 부족해 벼슬을 얻지 못했다. 그는 관직에 출사 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었다. 실망한 그는 가족과 함께 강원도 인제 기린협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고 살았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癡)'로 알려진 이덕무는 문집 <청장관전서>에 백동수에 관한 글을 실었다. 다음은 '야뇌당기(野餒堂記)'에 실린 글의 일부분이다.
야뇌(野餒)는 누구의 호(號)인가 하니, 나의 벗 백영숙(白永叔: 영숙은 백동수(白東修)의 자)의 자호(自號)이다. 내가 영숙을 보매 기이하고 훌륭한 선비인데, 무엇 때문에 어리석고 비루함을 자처(自處)하는가? 나는 그 까닭을 알고 있다. 대체로 사람이 시속에서 벗어나 군중에 섞이지 않는 선비를 보면 반드시 조롱하기를, ‘저 사람은 얼굴이 순고하고 소박하며, 의복이 시속을 따르지 아니하니 야인(野人)이로구나. 언어가 질박(質朴)하고 성실하며 행동거지가 시속을 따르지 아니하니 뇌인(餒人)이로구나.’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그와 함께 어울려 주지 아니한다. (중략)
영숙은 고박(古樸)하고 질실한 사람이라 차마 질실한 것으로써 세상의 화려한 것을 사모하지 아니하고, 고박한 것으로써 세상의 간사한 것을 따르지 아니하여 굳세게 우뚝 자립해서 마치 저 딴 세상에 노니는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세상사람 모두가 비방하고 헐뜯어도 그는 조금도 야(野)한 것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뇌(餒)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이야말로 진정한 야뇌라고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북학파의 일원으로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던 백동수는 이덕무와 박제가를 박지원에게 소개해 주었다. 홍대용, 유득공 같은 학자들도 일찍부터 그와 사귀던 벗이다.
연암 박지원도 그의 <연암집(燕巖集)> 제1권 '연상각선본(煙湘閣選本)'에서 시골로 떠나는 백동수를 아쉬워하는 글을 남겼다.
인재(靭齋) 백동수(白東修)는 장군 집안의 자손이다. 그 조상 중에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목숨 바친 이가 있어서 이제까지도 사대부들이 그를 슬프게 여긴다. 백동수는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쓰고 전장(典章)과 제도(制度)도 익숙히 잘 알며, 젊은 나이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무과에 급제하였다. 비록 시운(時運)을 타지 못해서 작록(爵祿)을 누리지는 못하였으나,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을 그 뜻만은 조상의 공적을 계승함 직하여 사대부들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아! 이런 백동수가 무엇 때문에 온 식구를 거느리고 강원도의 땅으로 가는 것인가? (중략)
이제는 백동수가 기린협에 살겠다며 송아지를 등에 지고 들어가 그걸 키워 밭을 갈 작정이고, 된장도 없어 아가위나 담가서 장을 만들어 먹겠다고 한다. (중략)
그 사람의 떠남이 이처럼 슬피 여길 만한데도 도리어 슬피 여기지 않았으니, 선뜻 떠나지 못한 자에게는 더욱 슬피 여길 만한 사정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음절이 호방하고 웅장하여 마치 고점리(高漸離)의 축(筑) 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정조는 인재를 가리지 않고 실력 있는 사람이면 무조건 믿고 일을 맡겼기에 서얼 출신의 많은 학자들이 등용되었다. 이덕무와 박지원도 그렇게 뽑힌 인재였다.
서얼은 조선 신분계급 중 하나로 양반의 자손 중 첩이 낳은 자식을 말한다. 양반과 양인 출신 첩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서자, 양반과 천인 출신 첩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얼자, 이 둘을 통틀어 서얼이라 불렀다.
규장각에서 일했던 이덕무는 처남 백동수를 정조에게 소개했다. 정조는 곧 백동수를 불러들였고 그의 무술을 시험해 본 후 흡족해했다. 백동수는 종9품 장용영의 초관(장교)으로 임명되어 정조의 최측근에서 군사들을 교육하고 왕을 호위했다.
정조에게 백동수는 자신의 군사적 이상을 현장에서 실현해 준 든든한 동반자였다. 정조는 장용영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고 왕권을 세웠으며 화성 건설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었다.
정조는 1776년 군사훈련 개혁을 위해 진법서인 <병학통(兵學通)>을 편찬했다. 이후 정조는 좀 더 완벽한 군사훈련서를 만들고자 했다.
1789년 정조는 조선의 전통 무예와 주변국의 무예를 집대성한 표준 훈련 교본을 만들라는 명을 내렸다. 정조는 이덕무, 박제가에게 글을 맡겼고 실전 무예의 최고봉이었던 백동수에게 직접 동작을 시연하고 검수하게 했다. 세 사람은 규장각에서 합숙을 하며 힘을 합쳐 책을 편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다.
