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문-정조의 신해통공

정조의 오른팔, 번암 채제공

by 김인숙


화양루까지 가는 둘레길 역시 빼어난 경치가 눈을 호강시켰다. 특히 소나무가 자연스럽게 휜 모습은 신비로웠다.


화양루 가는 길, 소나무 윗부분이 마치 연리지 같다.


서남각루(西南角樓)-화양루(華陽樓)

화양루는 효심이 깊었던 정조가 현릉원을 보기 위해 자주 올랐던 장소다.


서남각루와 설명


정조는 화양루에서 현릉원 쪽을 보며 절한 뒤 수원 중심부가 한눈에 보이는 서장대에 올라 마음을 다스렸다. 서남각루는 화성 서남쪽 요충지에 세운 감시용 시설로 ‘화양루’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화성에는 모두 4곳의 각루가 있는데 처음에는 서남각루를 만들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만약 적에게 빼앗기면 공격당할 수도 있기 때문에 계획을 변경하여 서남 암문 바깥으로 길게 용도를 내고 그 끝에 각루를 세웠다.


화양루 전경


건물 전면은 장수가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벽돌을 깔았고, 후면은 바닥을 높이고 창문을 달아서 실내에서도 주변을 살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화양루 앞에도 일가족이 사진을 찍고 있어 잠시 기다렸다. 그중 막내인 듯 보이는 남자아이가 화양루 뒤쪽으로 길이 있다고 우겼다.


가족들은 막내를 따라갔다가 이내 돌아 나왔다.


“봐, 내가 길이 없다고 했잖아?”


누나가 동생을 나무랐다.


안내소에서 “화양루까지 갔다가 돌아서 나오라”라고 했던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인기가 많은 화양루에는 외국 사람들도 오래 머물렀다. 잠시 쉬었다가 사람이 없는 틈을 타 재빠르게 사진을 찍었다.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舖舍)

화양루로 가는 길에 먼저 보였던 서남암문은 화성 서남쪽에 낸 비상 출입문이다. 수원화성의 5개 암문 중 유일하게 서남암문에 포사가 설치되었다. 또 문 위에는 오성지도(물 담는 통)를 설치해 화공(공격) 대비를 강화했다.


서남암문과 서남포사 설명


서남암문은 지형상 적에게 빼앗기면 성안이 노출될 우려가 있어서 방비에 특히 힘을 기울였다. 이름은 암문이지만 성 안팎을 드나드는 통로가 아니라 단지 용도(甬道)를 거쳐 서남각루(화양루)로 가는 문으로 쓰였다.


화양루까지 왔다면 팔달산에서 볼 것은 다 둘러보았다. 이제는 내려가는 길만 남았다.



내려가는 계단, 두 군데 다 이용할 수 있다.


팔달문으로 내려가는 이정표


이정표를 따라 팔달문 쪽으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단과 경사진 길 중 아무 곳이나 가면 된다. 그러나 두 군데 다 돌이 울퉁불퉁해서 발바닥이 아팠다. 오히려 화성행궁 쪽이 발은 훨씬 편했다.


수원 시내를 내려다보며 한참을 내려왔다. 주변에 홍난파 노래비가 있어서 뒤쪽에 새겨진 글을 읽어보았다.


수원이 낳은 우리 음악계의 선구자이신 홍난파(1898-1941) 선생이 곡을 지으신 '고향의 봄' 악보를 선생이 태어나신 지 70돌이자, 신체시가 생긴 지 60돌인 1968년 가을에 우리 고장 어린이와 어른들의 정성으로 여기 노래비를 세움.


그런데 시비가 서 있는 곳이 그리 넓지 않았다. 비 바로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떨어질 수 있으므로 뒤를 조심해야 한다.


홍난파 노래 시비 전경


일단 시비까지 내려오면 반 이상은 내려온 셈이다. 그 일대에 사람이 많았다. 왼쪽으로 가면 장안문으로 갈 수 있는데 이곳은 봄에 벚꽃길로 유명하다고 한다. 팔달문으로 가려면 아직 계단을 한바탕 더 내려가야 했다.


