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효심으로 만들어진 신들의 정원
흔히 왕릉을 일컬어 '신들의 정원'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왕릉이 자연과 인공 요소가 조화롭게 배치된 조경과 건축의 정수로 평가되고, 조선의 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신들의 정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릉은 모두 42기인데 그중 두 곳은 북한에 있다.
일단 왕릉에 들어서면 넓은 부지에 놀라고 잘 관리된 조경에 놀란다.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큰 묘소 앞에서 또 한 번 감탄한다.
융건릉(융릉과 건릉)의 총면적은 842,662㎡로 드넓다 못해 광활하다. 공원도 잘 관리되어 있어 화성 시민이나 근처 수원시민들에는 산책로로도 손색이 없다. 내가 융건릉을 찾은 날은 화요일 평일이었는데 사람이 꽤 많았다. 벤치에 앉아 쉬는 사람도 있었고 삼삼오오 둘레길을 걷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아마 꽃이 피기 시작하거나 그늘이 필요한 여름이면 더 많은 사람이 찾을 것으로 생각된다.
융릉(隆陵)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장조(莊祖))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헌경왕후(獻敬王后))의 합장묘다.
헌경황후(獻敬皇后) 홍씨는 본관이 풍산인 영풍부원군 홍봉한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735년(영조 11)에 태어났다.
1744년(영조 20) 왕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1762년(영조 38) 장조(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혜빈(惠嬪)에 봉해졌다. 이후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호칭을 높여 혜경궁(惠慶宮)이라 하였다.
헌경황후는 자신의 삶을 비롯하여 친정 가문, 그리고 남편 장조의 참변에 관한 이야기를 자전적 수필로 쓴 <한중록>을 남겼다.
손자인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왕실의 어른으로 생활하다가 1815년(순조 15)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건릉(健陵)은 정조와 그의 비 효의왕후(孝懿王后)의 합장묘다. 건릉과 융릉을 합하여 융건릉(隆健陵)이라 부르는데 지난 1970년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처음에는 융릉 동쪽에 있었으나,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의견에 따라 현재의 위치(융릉 서쪽)로 옮겨 효의왕후와 합장했다.
융릉과 비교했을 때 병풍석이 없는 등 검소한 느낌을 주지만, 문무석인의 당당함에서 정조의 기상을 엿볼 수 있다.
효의황후 김씨는 본관이 청풍인 청원부원군 김시묵과 당성부부인 홍씨의 딸로 1753년(영조 29) 가회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762년(영조 38)에 왕세손빈이 되었고,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조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으나 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시할머니 정순왕후와 시어머니 헌경황후를 잘 모셔 칭송을 받았다.
비문에는 大韓 正祖宣皇帝健陵 孝懿宣皇后祔左(대한 정조선황제건릉 효의선황후부좌)라 쓰여있다.
효의왕후는 1800년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다.
“선왕(정조)께서 존호를 받지 못하시는데, 미망인으로서 이를 받는 것이 어찌 가당하단 말인가?”
효의왕후는 수차례에 걸쳐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모두 거절했다.
1820년(순조 20)에는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을 치르려고 했으나 이 역시 사양했다. 이후 1821년(순조 21) 창경궁 자경전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로 추존되었다.
조선의 왕릉은 격에 따라서 세 가지로 구분한다.
능(陵):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
원(園): 황태자, 왕세자, 왕세자빈
묘(墓): 나머지 왕족(친왕, 대군, 군, 공주, 옹주, 후궁), 폐위된 왕과 왕비의 무덤.
처음 사도세자 묘는 수은묘(垂恩墓)였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세자라 올리고 수은묘를 원(園)으로 격상하여 영우원(永祐園)이라 불렀으며 화산(花山)으로 이장하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고쳤다.
이후 1899년(광무 3) 고종의 직계 5대 조상의 자격(고조부)으로 장종대왕(莊宗大王)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이때 묘가 융릉(隆陵)으로 격상되었다. 결국 사도세자의 묘소는 세 가지 이름을 다 가진 묘소가 되었다.
