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행궁

정조의 8일간 원행 일지

by 김인숙


정조의 꿈 담은 화성행궁(華城行宮)

화성행궁은 정조가 수원화성을 지으면서 함께 만든 임시 궁궐이다. 이곳은 정조가 융릉을 참배하거나 지방 행차를 할 때 머물던 곳으로, 조선의 행궁 가운데 567칸으로 지어져 가장 규모가 크다.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다.



표지3 행궁 입구.jpg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


내가 처음 수원을 찾았을 때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수원화성박물관이었고 그다음으로 화성행궁을 찾았다. 박물관에서 화성행궁은 걸어서 5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륭원으로 옮긴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수원 행차를 했으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다.


0대장금 3.jpg 입구를 들어서면 대장금이 반긴다(대장금의 촬영지였다).


그중 가장 큰 행사는 1795년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치러진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을 기념한 진찬연이었다.


1795년 정조 19년 윤 2월 8일, 정조는 화성행궁에서 행사를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신하들에게 일렀다.


“9일에 자궁(慈宮)을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서 참배드린 다음 화성(華城)의 행궁(行宮)에 가서 자궁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이어 양로연(養老宴)을 행할 것이다. 상이 성묘(聖廟)에 가서 선성(先聖)을 참배한 다음 돌아오는 길에 행궁에 들러 과거 시험을 통해 인재를 뽑고, 다음날 장대(將臺)에 올라 직접 성조(城操)와 야조(夜操)를 본 다음 장사(將士)를 먹일 것이며, 16일에 환궁할 예정이다. 정리소(整理所)로 하여금 잘 알아두도록 하라.” <정조실록 42권, 정조 19년 윤 2월 1일 기사>


1795년 윤 2월 9일, 이른 아침부터 창덕궁은 행차 준비에 바빴다. 정조를 포함해 길을 떠나는 사람은 총 3,069명의 인원과 408 필의 말이 끄는 거대한 행렬이었다.


0배다리 건설.PNG <화성능행도> 한강 배다리


선발대는 창덕궁을 출발해 숭례문을 지나 노량진으로 향했다. 한강에 설치된 임시 부교인 배다리를 이용해 한강을 건너야 했다. 그리고 안양과 의왕을 지나 총 47.6km의 여정을 이틀에 걸쳐 걸어서 화성행궁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행차 노선을 보면 서울에서 수원까지 가는 길이 현재 1번 국도와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0 노선도.jpg 창덕궁에서 화성행궁까지 노선도(수원화성박물관)


정조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동안 이 행사를 위해 얼마나 벼르고 별러 준비하고 힘썼는지 그 노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 혜경궁 홍 씨와 사도세자는 동갑이었다. 정조는 어머니의 회갑연을 치르면서 아버지의 회갑연도 함께 치른다는 생각으로 힘들게 원행을 준비했다.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는 창경궁에 남았고 정순왕후를 모시기 위해 왕비도 함께 남았다.


0능행차도2PNG.PNG 혜경궁 홍 씨가 탄 가마(수원화성박물관)


선발대가 한강에 다다랐을 때 후발대는 그제야 창덕궁을 나섰다. 왕의 행차를 보기 위해 백성들은 덩달아 마음이 바빴다. 먼발치에서나마 왕의 용안을 우러러볼 수 있다는 것은 망극하고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관광(觀國)에 나선 백성들

사전에서 관광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되어 있다.


1. 관광(觀光). 명사. 나라의 성덕(盛德)과 광휘(光輝)를 봄.

2.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경, 풍습, 문물 따위를 구경함.

3. 과거를 보러 감. 또는 그런 길이나 과정.


내가 알고 있는 관광은 2번이었고 1번은 그런대로 이해가 갔다. 그런데 3번은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그래서 자료를 더 찾아보았다.


관광(觀光)의 원전은 주역의 관괘(觀卦) 효사(爻辭)에 나오는 ‘관국지광 이용빈우왕(觀國之光 利用賓于王)’으로 ‘나라의 빛을 살펴 그로써 왕을 섬기고 이롭게 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빛(光)’이란 태양과 같은 존재인 임금을 말하며, 관광은 곧 ‘임금을 보러 간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0구경꾼.PNG 관광에 나선 백성들(수원화성박물관)


