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화가 김홍도

그림으로 조선을 기록한 화가

by 김인숙

천재 화가 김홍도


김홍도(金弘道)의 본관은 김해,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단구(丹邱), 서호(西湖) 등을 사용했다. 1745년(영조 21년)에 경기도 안산에서 아버지 김석무(金錫武)와 어머니 인동 장씨(仁同 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해 김씨 삼현파 17세손이며, 탁영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다.


김홍도는 어명과 고관의 명, 또는 양반의 청탁을 받아 그림을 그렸으며 일반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김홍도 자화상.PNG 김홍도 <자화상>


김홍도는 그림뿐만 아니라 시와 글씨도 잘 썼다. 그의 아들 김양기가 <단원유묵>이라는 김홍도의 시를 묶은 문집을 냈다.


아들 김양기 그림-투전도PNG.PNG 김홍도 아들 김양기 그림 <투전도>


김홍도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다만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강세황이 지은 <단원기(檀園記)>에 김홍도가 젖니를 갈 나이 때부터 강세황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화법(畵法)을 배웠다고 쓰였다. 보통 7살 전후에 젖니를 갈기에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강세황은 원래 문인 출신이다. 그러나 글씨와 서화에 능해 정선의 화풍을 이었고 다른 화가들을 후원하거나 그림을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 화가들은 강세황에게 평을 듣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강세황은 서양식 화법을 들여와 한국화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를 유행시켰다.


강세황의 집이 안산에 있었기에 김홍도가 어린 시절 안산에서 살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김홍도의 호가 단원이라 안산에 단원구가 생겨난 배경이 되었다.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김홍도는 특히 백 가지, 천 가지 일과 세속의 여러 가지 모습을 옮겨 그리기를 잘했는데 그가 그림을 그리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손뼉을 치며 기이하다고 외쳤다.” <단원기>-강세황


강세황은 김홍도를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이라고 극찬하고 화제(畵題)를 써주기도 했다.


1 강세황 책PNG.PNG 강세황 책 - 교보문고


김홍도가 화원으로서 처음 공식적인 기록을 남긴 것은 그의 나이 21세(1764년) 때 그린 병풍 <경현당수작도(景賢堂受爵圖> 제작에 참여한 일이다.


1764년(영조 40년)은 영조 즉위 40주년과 망팔(望八)인 71세가 되는 해였다. 망팔(望八)이란 여든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일흔한 살을 이르는 말이다. 왕세손(정조)이 다섯 번이나 잔치 치르기를 간곡히 청하여 1795년 10월 11일 경희궁(慶喜宮) 경현당(景賢堂)에서 행사를 치렀다.


당시 <경현당수작기> 2폭은 이날의 행사를 그린 병풍이었는데 애석하게도 그림은 없고 두 폭의 글씨 부분만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경현당수작도 일부PNG.PNG 경현당수작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아무튼 이렇게 중요한 행사의 의궤병풍을 21살의 김홍도가 그렸다는 것은 그전부터 그의 그림 솜씨를 인정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다음 김홍도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29세인 1773년, 영조의 어진과 어린 왕세자(정조)의 초상을 그린 것이다.


영조 어진.PNG 영조 어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왕조의 어진은 꾸준히 제작되었으나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조선 초기의 어진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고종 때 숙종 대부터 대대적으로 어진 복구를 실시하여 총 46본의 어진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다시 소실되었고 현재 남아 있는 어진은 <태조어진>, <영조 어진>과 <연잉군(영조의 세제 시절) 초상>, <철종 어진>, <고종 어진>, <순조 어진>이 전부다. 다른 것들은 모두 복원한 것으로, 물론 고증을 거치기는 하였으나 진짜 얼굴인지 확신할 수 없다.


김홍도는 어진을 주관하는 주관 화사(主管畵師)는 아니었고 동참 화사(同參畵師)로 참여했다. 동참 화사는 임금의 어진 제작 시 얼굴을 제외한 부분을 그리거나 색칠을 담당하던 화가를 말한다. 김홍도는 이 공로로 사포서(司圃署)의 별제(別提) 벼슬을 제수받았다.


이후 김홍도는 정조의 어진을 그렸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김홍도의 기록은 두 개인데 그중 하나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희우정(喜雨亭)에 나아가 승지·각신을 소견하였다.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화사(畵師) 김홍도(金弘道)에게 어용(御容)의 초본(初本)을 그리라고 명하였다. <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781년 9월 3일>


“정조 때에는 화원의 공봉(供奉)으로 관내에서 그림을 그려 올릴 때마다 매번 칭찬을 받고 곧 왕지(王旨)에 맞았다.”


정조 어진-4.PNG
정조 어진.PNG
수원행궁 화령전의 정조 어진


“임금께서 금강산 사군(四郡)의 산수를 김홍도에게 그리라고 명하고 관용으로 조석(朝夕)을 받들게 하니, 이는 이수(異數)의 대접이었다.” <호산외사(壺山外史)>-조희룡


<호산외사(壺山外史)>는 조선 후기에 활동한 조희룡(趙熙龍)이 중인 계층의 인물 43명의 행적을 모아 1854년경에 편찬한 전기(傳記) 작품집이다.