융건릉 매표소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 역사문화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융릉과 건릉, 조선 왕릉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역사문화관에서 오른쪽을 보면 재실(齋室)이 있다. 재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건물로 제사 전에 모여서 목욕재계하고 준비하는 의례용 장소를 말한다. 매년 4월 둘째 주에 융릉 제향이 있고 5월에는 건릉 제향이 있다.
재실에는 멋진 향나무와 지난 200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개비자나무가 있다. 개비자나무는 보통 3m 이내로 자라는데 재실의 개비자나무는 높이가 4m, 줄기 둘레도 80cm에 이르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되었다. 처음 융릉 재실 조성 당시에 심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재실에서 나와 역사문화관을 지나면 길이 갈라진다. 오른쪽은 융릉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건릉으로 가는 길이다.
융릉과 건릉 두 길 모두 한참 걸어 들어가야 묘소를 볼 수 있는데 길 양쪽으로 울창한 소나무가 빽빽하게 뻗어있다. 내가 융건릉을 방문한 날은 3월 17일, 아직 봄꽃은 피지 않았고 철쭉과 진달래가 몽글몽글 꽃을 피우기 위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해설사가 동행하는데 마침 운 좋게도 시간이 맞아서 해설사를 따라다녔다.
왕릉을 선정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어야 한다. 뒤로는 높은 산이 있고 앞에는 시냇물이 있으면 좋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배산임수(背山臨水)가 명당에 적용된다. 두 번째는 거리가 한양에서 80리를 넘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왕이 선왕의 무덤에 제향을 지내러 가는데 궁궐을 오래 비우면 안 되기 때문이다.
왕릉이 서울이나 경기도 일대에 있는 것도 바로 그 이유다. 여기서 예외인 왕릉이 바로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莊陵)이다. 사실 융릉도 한양에서 88리나 떨어져 있어 예외였으나 정조가 80리로 우겨서 만들었다고 한다.
잘 닦여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면 멀리 융릉의 홍살문이 보인다. 홍살문으로 가기 전 다리가 먼저 나온다.
“왕실의 묘로 들어갈 때 건너는 다리는 보통 ‘금천교(禁川橋)’라고 합니다. 금천은 궁궐이나 왕릉 입구에서 속세와 성스러운 공간을 구분 짓는 상징적 개천을 뜻하며, 그 위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다리는 금천교가 아닙니다.”
해설사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보통 금천교는 속(俗)의 공간에서 성(聖)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놓여 있다. 그런데 이 다리는 원대황교(元大皇橋)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융릉의 금천교는 조금 더 들어가야 나온다.
원대황교는 대황교의 석재를 옮겨 복원한 것이다. 대황교는 대황교동과 황계동이 만나는 황구지천에 놓여 있던 다리로 정조 능행 길에 지나가는 주요 장소였다.
1970년대에 수원 군비행장의 확장으로 다리를 헐게 되자 일부 남은 석재를 융릉으로 옮겨 복원했다. 원대황교를 건너 조금만 가면 금천교가 있다. 그런데 원대황교에 비해 전혀 금천교 같지 않다. 아무튼 밑으로 물이 흐르니 금천교가 맞기는 하다.
금천교 왼편에는 곤신지(坤申池)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은 정조가 1789년(정조 13) 현륭원을 현재의 자리로 옮긴 다음 해에 조성했다.
조선 왕릉의 연못은 일반적으로 방지원도(方池圓島)의 형태로 만들었다. 방지원도는 전통 정원에서 연못을 사각형으로 파고 그 안에 원형 섬을 만드는 형태를 말한다. 즉, 방지(사각형 못) + 원도(원형 섬) 조합으로,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융릉의 연못은 일부러 ‘용(龍)이 여의주(如意珠)’를 품은 모습을 형상화하기 위해 둥글게 만들었다. 그 이유 역시 풍수에 따른 것이다.