중국에서는 과거를 보러 떠날 때 “관광하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집을 나섰다고 한다. 응시생들은 각각 경치가 좋은 화양, 선유, 쌍곡 등을 거쳐 북경에서 시험을 치른 후 낙방하면 다시 절경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좋은 경치를 본 것만으로 만족하며 다시 시험 준비에 임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이 “관광하고 오겠다”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사실 대궐을 출입하는 관리가 아닌 이상 평생 임금의 얼굴을 볼 기회는 전혀 없다. 그렇기에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이 임금의 얼굴을 보고 오겠다는 것은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임금을 만나고 오겠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관광이라는 단어에 관심이 간 이유는 따로 있다. “백성들이 정조를 보기 위해 너도나도 관광에 나섰다”라는 문장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관광은 적어도 사람의 얼굴을 보러 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정확히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


당시 정조의 행차는 장관이었다. 각 지방에서 상언과 격쟁을 통해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한 백성들이 정조가 지나가는 길목에 포진했다. 어느새 평민의 상언(上言)과 격쟁은 공식적인 접수처가 생겼다. 어가가 창덕궁 돈화문을 나와 운종가로 들어서는 파자교(把子橋) 앞과 경희궁을 향해 올라가는 탑골 부근 철물교(鐵物橋) 앞, 그다음 육조거리와 마주치는 혜정교(惠政橋) 앞이었다.


0능행도16PNG.PNG 화려한 행렬(수원화성박물관)


백성들은 화려한 왕의 행차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백성들이 왕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행운이었다.


조선 왕들이 백성들의 살림살이를 살피기 위해 잠행을 나가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중 정조는 다른 왕들에 비해 궐을 자주 나서는 편이었다.


장엄한 왕의 행렬이 한강 배다리를 건너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백성들은 목을 길게 빼고 조금이라도 자세히 보기 위해 관광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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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능행차도3.PNG 정조의 가마와 말(수원화성박물관)


정조는 가마에 타지 않고 말을 이용했다. 말 위에 사람이 없는 것은 왕실의 법에 따라 왕의 모습, 특히 얼굴은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조의 효심은 대단했다. 어머니 행차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도착하여 쉬어갈 방이 따뜻한가 살피고, 음식과 간식도 미리 맛보는 등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썼다.


일행은 시흥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길을 떠났다. 이 모든 내용은 행사를 세세하게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의 기록에 자세히 나와 있다.


행렬 중에는 군사들이 가장 많았는데 그중 앞뒤로 두 마리의 말이 호위하고 있는 곳은 혜경궁 홍 씨의 가마다. 그리고 그 뒤에 군사들이 더 많이 둘러싼 가운데 국왕이 탄 가마가 보인다.


마침내 일행은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에 도착했다. 신풍루는 처음에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혜경궁의 회갑연을 열면서 이름을 신풍루로 바꿨다.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루 좌우에는 행랑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영을 배치해서 경호 체제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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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행궁 알 광장.jpg 신풍루 정문과 화성행궁 앞 광장


도착한 다음 날에는 혜경궁의 회갑연인 진찬례가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이 연회에는 혜경궁의 친인척을 비롯해 영의정 홍낙성, 우의정 채제공 등 384명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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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당 정전 설명.jpg 봉수당과 설명 글


봉수당(奉壽堂)은 화성 행궁의 정전(正殿) 건물이자 화성 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불렀다.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했다. 봉수당 앞에서 악공들이 연주하고 무희들이 화려한 춤을 추는 모습 역시 정리의궤에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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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봉수당 정조.jpg 혜경궁 홍 씨와 정조


정조는 어머니의 잔치에 수원 화성 근처에 사는 70세 이상의 노인과 회갑을 맞은 노인을 초청해 회갑연을 즐기도록 배려했다.


양로잔치.PNG
선유락 기생 춤.PNG
경로잔치와 무희 춤(수원화성박물관)


또한 화성행궁 우화관(于華館)과 낙남헌(洛南軒)에서 문과와 무과 별시를 시행하여 유생 최지성(崔之聖) 외 5인과 무사 김관(金寬) 등 5인을 선발하고 지역 백성들에게 쌀을 하사했다.


우화관.PNG 우화관


0낙남헌.jpg 낙남헌


화령전(華寧殿)

화성행궁에서 꼭 둘러보아야 할 장소는 바로 정조의 어진(초상화)을 모신 화령전이다. 임금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을 ‘영전(影殿)’이라 부르는데 현재 남은 영전은 경기전(전주)의 태조 어진과 정조의 어진이 있는 화령전 두 곳뿐이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장소로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추모하는 곳이다.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화성에서 ‘화’ 자와 <시경>의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리라(歸寧父母)’라는 구절에서 ‘령’ 자를 따서 이름 붙였다.