조희령 호산왜사.PNG <호산외사(壺山外史)>-조희룡


김홍도는 이 무렵 명나라 문인화가 이유방(李流芳)의 호를 따라 단원(檀園)이라는 호를 썼다.


정조의 눈과 귀였던 김홍도

정조는 예조에 속한 화원 중 우수한 화원을 ‘차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으로 뽑아 규장각에서 일하게 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恨中錄)>을 보면 차비(差備)를 조선 후기 왕실에서는 ‘자비’로 읽었다. 그래서 ‘자비대령화원’으로도 쓰인다.


1 김홍도 책 2PNG.PNG
1 김홍도 책.PNG
김홍도 책(교보문고)


당대 최고의 대접을 받았던 차비대령화원의 정원은 10명이었는데 도화서 화원이 공개 시험을 치러 선발되었다. 시험은 인물, 산수, 누각, 초충 등 총 8과목으로 1881년까지 약 100년간의 운영 상황 기록이 규장각 일지인 <내각일력(內閣日曆)>에 남아 있다.


신한평, 김홍도, 김득신 등 대표적인 화원 화가들이 차비대령화원이었다. 이들은 1년에 4번, 인사고과를 위해 ‘녹취재(祿取才)’라는 시험을 보았다. 그러나 어용화사(御容畵師)였던 김홍도는 정조 승하 때까지 한 번도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김홍도는 정조의 눈과 귀였다. 그는 정조의 명에 따라 백성들의 생활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정조는 백성들의 생활을 담은 생생한 모습을 그려오라고 김홍도에게 요구했다. 이에 김홍도는 타작하는 모습, 우물가 모습, 빨래터 모습, 주막 모습, 서당 모습, 장터 모습 등 백성들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그림으로 담아 정조에게 제출했다.


씨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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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 <서당>, <무동>
김홍도1.PNG <주막>, <대장간>, <담배 썰기>
김홍도2.PNG <행상>, <장터길>, <자리 짜기>


위의 그림은 김홍도의 풍속도 화첩(風俗圖 畵帖)에 있는 그림이다. 대부분 교과서에 실린 작품으로 그림에 문회한인 내 눈에도 낯익은 그림들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기록에 의하면 이 화첩은 1918년 조한준에게 구입했을 당시 모두 27점이었으나 1957년 원래 화첩 마지막에 있었던 군선도 2점이 별도의 족자로 꾸며지면서 풍속도 25점을 새로운 화첩으로 꾸몄다. 화첩에는 당시 풍속에 대한 다양한 관심과 예리한 관찰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실려있다.


정조는 김홍도가 그려온 풍속화를 보고 무릎을 치며 감동했다. 김홍도 덕분에 정조는 백성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고 이를 정치에 반영하는 자료로 삼았다.


정조는 금강산이 보고 싶어 김홍도에게 그려오라고 명했다. 김홍도는 도화서 동료이자 스승인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으로 가서 관동팔경을 비롯한 금강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왔다. 그의 그림은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 정교했다. 정조는 김홍도에 관한 인상을 <홍재전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금강산 청심대.PNG <금강사군첩-청심대>


“김홍도는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은 안 지 오래다. 30년 전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화사에 속한 일은 모두 홍도로서 주장하게 하였다.” <홍재전서(정조 24년)>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수원 현릉원으로 옮긴 후 넋을 기리기 위해 용주사를 원찰로 삼았다. 그리고 용주사 후불탱화를 그리기 위해 김홍도를 별도 직책까지 만들어 청나라 사신 일행으로 함께 보냈다. 당시 청나라는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 서양 문물이 유입되고 화풍에서도 서양화법이 널리 퍼져있었다.


1790년 정조는 용주사의 탱화를 김홍도에게 맡겼다. 용주사 후불탱화는 평면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명암과 원근을 표현하여 입체감이 풍부한 그림으로 탄생했다. 이는 지난 17화 용주사 편에서 다루었는데, 용주사 탱화는 김홍도가 청에서 배워온 화법을 적용하여 명암, 원근법, 입체감까지 표현한 그림이 되었다.


대웅전2.jpg 용주사 후불탱화


용주사 그림을 맡은 이후 김홍도는 불교에 심취했다. 1795년 김홍도는 중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인 정6품을 받아 연풍 현감에 제수되었다.


연풍 현감이 되자 김홍도는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는 등 선정을 베풀었고 불교에 깊이 빠져 기도를 통해 늦게나마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김홍도는 머지않아 탄핵을 받게 된다.