정조가 융릉 터에 아버지의 묘를 쓰기로 한 것은 바로 이 땅이 최고의 명당인 반룡농주(盤龍弄珠)형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직 수원(水原) 읍내에 봉표해 둔 세 곳 중에서 관가(官家) 뒤에 있는 한 곳만이 전인(前人)들의 명확하고 적실한 증언이 많았을뿐더러 옥룡자(玉龍子)가 이른바 반룡농주(盤龍弄珠)의 형국이다. 그리고 연운·산운·본인의 명운이 꼭 들어맞지 않음이 없으니, 내가 하늘의 뜻이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이름이다. 나라 안에 능이나 원(園)으로 쓰기 위해 봉표해 둔 것 중에서 세 곳이 가장 길지(吉地)라는 설이 예로부터 있어 왔는데, 한 곳은 홍제동(弘濟洞)으로 바로 지금의 영릉(寧陵)이 그것이고, 한 곳은 건원릉(健元陵) 오른쪽 등성이로 바로 지금의 원릉(元陵)이 그것이고, 한 곳은 수원읍(水原邑)에 있는 것이 그것이다.” <정조실록 27권, 정조 13년 1789년 7월 11일>
반룡농주형은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의 길지를 말한다. 정조는 용(사도세자)이 여의주가 없어 승천하지 못할까 봐 인공적으로 연못을 만들어 여의주를 상징하게 했다.
남서 방향에 연못을 만든 이유는 융릉의 생방(生方-수자리 용어)으로 묫자리에서 처음 보이는 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사도세자가 네모난 뒤주에 갇혀 죽었기에 정조가 네모를 피해 둥근 연못으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홍살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융릉은 홍살문과 정자각, 그리고 무덤이 일직선이 아니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사방이 꽉 막힌 뒤주에서 죽었기 때문에 죽어서라도 답답하지 않도록 앞에 막히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이 명령에 따라 무덤은 일부러 정자각을 비껴서 만들었다. 이 대목에서는 가슴이 뭉클했다. 세상에 어떤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이토록 헤아릴 수 있을까 싶다.
홍살문 오른쪽에는 돌아가신 선조를 찾아 4배를 드리고 혼령을 부르는 판위(版位)가 있다. 정조는 이곳에 꿇어앉아 아버지의 묘를 바라보며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홍살문을 지나 정자각으로 가는 길은 두 곳으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모신 제관이 다니는 넓고 높은 향로(香路)와 임금의 길인 어로(御路)가 있다.
사람들은 기왕이면 임금이 걸었던 어로를 걸어보겠다며 어로로 들어섰고 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홍살문에서 보면 왼쪽에 능을 지키는 수복방(守僕房)이 있고 오른쪽에는 비각이 있다.
수복방은 온돌방과 마루, 그리고 부엌이 있으며 온돌방 앞에는 마루가 있었다. 실제로 이곳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았기에 수라간은 없다. 마루에는 지친 사람들이 앉아 잠시 쉬었다 가기도 했다.
정자각 위로 올라가면 정청(正廳) 안에는 제수진설도(祭需陳設圖)와 제례 절차가 전시되어 있다. 제향을 드리는 정청의 문 위에는 도르래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도르래는 혼령이 편안하게 음식을 먹는 동안 발(簾)을 내려주는 장치다.
정자각 오른쪽에는 능의 주인을 알려주는 비각이 있다. 비각(碑閣)에는 두 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었다. 하나는 세자의 신분인 현륭원의 표석이며 다른 하나는 황제로 추존된 후 융릉의 표석이다. 두 개의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선국(朝鮮國)
사도장헌세자현륭원(思悼莊獻世子顯隆園)
대한(大韓)
장조의황제융릉(莊祖懿皇帝隆陵)
헌경의황후부좌(獻敬懿皇后祔左)
능은 밑에서 바라볼 수 있으나 가까이 올라갈 수 없게 막아 놓았다. 그러나 능까지는 워낙 멀어서 사진으로 잘 담기지 않았다.
정조는 아버지의 능이 왕릉이 아니었지만, 왕릉 못지않게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융릉은 난간석 없이 병풍석만 둘렀고 봉분(封墳) 앞으로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長明燈)을 배치했다. 하계에는 양쪽으로 문석인과 무석인을 두었다. 원래 왕세자의 원침(園寢)에는 무석인을 세우지 못하지만, 정조는 신하들과 협의하여 무석인을 세우는 대신 석마를 반으로 줄여서 두 마리만 세웠다.