화령전 전경22.jpg 화령전 전경


0정조어진3.jpg 정조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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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한각 내부.jpg
정조의 어진은 화령전 운한각에 모셔져 있다.


화령전은 정조 승하 3개월 후 정순왕후의 명에 따라 지어졌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가까이서 지켜보려고 자신의 초상화를 현륭원에 두었다. 그런데 정조의 묘를 현륭원 옆에 조성하게 되면서 정조 어진을 다른 장소로 옮겨야 했다. 이에 정순왕후가 별도의 전각을 지어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도록 하면서 1801년 4월 29일 화령전이 세워졌다.


정조가 승하하자 순조는 15살 때 능행차에 나선 후 아버지의 어진이 모셔져 있는 화령전에서 잔과 절을 올리며 작헌례(酌獻禮)를 치렀다. 순조는 왕세자를 데리고 화령전을 찾기도 했다. 그 뒤로 헌종, 철종, 고종도 화령전에 들렀다.


임금이 수원에 방문하면 화성행궁에서 이틀 이상 묵으면서 지역에 여러 혜택이 내려졌기에 백성들은 이를 반겼다.


0정조 머물던 곳.jpg 정조가 머물며 집무를 보던 장소


이 회갑 행사를 위해 정조는 10만 3천여 냥의 재원을 조성했다. 자금의 일부는 제주도에 진휼곡(賑恤穀)으로 보내고 남는 돈은 화성 둔전을 매입했다. 정조의 정치적 거점인 수원을 성장시켜 나가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 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한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9년은 너무 길었다. 정조는 2년 후에 죽음을 맞게 된다.


노래당(老來堂)

노래당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은 건물이다. 정조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화성행궁 노래당에서 지내려고 5량 7칸의 규모로 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이 건물은 끝내 주인을 맞지 못했다. 당시 편액(扁額)은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나 전하지 않는다.


전각8.jpg 노래당 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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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3.jpg
전각2.jpg
전각5.jpg
유쳐택.jpg
그 외 전각들



화성행궁의 수난

화성행궁도 일제강점기를 피해 갈 수 없었다.


0화성행궁1.jpg 화성행궁 전경


1905년 화성행궁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우화관’에 수원공립소학교(신풍초등학교)가 들어섰다. 1907년에는 집사청과 북군영이 철거되고 수원경찰서 건물이 지어졌다. 이후 화령전이 자혜의원으로 사용되었고 낙남헌은 수원군청이 되었다.


1923년에는 자혜의원이 병원 건물을 확장하면서 낙남헌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헐렸다. 자혜의원은 경기도립수원의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어느새 화성행궁의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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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들어선 건물과 화성행궁 조감도(자료-수원특례시)


해방 후에도 경기도립병원(현 경기도의료원 수원병원)은 계속해서 영업을 이어나갔고 1989년에는 현대식 건물로 신축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수원 시민들은 화성행궁 복원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 수원문화원장과 뜻있는 인사 42명이 ‘수원화성행궁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경기도지사를 만나 화성행궁 복원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경기도립병원 이전’을 건의했다.


수원시는 경기도립병원을 이전, 철거하고 화성행궁 1단계 복원사업을 시작했다. 화성행궁 복원 역시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 등을 토대로 고증해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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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표.jpg
행궁 이정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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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이정표와 느티나무


마침내 567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화성행궁은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지난 2003년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행궁 고양이.jpg
남군영-도장찍기.jpg
화성행궁 광장.jpg
마루 밑 고양이 아지트 & 스탬프 체험 시 도장 찍는 장소


화성행궁의 복원 공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내가 갔을 때도 공사 중인 곳이 있어 출입금지 구역이 있었다. 화성행궁은 새로 지은 건물이 많아서 고풍스러운 건축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세월이 많이 흘러야 건물의 고풍스러움이 살아날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수원에서는 해마다 10월에 정조대왕 능행차를 재현하고 있다. 창덕궁에서 출발하여 수원화성을 거쳐 화성 융릉까지 행차를 이어가는데 수원에 도착해서는 노송지대∼종합운동장∼장안문∼화성행궁까지 시민들과 함께 걸으면서 행사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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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행차도13.PNG 능행차 재현 장면, 배다리도 만들어 건넌다(자료-KBS)


이 행차는 정조가 을묘년(1795)에 진행한 8일간의 대규모 행차를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반하여 완벽하게 재현하는 국내 최대 왕실 퍼레이드다. 올 10월에 기회가 된다면 직접 참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자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디지털장서각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수원특별시

화성행궁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