“연풍 현감 김홍도는 다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하나도 잘한 행적이 없으며 관청의 우두머리 된 몸으로 중매나 하고 구슬아치들에게 위압적으로 호령하여 (중략) 사냥을 간다고 하면서 온 읍의 군역에 매인 장정을 징발하여 (중략) 이같이 백성에게 포악한 무리는 중하게 다스려 벌주어야 합니다.” <일성록>-1795년 1월 7일


정조의 지나친 김홍도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세력들에 의해 그는 부임한 지 3년 만에 현감에서 물러났다. 사실 그림밖에 몰랐던 김홍도는 정치를 잘 몰랐고 그래서 암행어사의 탄핵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한양으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조는 김홍도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대망의 화성행차도를 그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김홍도는 왕실 최대 행사를 기록하는 막중한 총책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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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행을묘정리의궤-능행차도>


1795년 윤2월 9일부터 8일에 걸친 정조의 화성 행차를 그린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儀軌圖)’는 조선시대 기록화의 기념비적 대작으로 꼽힌다. 또한 진경산수화를 그린 ‘을묘년화첩’과 ‘병진년화첩’은 명작으로 남았다.



불행했던 말년,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어

그러나 말년의 김홍도는 불행했다.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자 규장각의 개혁파들은 힘을 잃었고, 김홍도는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다.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천을 보내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천을 떼내어 매화를 사고, 8백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백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호산외사(壺山外史)>-조희룡


군선도 병풍.PNG <군선도>(국보 제139호, 호암미술관 소장)


정조 사후 김홍도를 후원하던 사람도 별세하자 그는 후원자를 잃고 생활이 어려워졌다.


정조가 있을 때 모든 시험에서 제외되었던 그는 1804년(순조 4), 60세의 나이에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이 되기 위해 시험을 치렀다. 생활 때문에 응시하기는 했으나 특별 대우를 받던 김홍도가 시험까지 치른 후 나이 어린 화원들과 함께 일해야 했으니 자존심이 몹시 상했을 것이다.


이후 그의 죽음까지의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대략 1806년 62세의 나이로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김홍도의 행적이 남지 않은 이유는 그가 중인의 신분으로 도화서 화원 정도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시대상에 있다. 더구나 자신을 그렇게 믿고 일을 맡겼던 정조의 죽음이 김홍도에게는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김홍도는 정조가 죽은 후 1년 반 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고 전한다.


김홍도-단원도.PNG 단원도


1805년 11월, 송나라 구양수(歐陽修)의 ‘추성부(秋聲賦)’를 인용해 쓸쓸한 가을밤의 고독과 적막감을 그린 ‘추성부도(秋聲賻圖-보물 1393호)’는 김홍도가 그린 마지막 작품이다. 이 그림 이후에는 날짜가 명기된 김홍도의 작품은 전하지 않는다.


추성부도2.PNG <추성부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추성부도'는 전체적으로 힘이 빠져있고 쓸쓸함이 풍기는데 이는 말년의 병들고 가난했던 김홍도의 모습을 대변한다. 집안에 있는 노인은 송나라 시인 구양수인데 평론가들은 김홍도의 자화상으로 보고 있다.


추성부도 확대 그림.PNG 추성부도 확대 그림


‘추성부’는 송나라 문인 구양수가 쓴 시로, 낙엽 떨어지는 늦가을에 바람 소리를 듣는 감상을 적은 글이다.


성월교결(星月皎潔) 명하재천(明下在天)

사무인성(四無人聲) 성재수간(聲在樹間)

별과 달이 환히 빛날 뿐 사방에 인적은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


김홍도는 시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뒤, 왼쪽에 자필로 직접 시를 써넣었다.


조선시대 화가는 단순 기술직이었다. 그러나 김홍도는 그림뿐만 아니라 문학적 재능도 있었고 글씨도 잘 썼다. 그림은 화원이 그리고, 글씨는 다른 사람이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김홍도는 그림에 직접 글씨를 썼다.


‘추성부도’를 그린 직후 김홍도가 쓴 편지에는 아들의 교육비를 댈 수 없으니 친구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 전한다.


아들 연록아 보아라.

날씨가 이처럼 차가운데 집안 모두 편안히 지내며 너의 독서 공부는 한결같으냐? 너의 훈장 선생 댁에 갈 월사금을 찾아 보내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구나. 정신이 어지러워 더 쓰지 않는다. 을축년 섣달 십구일 아버지가 쓰다. 1805년 12월 <단원유목집>


김홍도는 건강도 좋지 않았다. 1805년 초기 편지에는 병에 관해 썼는데 가을부터 위독한 지경을 여러 차례 겪고 생사를 오락가락하였다고 적고 있다.


'추성부도'는 가로 2m가 넘는 큰 작품으로 김홍도가 죽기 직전의 병들고 쓸쓸한 모습을 담은 유작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김홍도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그가 죽은 시기도 정확하지 않다. 다만 '추성부도'를 그린 후 병을 앓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해 그 이듬해에 죽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정조와 함께 신명 나게 조선의 일상을 그림으로 기록했던 김홍도의 쓸쓸한 죽음이 참으로 안타깝다.


도담삼봉.PNG
옥순봉.PNG
<도담삼봉>, <옥순봉>


정조는 김홍도라는 천재 화가를 알아보았고 그를 통해 민생을 파악하고 개혁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 덕에 우리는 김홍도의 그림을 통해 200년 전 조선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자료>

강세황(姜世晃)의 『단원기(檀園記)』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일성록(日省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내각일기(內閣日記)』

국가유산포털

중앙국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