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독살되었나?

자연사(병사)설 VS 독살설

by 김인숙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


정조 죽음의 사인은 지금까지 미스터리다. 물론 공식적인 기록은 자연사다. 그러나 “정조가 조금만 더 살았다면 어쩌면 조선의 앞날이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희망 회로를 돌려서인지, 너무 빨리 죽은 아쉬움 때문인지 아직도 독살설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 정조의 정적이었던 노론 벽파 심환지는 정조 독살설 주인공 1순위였다. 그러나 지난 2009년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 297통의 서찰이 공개되면서 두 사람이 끈끈한 사이였음을 증명했고 심환지는 정조 암살 물망에서 벗어났다.


정조의 비밀 편지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편지에 묘사된 정조의 이미지가 엄숙함을 떠나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편지에는 정조의 고민이나 일상 모습, 조정 신하들에 대한 평이나 자신의 병력까지도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었다.


특히 정치적 견해가 달랐던 심환지를 때로는 구슬리고 부탁을 하기도 하며, 때로는 선물을 보내고 병이 들었을 때는 위로를 하면서 정적을 기술적으로 다루었던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조는 심환지뿐 아니라 시급한 현안이나 민감한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론인 김희순, 어용겸, 서용보와도 정보를 주고받았다.


“김희순((金羲淳)은 요사이 소식이 없으니 다시 독촉하도록 하라.” (1800년 3월 3일)


“어용겸(魚用謙)에게 어찌하여 근래의 소식을 적어 보이지 않는지 엄히 신칙하라.” (1797년 7월 17일)


“지금 서용보(徐龍輔)의 편지를 받아보니 심규로(沈奎魯)가 상소한다고 한다.” (1800년 2월 9일)


200년 만에 공개된 이 편지는 <정조어찰첩(正祖御札帖)>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이 책은 정조가 심환지에게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까지 보낸 297통의 편지를 사진으로 찍어 책에 담았다.


정조어찰집.PNG 정조어찰첩 책-교보문고


정조어찰첩-세계일보.PNG 정조어찰첩 전권(자료-세계일보)


정조는 각종 문제가 생길 때마다 심환지와 미리 상의했으며, 조정에서 자신이 어떤 말을 꺼내면 이런 태도로 이런 말을 하라고 미리 각본을 짜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의 정책을 관철시키고 추진해 나가는 장면은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 기상천외하다.


심환지는 읽고 바로 태워버리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날짜까지 기록해 편지를 고이 간직하여 200년 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2009년에 공개된 이 어찰은 지난 2013년 경매장에서 12억 원에 낙찰되었다고 한다.


심환지 편지.PNG 심환지가 보관했던 편지(자료-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그다음으로 정조 살해 물망에 오른 사람은 심환지의 친척인 어의 심인이다. 정조의 병세가 악화하자 심인은 연훈방(煙熏方)을 처방했다. 신하들은 연훈방 처방은 파두(巴豆) 등의 독약을 사용하기에 잘못 쓰면 위험하다고 말렸다.


그러나 의학에 지식이 많아 스스로 처방전을 내릴 정도였던 정조는 내의원의 실력을 믿지 않았고 여러 약이 소용이 없자 연훈방을 쓰도록 허락했다. 연훈방을 사용하자 종기에서 흘러내린 피고름이 엄청나게 많이 쏟아져 나왔다. 신하들은 종기가 녹은 것이라고 좋아했으나 며칠 후 병세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연훈방을 쓴 이후 정조는 식욕마저 사라졌다. 이를 수은 중독 때문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사실 한여름에 방문을 닫고 독성이 있는 연훈방을 마셨기에 수은 중독은 그냥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


0 창덕궁 전각.jpg 창덕궁 전각


연훈방 치료 이후 정조는 정신이 점점 흐릿해져 의사소통까지 어려워졌다. 어의 이시수는 정조의 정신이 흐릿한 것이 연훈방 때문이라 생각하고 쓰지 못하게 했다.