남포루(南砲樓)

화성의 5개 포루(砲樓) 중 하나인 남포루는 팔달문과 서남 암문 사이에 있으며 1796년 7월 9일 완공되었다. 포루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火砲)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로 치성의 발전된 형태다. 팔달문 주위의 성벽과 화양루를 수비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남포루 설명문


그런데 이곳이 왠지 낯익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주인공이 헤어지는 장소가 인상적이었는데 그걸 찍은 곳이 수원 남포루 근처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가 바로 그 장소였다. 일부러 찾아가고 싶은 곳이었는데 그곳이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 아치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다. 성곽은 바깥에서 사진을 찍기에도 아주 좋았다.


내가 찍은 사진


드라마 사진


드라마 포스터


펜싱을 소재로 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16화에서 주인공 나희도와 백이진이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장소인 이곳은 벚꽃이 예쁘기로 유명하다. 드라마 모습처럼 의자와 거울도 아직 그대로 있었다. 사진 스폿인지 사람들도 많았고 북적거렸다.


남포루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마지막 시설물 남치가 보였다.


‘치(稚)’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도록 한 시설물로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이다. 수원화성에는 모두 10개의 치가 있다. 치는 꿩을 말하는 것으로 자기 몸을 숨기고 주변을 잘 살펴보기 때문에 그 뜻을 따서 이름 지었다.


남치


멀리 팔달문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와 위를 쳐다보니 언제 저 계단을 다 내려왔나 싶게 까마득했다.



로데오 거리를 지나 팔달문으로 향했다.


로데오 거리


팔달문(八達門)

보물 제402호인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이름 그대로 '사통팔달(四通八達)', '모든 곳으로 길이 통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팔달문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도로 한가운데 있어 사진만 찍었다.


팔달문의 앞, 뒤, 옆모습


팔달문을 마지막으로 창룡문(동문), 장안문(북문), 화서문(서문)까지 수원화성의 4대 문을 모두 돌아보았다.


수원화성은 4대 문을 비롯해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포루 등 46개의 시설이 만들어져 있다. 또한 4대 문을 중심으로 각 문 사이에 각종 요새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심심할 사이 없이 둘러볼 수 있었다.


미복원 서쪽 성벽 안내문


그러나 동남각루를 끝으로 팔달문까지 500m 남짓 구간의 성곽은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이 근처에는 수원의 전통 시장이 8개나 펼쳐져 있어서 아직 토지 보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정조가 만든 팔달시장

정조는 팔달문 주변을 상업의 중심지로 설계했다. 성문 밖에 시장을 조성하여 전국의 상인들이 모여들게 했고, 이는 오늘날 팔달문 주변에 시장 거리가 형성된 뿌리가 되었다. 현재 시장은 팔달문 근처에 모여 있다.


팔달문이 보이는 남문시장


"왕이 만든 시장"이라는 팔달문 주변의 시장은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국왕(정조)이 직접 기획하여 만든 시장이다. 정조는 수원 화성을 축조하면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 도시를 꿈꿨다. 이를 위해 전국의 유능한 상인들을 수원으로 불러들였고, 채제공 등을 통해 상인들에게 밑천을 빌려주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아주었다.


현재 '남문시장'이라 통칭되는 9개의 시장은 팔달문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팔달문시장은 패션 거리와 가구 거리가 유명하며 이곳은 수원 통닭거리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영동시장은 경기 남부 최대의 한복 및 포목 시장으로 혼수와 의류가 주를 이룬다.


수원 남문시장 전경


지동시장은 순대타운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먹거리 중심의 시장이며 못골종합시장은 반찬, 떡, 생선 등 식재료가 풍부해 늘 활기가 넘치는 전형적인 골목 시장이다. 미나리광시장은 고추, 마늘, 기름 등 전통적인 양념류와 야채가 유명하다.


수원을 방문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포인트는 지동시장의 순대볶음과 팔달문시장 인근의 수원 왕갈비통닭을 맛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 내부에는 상인들의 이야기와 정조의 역사를 담은 유상박물관이 있어 쇼핑과 역사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정조가 술을 먹고 있는 동상이 시장 안에 있는데 찾지 못해서 사진을 찍지 못했다.


200년 전 정조가 채제공과 함께 설계했던 '상업의 중심지'는 오늘날에도 수천 개의 점포가 활기를 띠는 대한민국 대표 전통시장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시장 전경


정조는 전국의 부호와 상인들을 수원으로 불러 모으기 위해 파격적인 혜택을 주었는데, 이때 핵심 정책이 바로 금난전권을 없애주는 것이었다.