당시 조선 군대는 임진왜란 때 도입된 명나라 기술과 숙종 때 배운 일본 검술 등이 뒤섞여 체계가 없었다. 정조는 장용영 군사들이 표준화된 동작으로 훈련할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한중일 3국의 무예 중 장점만을 골라 ‘24가지 무예(24반 무예)’로 정리했다는 점이다. 이름(통지)처럼 본문 설명 뒤에 반드시 도보(圖譜, 그림 설명)를 넣었다. 글을 모르는 병사들도 그림만 보고 동작을 따라 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그림은 김홍도가 주축이 된 도화서 화공들이 그렸다.
<무예도보통지>는 종합 무술 교본으로 만들어졌다. 보병이 땅에서 싸우는 기술(권법, 곤봉, 장창 등) 18가지, 말 위에서 싸우는 마상 무예(마상쌍검, 마상재 등) 6가지를 더해 총 24기를 완성했다.
이 책은 조선의 전통 무예뿐 아니라 명나라의 기효신서, 일본의 검술까지 분석하여 수록함으로써 당시 동북아시아 무예의 정수를 모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무예도보통지>는 조선 군사학의 자부심이 되었다. 훗날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며 소실될 뻔했으나, 오늘날까지 전해져 우리 전통 무예(수박도, 해동검도 등) 연구의 가장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2017년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장용영 군사들은 이 책을 보면서 훈련했는데 24반 무예 중 가장 화려했던 부분은 바로 ‘마상재’였다.
마상재(馬上才)는 ‘말 위에서 부리는 재주’인데 오늘날로 치면 기마 곡예이자 최정예 기병의 전투 기술이다.
마상재는 말을 타고 달리며 적의 화살을 피하거나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여 공격하는 기술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동작은 다음과 같다.
주마입신(走馬立身) : 달리는 말 위에서 벌떡 일어서기.
마상도립(馬上倒立) : 말 위에서 물구나무서기.
횡와(橫臥) : 말의 옆구리에 몸을 숨겨 적의 화살 피하기.
장신(藏身) : 말안장 뒤로 몸을 완전히 숨기기.
초마(超馬) : 달리는 말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훌쩍 뛰어넘기.
말 위에서 몸을 숨기는 기술은 조총이나 화살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말 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능력은 실제 전투 시 떨어지지 않고 적을 베기 위한 필수 역량이었다.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마상재를 선보이면, 일본 무사들이 넋을 잃고 구경하며 비법을 전수받으려 애썼다는 기록도 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완성되었다. (중략)
상이 즉위하자 명하여 기창(騎槍), 마상 월도(馬上月刀), 마상 쌍검(馬上雙劒), 마상 편곤(馬上鞭棍) 등 4가지 기예를 더 넣고 또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를 덧붙여 모두 24가지 기예가 되었는데, 검서관(檢書官)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에게 명하여 장용영(壯勇營)에 사무국을 설치하고 자세히 상고하여 편찬하게 하는 동시에, 주해를 붙이고 모든 잘잘못에 대해서도 논단을 붙이게 했다. 이어 장용영(壯勇營) 초관(哨官) 백동수(白東脩)에게 명하여 기예를 살펴 시험해 본 뒤에 간행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중략) <정조실록 30권, 정조 14년 1790년 4월 29일>
오랜 기간 장용영을 키우기 위해 힘썼던 정조는 마침내 그 위상을 대신들에게 선보이고 선전포고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 2월 12일 현륭원(융릉)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주간 훈련과 야간 훈련을 직접 지휘했다.
이날의 훈련은 12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참가한 군사는 3,900여 명에 달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군사들을 보며 정조는 흐뭇했다.
즉위 초 정조 앞에서 신발을 질질 끌고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신들은 가슴이 철렁했다.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정조는 모든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란 듯이 군사훈련을 실시했던 것이다.
훈련이 끝나자 정조는 장사(將士)들에게 푸짐한 음식을 내리고 성 안팎을 두루 둘러보고는 그곳 형편(形便)과 고적(古蹟)에 대해 낱낱이 물었다.
장용영은 그 설치 목적이 왕권 강화에 있었기에 편제도 중앙집권적인 오위체제를 도입, 강력한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자 1802년(순조 2)에 천하무적이었던 장용영은 혁파되었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백동수는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공로를 인정받아 종6품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에 제수되었다. 그의 말년은 그리 편안하지 못했다. 당시 고을 수령이 되면 한 밑천을 장만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백동수는 재산을 모으기는커녕 받은 봉록조차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다 써 버려 생활이 늘 어려웠다.
1800년 6월,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한 뒤에도 백동수는 아들 순조에 의해 중용되어 1802년 종4품 박천군수(博川郡守) 겸 파총(兼把摠)을 역임했으나, 박천군수 재직 시절 '불왕법장(不枉法贓)', 즉 국법을 어기지는 않았으나 뇌물을 받은 죄로 1806년 경상도 단성현(丹城縣)에 유배되었다. 이 역시 노론의 공작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1807년 장남 백심진(白心鎭)의 상소로 석방되었으며, 1810년(순조 10) 종3품 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은둔하며 제자를 가르치다가 1816년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다만 말년에는 처와 첩도 사망하고 친구들도 죽고 없었으며, 몸도 병으로 인해 거의 움직이지 못한 채로 살았다고 전한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사 백동수는 쓸쓸한 생을 마감했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만기요람(萬機要覽)>
<대전회통(大典會通)>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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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