“연훈방은 종기를 치료하는 약제이지만 성상의 체후가 혼미하신 때 연기가 방안에 퍼져 정신에 방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이시수의 말에 연훈방을 중단했지만, 정조는 기력이 돌아오지 않았다.


또 독살설에 연루된 사람은 정순왕후다. 정조는 정순왕후가 탕약을 들고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정조가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모든 사람을 물리치고 그 방에 유일하게 남아있던 사람은 정순왕후였다. 따라서 정조의 죽음을 가장 먼저 알린 사람도 정순왕후였다.


그러나 현재 여론은 정조의 죽음을 자연사(병사)로 받아들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당시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정조는 말년에 다음과 같은 증상을 보였다.


지속적인 피로와 체력 저하

종기(피부 감염) 또는 염증

고열과 통증


0인정전 천장.jpg 창덕궁 인정전 천정


정조가 승하했던 1800년 6월 28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본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좌의정 심환지 등이 아뢰기를,

“밤사이에 성체는 조금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누각(漏刻)이 멎은 뒤에 잠을 조금 잤다.”

하고, 이시수가 아뢰기를,

“밤사이에 무엇을 드신 것이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혀 먹은 것이 없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인삼차를 지금 대령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응답하지 않았다. 다시 아뢰기를,

“인삼차를 끓여 들여온 지 상당히 지났습니다.”

하니, 상이 마셨다. 시수가 아뢰기를,

“일찌감치 진맥 하는 것이 좋겠는데 지방의 의관 김기순(金�淳)과 강최현(姜最顯)도 대령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세상에 병을 제대로 아는 의원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불러들여라.”

하여, 기순과 최현이 들어왔다. 강명길(康命吉) 등이 진맥 한 뒤에 아뢰기를,

“원기 부족하기는 어제와 마찬가지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탕약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하니, 명길이 아뢰기를,

“원기를 보할 약을 쓰면서 아울러 비장(脾臟)을 따뜻하게 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최현 등이 진맥 한 뒤에 아뢰기를,

“맥 도수가 부활(浮滑)하고 풍 기운이 있는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체적으로 어떠한가?”

하니, 최현이 아뢰기를,

“대체적으로는 부족합니다.”

하였다. 시수가 아뢰기를,

“신들은 물러가 의관들과 탕약을 의논해 정하겠습니다.”

하였다. <정조실록 54권, 정조 24년, 1800년 6월 28일>


이어 물러갔던 어의가 탕약을 지어 올렸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가 탕약을 받들어 올리자, 상이 이르기를,

“누가 지은 약인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강최현이 지은 것인데 여러 사람의 의논이 대체로 서로 비슷하였습니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5돈쭝인가?”

하니, 시수가 아뢰기를,

“인삼 3돈을 넣었습니다.”

하였다.


0창덕궁 인정전2.jpg 창덕궁 인정전


정조는 자신의 체질이 인삼과 상극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만병통치약이었던 인삼은 열이 많은 정조에게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정조는 인삼을 이용한 육화탕(六和湯)이나 경옥고(瓊玉膏)를 먹지 않았다.

6월 23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금 전에 강명길이 하는 말을 들으니 경옥고(瓊玉膏)를 드시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 약은 인삼이 들어가긴 했으나 온제(溫劑)와는 달라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처음 열증세가 일어난 것은 5푼의 인삼이 들어 있는 육화탕(六和湯)에 그 원인이 있는 것 같은데 이제 어찌 다시 그와 같은 약을 쓸 수가 있겠는가.”

(중략)

시수가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증세를 보건대 여느 병과 다르며 게다가 한창 무더운 날씨에 약성이 더운 약을 붙이고 고름이 흘러내리니 어찌 괴롭지 않겠습니까만, 대체로 종기란 빨리 낫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봉합이 너무 빠르면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시어 한때의 괴로움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소서.”


이로부터 이틀 뒤 원기를 보강하기 위해 다시 경옥고 복용을 권하자 정조는 고개를 저었다.