당시 한양의 시전 상인들은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금난전권(禁難專權)을 가지고 있었다. 금난전권이란 도성 안과 성저십리 일대에서 아무나 물건을 팔 수 없고 오직 시전 상인에게만 특정 상품에 대한 전매 특권을 유지하도록 나라가 보호해 주는 상업적 특권을 의미한다.


시전은 한양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육의전(六矣廛)과 기타 돈이 될만한 사업을 독점하고 있었다. 육의전은 종이전(종이), 포전(비단), 면포전(무명천), 저포전(삼베), 어물전(건어물), 주전(술) 등 주요 품목을 파는 상점이다.


시전상인은 나라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납품하거나 공물로 받은 물자를 판매하는 등, 정부의 물류, 공급망에 관여하며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이들은 고관대작들과 손잡고 그들에게 상납하며 자신의 배를 불리는데 급급했다. 특히 독점권은 종종 담합하여 생필품 가격을 올리는 등 민생에 부담을 주었으며 사재기를 통해 물건의 값이 몇 배씩 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물건을 살 수밖에 없는 부당한 사례들이 늘어갔다.


한양 운종가(역사박물관)


시전 상인들에게는 난전 상인의 물건을 빼앗거나 관리에게 고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들은 단순히 물건을 빼앗거나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작당하여 몰매를 치는 거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금난전권을 함부로 휘둘렀기에 시장에서는 상인들의 억울한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폐해는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을 얻기 위해 권세가나 각 관청과 결탁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시전의 수가 크게 증가해 1630년대 30여 개에 불과하던 시전이 18세기말에는 총 120개로 늘어났다.


격쟁(擊錚)

애민군주로 백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던 정조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을 통해 이미 이러한 폐단을 알고 있었다. 상언은 글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고 격쟁은 억울함을 소리로 알리는 것이다.


왕이 지나갈 때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크게 쳐서 주의를 끈 뒤, 자신의 억울함을 말로 설명했다. 특히 격쟁은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가장 선호했던 민원 해결 방식이었다.


그러나 격쟁은 국왕을 소란스럽게 한 죄목으로 붙잡혀 가 먼저 형장(刑杖)을 당한 후에 사정을 호소할 수 있었다. 이런 고통에도 불구하고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과감하게 격쟁에 나섰다.


격쟁은 그 형태에 따라 대궐문 안에 난입하는 궐내 격쟁(闕內擊錚), 국왕의 궐 밖 행차 때에 시위대(侍衛隊)를 뚫고 들어가는 위내 격쟁(衛內擊錚), 시위대 너머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위외 격쟁(衛外擊錚) 등이 있었다.


왕의 행차 시 주변의 호위무사


징 소리가 들리면 정조는 행차를 멈추고 직접 백성을 불러 사연을 물었다. 사실 정조가 신해통공을 실시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이 격쟁을 통해서 얻은 민심 때문이었다.


정조 10년부터 12년까지, 대장장이 이춘세, 야장 정대훈, 모자 장수 강덕일 등이 몇 번이나 징을 쳤다. 그들은 하나같이 "시전 상인들이 우리를 불법(난전)으로 몰아 장사를 방해한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원래 격쟁은 3일 안에 해결해 주는 것이 원칙이었다.


정조는 격쟁이 접수되면 수천 건의 민원을 직접 해결해 주었다. 그렇기에 정조는 시전 상인들의 횡포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신하들은 백성들이 왕의 행차를 방해하고 위험하게 접근한다며 금지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정조의 대답은 단호했다.


"어린 자식이 부모에게 하소연하듯 달려오는 것인데, 그렇게 만든 자(탐관오리나 횡포를 부리는 자)가 잘못이지 저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왕의 어가


정조에게 백성은 오직 보살펴야 할 자식이었다. 정조 재위 25년(1776∼1800) 동안 <일성록(日省錄)>에 수록된 상언과 격쟁은 무려 4,304건이었으며 1년 평균 172건에 이르렀다. 정조는 한 번 행차 시 50여 건의 민원을 받아 처리했다고 한다. 때로는 격쟁이 너무 많아 왕이 행차를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백성들이 징을 치며 쏟아낸 눈물 섞인 목소리를 정조가 직접 듣고 응답한 쌍방향 소통의 결과물은 정조를 애민군주로 만들었다.


신해통공(辛亥通共)과 채제공

정조는 수원을 금난전권이 없는 자유 상업 도시로 만들기를 원했다. 팔달시장에 모인 상인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유롭게 물건을 사고팔 수 있었기에 상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정조는 이를 기회로 1791년 과감하게 신해통공을 전국적으로 실시한다고 선포했다.