그 외에 정조는 융릉 주변에도 많은 신경을 써서 들릴 때마다 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그렇게 가꾸어 놓은 융릉은 입구부터 울창한 소나무 숲이 만들어져 운치를 더한다. 그러나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작년에 눈이 많이 내려서 소나무가 반 정도 유실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직 잎은 피지 않았지만 보기에도 조금 앙상해 보였다.
소나무 숲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어느 초여름 날, 능을 참배하던 임금은 능 앞 소나무에 송충이가 너무 많아 나무들이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럴 수가, 내 땅에 사는 송충이가 어찌 임금의 아버님 묘 앞에 있는 소나무잎을 갉아먹는단 말인가? 아버님이 비명에 가신 것도 가슴 아픈데 너희들까지 이리 괴롭혀서야 되겠느냐?”
임금은 이렇듯 독백하며 송충이를 한 마리 잡아 이빨로 깨물어 죽였다. 그 이후로는 이 일대에 송충이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정조는 능에 들릴 때마다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송충이를 잡게 하고 상을 내렸다. 어떤 해에는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백성들이 사도세자 묘 근처의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 먹었다. 정조는 처벌 대신 콩주머니를 나무마다 매달게 하여 나무껍질 대신 먹도록 했다고 전한다.
융릉의 소나무는 멋있어서 하얀 눈이 쌓이면 융건백설(隆乾白雪)이라 불렀다.
처음 정조가 아버지의 묘를 수원 화산(花山)으로 이장한다고 하자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임금이 원행을 나갈 때 80리 밖을 나갈 수 없다는 법도 때문이었다.
그러자 정조는 “앞으로 수원을 80리로 정한다”라며 성묘(誠墓)를 정당화시켰다. 그리고 이장한 후에는 수시로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다.
“출궁(出宮)하던 날에는 밤새도록 거둥 하여 마치 무엇을 찾는 것처럼 허둥지둥 정신이 없었고, 현륭원에 이르러서는 아침 수라도 들지 않은 채 겨우 위패(位牌) 앞에 나가자마자 눈물이 먼저 흘러내렸고 향을 피울 때는 엎드려 흐느끼면서 목이 메이고 가슴이 막혀서 의절(儀節)을 행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대신과 근신들이 죽을죄를 무릅쓰고 좌우에서 부축하여 겨우 침문(寢門)을 나와서는 그대로 원(園)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때의 이 정경은 사람의 마음을 지닌 자로서는 차마 우러러볼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 능상 가까이에 이르러서는 슬픔을 더욱 억제하지 못하여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전하께서는 기운과 정신을 잃기까지 하셨는데, 그때의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정조실록 39권, 정조 18년 1794년 1월 20일>
정조실록에 쓰인 글을 보면 정조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슬퍼함이 지나치자 신하들은 혜경궁 홍씨에게 정조가 능을 자주 찾아가는 것을 말려달라고 몇 차례나 청하는 기록이 나온다.
정조는 한양으로 돌아올 때도 계속 뒤를 돌아보며 아쉬워했다. 아버지 묘를 참배하러 갈 때 지지대(遲遲臺) 고갯마루에서 묘가 보이면 가는 시간이 너무 더디다고 재촉했고, 돌아올 때는 이 고개를 넘으면 아버지의 묘가 보이지 않아 슬프다며 눈물을 흘려 발걸음을 지체했다. 그래서 이곳은 지지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재 이 지지대 고개는 경기도 의왕시 왕곡동과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지지(遲遲)라는 표현은 맹자에서 따온 말이다.
"去魯,曰:『遲遲吾行也.』去父母國之道也."
공자가 노나라를 떠날 때 말씀하시기를, "더디구나, 내가 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공자가 부모의 나라를 떠나는 길이기 때문에 아쉬움을 표현한 것이다. 지지대 고개는 들리지 못해서 사진이 없어 아쉽다.
이 글을 쓰면서 정조의 끝없는 효심을 보고 많이 배우기도 하고 내가 부모님께 너무 못한 것 같아 반성을 하기도 한다.
-다음 호에 계속_
*참고문헌*
<정조실록>
화성시 문화관광
궁능유적본부
융건릉 홈페이지
문화원형백과 불교 설화
조선왕조실록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