“경들은 나의 본디 체질을 몰라서 그렇다. 나는 본디 온제(溫劑)를 복용하지 못하는데 음산하고 궂은날에는 그와 같은 약들을 더욱 먹지 못하니, 그 해로움이 틀림없이 일어난다. 오늘과 같은 날씨에 어찌 이러한 약을 복용할 것인가. 궁중에 여러 해를 출입한 각신(閣臣)은 반드시 나의 체질을 알 것이다. 체질로 헤아려보고 사리로 참작할 때 오늘은 결코 복용할 수 없다. 병세를 지켜보아야 할 일이나 평소에 경옥고를 한번 맛보면 5, 6일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였다. 생맥산(生脈散)이 어쩌면 경옥고보다 낫지 않겠는가?”


결국 의원들의 권유로 경옥고를 귤강차에 타서 복용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정조는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정신이 몽롱해지며 상태가 더욱 악화하였고 그로부터 이틀 뒤 사망했다.


0창덕궁 돌담2.jpg 창덕궁 돌담


사망하기 직전 정순왕후가 탕약을 들고 나타났다.


제조 김재찬(金載瓚)이 인삼차와 청심원을 받들고 들어왔으나 상은 역시 마시지 못하였다. 도제조 이시수가 왕대비에게 들어가 여쭙기를,

“인삼차에 청심원을 개어서 끓여 들여보냈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드실 길이 만무합니다. 천지가 망극할 따름입니다.”

하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왕대비가 분부하기를,

“내가 직접 받들어 올려드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하므로, 환지 등이 명을 받고 잠시 문밖으로 물러나왔다. 조금 뒤에 방 안에서 곡하는 소리가 들리자 환지와 시수 등이 문밖으로 바싹 다가가 큰소리로 번갈아 아뢰기를,

“신들이 이와 같은 망극한 변을 만나 지금 4백 년의 종묘사직의 안전이 극도로 위태롭게 되었는데 신들이 우러러 믿는 곳이라고는 우리 왕대비전하와 자궁저하(慈宮邸下) 일뿐입니다. 동궁저하께서 나이가 아직 어리므로 감싸고 보호하는 책임이 우리 자전전하와 자궁저하에게 달려 있을 뿐인데 어찌 그 점을 생각지 않고 이처럼 감정대로 행동하십니까. 게다가 국가의 예법도 지극히 엄중하니 즉시 대내로 돌아가소서."

하였는데, 한참 뒤에 자전은 비로소 대내로 돌아갔다.


이날 유시(酉時)에 상이 창경궁(昌慶宮)의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三角山)이 울었다. 앞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그리하여 왕세자 및 자전과 자궁이 거애하고 신하들도 모두 거애한 뒤에 내시가 곤룡포를 받들고 동쪽 처마 밑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북쪽을 향해 고복을 세 차례 부르고 곡하여 애도를 표하였으며, 대신과 각신들은 줄을 나누어 기둥 밖에 늘어서 있고 서구(書九)가 복의(復衣)를 받들어 어상(御床) 곁에 놓았다. 왕대비가 분부하기를,

“경비와 민폐는 성상께서 항상 아끼고 안타깝게 생각하셨던 일이다. 이번에 드는 물자는 다 대내에서 내리겠으니 대내에서 준비하기가 적당하지 않은 의대(衣襨)만 밖에서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 승하일 마지막 기사>


창경궁 영춘헌.PNG 창경궁 영춘헌(정조가 사망한 전각)


1800년 6월 14일부터 종기가 낫지 않아 진찰을 받은 정조는 그로부터 2주 동안 각종 처방을 받았다. 그러나 차도가 없었고 결국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정조가 또렷한 기억으로 마지막 남긴 말은 “인삼이 5돈쭝인가?”라는 처방에 관한 말이다. 참으로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학계에서는 종기 악화가 패혈증으로 번져 사망했다고 보고 있다. 여기까지가 정조의 죽음에 관한 마지막 기록이다.