신해통공은 신해년(辛亥年, 1791년)에 반포한 통공(通共) 정책을 말한다. 통공은 금지되던 시전 상업 활동을 풀어 상인들에게 개방한다는 뜻이다.


신해통공의 핵심 내용은 먼저 시전 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금난전권폐지시키며 육의전을 제외하고 난전의 상업 활동을 비교적 자유롭게 허용했다. 이와 같은 정책은 시전의 독점적 유통이 물가 상승과 중소상인, 소생산자 피해를 유발했다는 배경에서 시행된 조치였다.


정조의 명을 받아 신해통공을 추진한 중심인물은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년)이었다. 정조는 채제공의 건의를 반영해 입법한 내용을 한문과 한글로 써서 큰 길거리와 네 성문에 내걸었다.


채제공 초상화


세종에게 황희 정승이 있었다면 정조에게는 채제공(蔡濟恭)이 있었다. 정조와 채제공은 개혁이라는 험난한 길을 함께 걸은 동반자였다.


채제공은 영조 때부터 정조를 지켜온 인물이었다. 정조는 채제공에게 "나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라며 무한한 신뢰를 보냈고, 채제공은 정조의 개혁안을 현실로 만드는 '행동대장' 역할을 자처했다.


처음 신해통공은 기득권인 노론 세력과 시전 상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이때 채제공은 악역을 자처하며 말했다.


"모든 비난은 내가 받을 테니, 전하께서는 정책을 밀고 나가소서."


신해통공에 반대하는 시전 상인들은 채제공의 집 앞까지 몰려와 시위를 하고, 수원에서 관리 생활을 할 때는 암살 위협까지 느낄 정도로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고 정조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켰다.


다행히 신해통공 직후 도성의 물가가 안정되기 시작하며 그 효과가 나타나자 통공(通共) 정책에 반대했던 세력들도 더는 저항하지 않았다. 이후 중소상인의 활성화로 상품유통이 활발해져 조선후기 수공업과 상업 발전의 기폭제가 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정조는 수시로 비밀 편지를 채제공에게 보내 깊은 교감을 나누었다. 채제공의 부인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자, 정조는 귀한 인삼과 전복을 보내며 "빨리 낫기를 바란다"는 안부를 전하기도 했다.


채제공(채제공의 왼쪽 눈은 원래 사시였다)


수원화성 설계는 정약용이 했으나 건설의 총책임자는 채제공이었다. 채제공은 당시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누볐다. 정조는 채제공이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 직접 격려문을 써주기도 했다. 팔달문 주변에 시장을 세우고 상인들을 불러 모은 실무 주역도 채제공이 도맡아 했다.


채제공은 개혁 세력인 남인의 영수로 정약용 등 실학인들의 후견인이었고 정조의 스승이면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낸 정조의 정치 동료였다.


금등지사(金縢之詞)의 진실

금등지사란 ‘쇠줄로 단단히 봉(封)하여 비서(祕書)를 넣어두는 상자’라는 뜻으로, 억울하거나 비밀스러운 일을 글로 남겨 후세에 그 진실을 전하고자 할 때 사용되었다. 그 유래는 중국 주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경(書經)> '금등(金縢)'편에 주공(周公)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나라 무왕이 병석에 눕자, 동생인 주공(周公)은 "형을 대신해 죽겠으니 조상님들이 형님을 살려달라"라는 기도문을 써서 금등(金縢)에 넣어두었다. 후에 무왕이 죽고 무왕의 아들 성왕이 즉위했는데, 나이가 어려 주공이 섭정을 했다. 그런데 주공은 무왕을 독살했다는 모함을 받고 낙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성왕이 주공의 금등을 발견하여 주공은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금등지사(金縢之詞)'라고 한다.


영조는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후 뼈저린 후회를 하며, 당시 사도세자의 무고함과 자신의 비통한 심경을 담은 글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 글을 함부로 공개할 수 없었다. 이를 공개한다면 사도세자의 반역음모를 고발하며 그를 죽음으로 내몬 기득권 세력과의 정면충돌을 각오해야 했다. 즉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라는 것은 '사도세자를 죽인 사람들이 잘못을 범했다'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영조는 금등을 곧바로 공개하는 대신, 이를 후세에 남기는 쪽을 선택했다. 영조는 창경궁 휘령전에서 사관에게 양해를 구하고 도승지 채제공과 은밀한 독대를 가졌다. 영조는 금등을 적은 어서(御書, 친필문서)를 채제공에게 건네주면서, 그것을 사도세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 수은묘(垂恩廟) 내부에 은밀히 보관하라고 일렀다.