독살설의 의혹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독살설의 의혹도 만만치 않다. 독살설을 주장하는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1. 정조가 추진한 개혁 정치로 인해 기득권 세력과 갈등이 매우 컸다는 점

2. 갑작스러운 병세 악화

3. 일부 기록의 모호함과 후대의 해석

4. 특히 정조 사후 권력 구도가 급변했으며 개혁된 모든 것들이 원위치로 돌아감

5. 오회연교(五晦筵敎)-7월, 남인 대거 등용설


이중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오회연교(五晦筵敎)는 1800년(정조 24) 5월 그믐날에 정조가 경연 석상에서 내린 명령이다.


정조는 군주에게 맞서는 일부 신료들을 향하여 경고하며 군주가 천명하는 정당한 의리에 적극 호응할 것을 요구했다.


이 명령을 내리게 된 계기는 이만수의 형인 이시수가 당시 우의정으로 재직 중인 상황에서 이만수를 이조판서에 임명한 것을 김이재가 비판하면서 비롯되었다.


정조는 이 사안을 정당한 군신의리 확립의 정치적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다.


오회연교를 내리면서 화가 난 정조는 7월에 남인을 대거 등용하겠다고 선포했다. 고향 마재마을에 내려가 있던 정약용에게 편지를 보내 7월 초에 올라오라고 기별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후 정조는 곧 앓아누웠고 남인 등용을 호언장담했던 7월은 끝내 맞이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일로 미루어보아 노론 벽파는 7월이 오기 전에 어떻게든 정조를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왕권 강화에 성공한 정조가 자신들을 궁지로 몰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0명정전.jpg 창경궁 명정문과 옥천교


그리고 정조 사후 그가 치밀하게 기획했던 일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노론과 섭정을 맡은 정순왕후의 의견 때문이었다.


사실 등극 후 정조가 정순왕후의 오빠를 죽였기에 사이가 별로 좋았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빴다는 기록은 없다. 정조도 정순왕후를 왕실 어른으로 극진히 대우했고 정순왕후 역시 정조가 하는 일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번복하듯 정순왕후는 정조가 이루어 놓은 것을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본격적으로 신유박해를 일으켜 남인을 대거 숙청하고 유배 보냈으며 규장각을 축소하고 장용영을 해체했다. 정조가 아끼고 크게 썼던 사람들인 정약용, 박지원, 김홍도, 백동수 등도 모두 내처졌다. 또한 혜경궁 홍 씨의 동생인 홍낙임 역시 신유박해로 엮어 사사시켰고 벽파의 영수 심환지는 영의정에 올랐다.


이 사실을 보면 정순왕후는 겉으로는 정조와 사이좋은 척했으나 속으로는 칼을 갈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끝내 정조의 독살을 입증할 직접적인 사료나 과학적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록은 자연사를 말하는데, 사람들은 왜 계속 독살을 상상하는 것일까? 이점이 바로 정조 독살설이 번져나가는 이유다.


KakaoTalk_20260403_190937410_21.jpg 창경궁 옥천교 부근(4월 3일)


사실 <조선왕조실록> 기록을 보면 정조의 죽음은 극적이지 않다. 독이 퍼지는 장면도, 음모가 드러나는 순간도 없다. 그저 반복되는 진료와 악화, 그리고 끝내 회복되지 못한 경과뿐이다.


이처럼 담담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기록은 오히려 질문을 남긴다. 이 죽음은 정말로 기록된 그대로의 죽음이 맞는 걸까? 기록이 끝내 담아내지 못한 또 다른 진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정조의 병세는 더디게, 그러나 분명하게 악화되고, 어의들의 처방과 논의가 이어지며, 임금의 상태는 점점 회복의 가능성에서 멀어졌다. 그 기록은 지나치게 성실해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너무도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사실이 또 다른 의혹을 갖게 한다는 논리다.


과연 기록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지 그것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정조가 독살되었음을 호기롭게 쓴 이인화의 역사 소설 <영원한 제국>이 심환지의 편지로 인해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앞으로 어떤 자료가 튀어나와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줄지 모른다. 바로 이러한 점이 역사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과연 정조의 죽음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하다. 물론 호기심은 어디까지나 기록 밖의 이야기다.


-다음 화에 계속-


*참고문한*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홍제전서(弘齋全書)>

<승정원일기>

궁능유적본부

국가유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