영조가 죽고 난 뒤에도 채제공은 이 비밀을 가슴에 묻고 노론의 거센 압박으로부터 정조를 지켰다. 그러나 채제공은 알고 있었다. 정조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 즉 복권이었다. 결국 채제공은 정조에게 금등의 존재를 알렸다.


정조 17년(1793년) 5월 28일, 이제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채제공은 상소를 올렸다. 이 날은 채제공이 영의정에 오른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당시 채제공은 수원화성 축조를 위해 수원에 내려가 있었다. 그가 올린 상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재조사하고 책임자를 처단해야 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일찍이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는 역적"임을 공식 입장화했고 정조도 마음으로만 복수의 칼날을 갈았을 뿐 노론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다. 이 상소문은 잔잔했던 조정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정조가 노론 벽파를 배신하는 것은 할아버지를 배신하는 일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벽파를 집권 세력에서 몰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행동으로 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 정권의 정통성을 부인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즉위 후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는 상소를 내치고, 상소를 올린 사람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기까지 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이 정조의 발목을 잡는 딜레마였다.


채제공의 상소를 받은 정조는 상소를 돌려주며 무마하려고 했지만, 채제공에게 벌을 내리라는 노론 벽파의 여론은 거셌다. 당시 채제공은 74세의 고령이었다. 채제공과 함께 좌의정에 임명된 노론의 김종수가 격렬하게 반발하며 사직을 청했다. 정조는 일단 채제공과 김종수를 파직시킨 후 노론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노론은 물러서지 않았다. 채제공을 파직한 것으로 끝낼 수 없으니 더 강도 높은 벌을 주어야 한다고 사방에서 상소를 올렸다. 이에 정조는 같은 해 8월 8일 조정 백관을 모아놓고 채제공이 왜 이런 상소를 올렸는지에 대한 해명을 했다.


채제공이 선왕 영조로부터 금등을 받아 몰래 보관해 왔고 밀지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말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전 영상이 도승지로 있을 때 선조(先朝)께서 휘령전(徽寧殿)에 나와 사관(史官)을 물리친 다음 도승지만을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어서(御書) 한 통을 주면서 신위(神位)의 아래에 있는 요[褥] 자리 속에 간수하도록 하였었다. 전 영상의 상소 가운데 아래의 한 구절은 바로 금등(金縢) 가운데의 말인 것이다.(중략)


금등 속의 말은 하나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하나는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니 이 어떠한 미덕인가. 단지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장차 묻힌 채 드러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 지금 전 영상의 상소로 인하여 그 단서가 발로 되었고 그대로 잠자코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중략)


하고는, 금등 가운데의 두 구절을 베껴낸 쪽지를 여러 대신들에게 보여주게 하고는【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안금장(安金藏)과 전천추(田千秋)였던가? 나는 귀래망사대(歸來望思臺)를 마음에 품고 있다.】<정조실록 38권, 정조 17년 1793년 8월 8일>


정조는 신하들의 의심을 풀기 위해 금등 내용의 일부를 보여주였다. 그런데 그 글씨는 영조의 글씨체가 아닌 정조가 베껴 쓴 글씨였다. 정조가 펴 보인 종이에는 모두 20자가 적혀 있었다.


血衫血衫(혈삼혈삼)

孰是金藏千秋(숙시김장천추)

桐兮桐兮(동혜동혜)

余悔望思之臺(여회망사지대)


피 묻은 소매, 피 묻은 소매여!

누가 안금장(安金藏)과 전천추(田千秋)인가.

오동나무여 오동나무여!

내가 망사지대(望思之臺)를 후회하노라.


연속극 <옷소매 붉은 끝동>에 나오는 금등지사


금등지사에 적힌 안금장(安金藏, 당나라)과 전춘추(한나라)는 충성스러운 간언으로 이름 높은 신하였다. 그리고 또 언급된 한나라 무제는 강충(江充)의 참소로 여태자(戾太子)를 죽였다. 나중에 무고인 것을 알게 된 무제가 강충의 일족을 멸하고, 태자 죽인 일을 후회하여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臺)를 세웠다. 즉 금등지사에 적힌 영조의 글은 사도세자 죽인 것을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도세자가 간신의 모함으로 오동나무로 짠 뒤주에 갇혀 원통하게 죽었는데 이를 위해 바른말로 간언 할 안금장과 전춘추 같은 신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한 무제가 세웠다는 귀래망사지대를 생각하면서 죽은 아들을 그리워하고 그 시간을 깊이 후회한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대신들은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사도세자가 모함으로 원통하게 죽었다는 내용은 자기들을 겨냥한 화살이었다. 글씨가 원본이 아닌 정조가 베꼈다는 데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지만 대놓고 왕에게 이 금등지사가 사실이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다만 내용을 본 대신들은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내 그 아무해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차마 말 못 할 것들이기에 감히 말하지도 않지마는 금등(金縢) 한 가지 일만은 경들에게 말 한마디 해두고 싶었는데 너무 슬프고 원통해서 아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선왕께서 언젠가 휘령전(徽寧殿)에 납시어 사관(史官)도 물리치고 어서(御書)로 된 문자 하나를 신위(神位) 밑 요 속에다 넣어두셨는데 병신년에 문녀(文女)의 죄악상을 세상에 알릴 때 비로소 꺼내보았었다. 경들도 한번 보라."


하고는, 금등 등본(謄本) 두 구절을 꺼내보였는데, 영조가 경모궁(景慕宮)의 죽음을 뒤늦게 슬퍼하여 쓴 어제였었다. 이에 왕도 울었고 제신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 <조선왕조실록, 정조 대왕 행장(行狀) 중에서>


이 금등지사에 관한 내용은 이인화 소설 <영원한 제국>과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옷소매 붉은 끝동> 등에서 다루어졌다. 그러나 이 금등이 사실인지는 확인된 바가 없다. 정조실록에도 정조가 베껴 쓴 내용만 나올 뿐이다.


<영원한 제국> 책


이 금등지사로 인해 노론들이 잔뜩 위축되어 있었으나 정조는 금등지사를 이용해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않았다. 다만 "지나간 일을 다시 거론할 생각이 없으니 대신 국정에 협조하라"라며 반대파를 설득했다. 이 일을 계기로 정조는 민생 안정책인 대동법과 균역법을 실현했고 화성축조를 순조롭게 했으며 신해통공을 펼쳤다. 파직되었던 채제공도 곧 영의정으로 복귀했다.


노론은 처음부터 사도세자를 죄인으로 몰아 정조의 왕위 계승권을 흔들었다. 그러나 정조가 공개한 금등지사에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나의 실수였으며, 그는 죄가 없다"라는 영조의 뜻이 담겨 있었다. 이는 노론의 입지를 뿌리째 흔드는 것이었다.


정조는 금등지사를 근거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담했던 노론 세력을 '선왕(영조)의 뜻을 어긴 자'로 규정했다. 이를 통해 노론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을 제압하는 결정적인 카드로 활용한 것이다. 금등지사는 노론을 압박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으니 정조의 정치적 노련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결국 금등은 정조와 채제공만이 알 수 있는 비밀로 남았다. 진짜 금등지사가 있었다면 굳이 정조가 베껴서 사람들에게 보일리가 없으니 솔직히 의심스럽다. 그러나 진위야 어찌 되었든 노론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이어진 화성건설과 신해통공 등의 굵직한 일을 일사천리로 해 나갈 수 있었으니 정조로서는 성공한 패였다고 생각한다.


이후 정조는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채제공을 독대하며 국정을 논의했다. 채제공이 잠시 유배를 가거나 물러나 있을 때도 정조는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조언을 구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채제공은 무려 895번이나 언급되었다. 그것 만으로도 그의 중요성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영의정 자리는 만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다. 조정에 진출한 선비들은 정1품 영의정을 대변하는 무소뿔로 만든 서대(허리에 두르는 띠)를 차 보는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채제공은 1790-1793년까지 3년 동안 영의정과 우의정 없는 좌의정으로 거의 삼정승을 독상(獨相)하기도 했다.


채제공은 정조 24년 재임기간 중 23년을 함께 했고 정조보다 1년 먼저 별세했다. 채제공이 죽자 정조는 곤룡포가 젖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정조가 친히 지어 보낸 글은 채제공 묘소 뇌문비(誄文碑)에 적혀있다. 뇌문(誄文)은 죽은 이의 명복을 천지신명께 비는 글로 공적을 기리는 내용과 애도의 마음이 담겨있다.


1799년 1월 18일에 채제공이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사림장(士林葬)으로 거행되었고, 묘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채제공은 죽은 이후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으로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正祖 御製 蔡濟恭 誄文碑)


소나무처럼 높고 높아 우뚝 솟았고, 산처럼 깎아지른 듯 험준하여라

그 기는 엷은 구름같이 넓고, 도량은 바다를 삼킬 듯 크다

경 채제공을 알고 경을 씀에 내 독실하게 믿었노라

조정에 채제공이 없다면 국가를 어찌 보존하랴.

또한 어버이에게 효도한다는 소문이 자자하니 경 같은 이는 매우 드물다


채제공 사당과 뇌문비(국가유산포털)


채제공 묘소(국가유산포털)


판중추부사 채제공의 졸기(卒記)


판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이 죽었다. 상이 친히 제문을 지어 사제(賜祭)하고 문숙(文肅)이란 시호를 내렸다.

(중략) 전교하기를,


"저녁부터 새벽까지 백성을 걱정하는 한 생각뿐이었는데, 이제 채제공이 별세했다는 비보를 들으니, 진실로 그 사람이 어찌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가 이 대신에 대해서는 실로 남은 알 수 없고 혼자만이 아는 깊은 계합이 있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품부 받은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氣力)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 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중략)


내가 즉위한 이후로 참소가 여기저기서 빗발쳤으나 뛰어난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극히 위험한 가운데서 그를 발탁하여 재상 지위에 올려놓았었다. 이어 내각(內閣)에서 기사(耆社)로 들어갔고, 나이가 80이 되어서는 구장(鳩杖)을 하사하려고 했었다. 그 지위가 높고 직임이 나와 친근하였으며, 권우가 두텁고 은총이 성만하여 한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입을 못 열고 기(氣)가 빠지게 하였으니, 저렇듯 신임을 독점했다고 이를 만한 사람으로서 옛날에도 들어보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50여 년 동안 조정에 벼슬하면서 굳게 간직한 지절은 더욱 탄복되는 바인데, 이제는 다 그만이구나.


죽은 판부사 채제공 집의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의당 관례에 의거해서 거행하되, 승지가 치조(致吊)하는 일은 홍 영부사(洪領府事)의 전례에 의거해서 하고, 내각의 속관을 보내어 상제(喪制)를 돌봐주는 일과 호상(護喪)하는 등의 절차에 대해서는 각신(閣臣)과 대신(大臣)의 전례에 의거해서 할 것이며, 성복일(成服日)의 치제(致祭)는 승지가 스스로 의당 거행할 것이나, 내각의 치제에 대해서는 또한 김 봉조하(金奉朝賀)의 전례에 의거하여 제문(祭文)을 지어 내리기를 기다려서 각신을 보내 거행하도록 하고, 녹봉은 3년 동안 그대로 보내주도록 하라. 그리고 장사 지내기 전에 시호를 의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51권, 정조 23년 1799년 1월 18일>


번암 채제공은 저서로 <번암집(樊巖集)> 59권을 남겼다. <번암집>에는 임금이 신하에게 내린 문서를 뜻하는 사륜(絲綸), 왕이 쓴 편지인 어찰(御札) 등이 있고 대부분은 시와 편지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의 문장은 소(疏-상소)와 차(箚-간략한 글, 비평)에 능했고, 시풍은 위로는 이민구(李敏求), 허목(許穆), 아래로는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졌다


채제공이 쓴 번암집 & 발간된 책


채제공이 죽자 정조는 규장각에 <번암집> 편찬을 맡겼다. 문집 첫머리에 "호걸스러운 기상으로 써 내려간 필력 굳세니 그대의 초상화를 대하고 있는 듯하네"로 시작되는 어제시(御製詩)도 써주었다.


1799년부터 그의 아들 채홍원과 문인 정약용, 이가환, 김도행, 이정운 등이 교정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1년 뒤인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천주교인에 대한 탄압으로 채제공의 문인들이 다수 죽거나 유배 가면서 번암집의 간행이 불가능해졌다.


이후 1823년 홍시제의 상소를 계기로 채제공의 관직이 회복된 후 1824년에 홍시제와 유태화가 <번암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하여 안동 봉정사에 보관했다. <번암집>은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자료*

<번암집(樊巖集)>

<정조실록(正祖實錄)>

<영조실록>

<순조실록>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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