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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크리스마스

12월 24일의 라벤더

by 미지수

너는 말했다.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만은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그리고 너는 지금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너의 온몸을 던져 나의 전부를 막아내었고, 너의 모든 것이 부서질지 언정, 나의 실오라기 하나 부서지지 않게 지켜내었다. 처음엔 그런 네가 퍽 미련 맞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며 상대를 지켜가는 그런 바보 같은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늘 해사하게 웃으며 나의 곁을 지켜주었고, 이내 너는 나에게 있어 없어선 안 될 존재가 되어 있었다. 처음엔 부정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아이가 나의 전부가 되었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러나 너의 진심은 나의 진심에 닿지 못했다. 하다못해 학교에서 마주쳐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너의 모습을 볼 때도, 비를 다 맞고 교실에 온 네 모습을 볼 때도, 나의 심장은 너를 향해 뛰고 있었다.

"뭐 해, 안 가고?"

집으로 가는 작은 골목길. 네가 나의 등 뒤에서 물었다. 나는 픽 웃으며 네 머리 위에 나의 팔을 얹었고, 너는 빽 소리를 지르며 나의 팔을 치웠더란다. 너와 닿는 그 감촉이 이리도 따뜻하단 걸 처음 안 순간이었다. 하굣길에도, 등굣길에도, 계속해서 너의 감촉이 너무나도 따스하게만 느껴졌다. 체육 시간, 짝피구를 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나는 당연하단 듯 너를 끌었고 그제야 너의 벌게진 얼굴을 마주했다. 풋, 새어 나오는 웃음을 뒤로하고 체육시간을 너와 보냈단다. 급식실에서 밥을 먹을 때에도 네가 좋아하는 돈가스가 나오자 슬쩍 내 몫을 너에게 얹어주었다. 너는 부끄러운지 소리를 지르면서도 싫다는 말을 입에 담지 못했다. 아니, 담지 않았다. 나는 마냥 좋았다. 쑥스러워하는 네 모습이,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진 네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만 보였다. 그리고 그건 내가 이별을 말했을 때조차 여전한 사실이었다.

할 말이 있다는 나의 말에 너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너를 만나러 꽃집에 들렀다. 꽃집에 들러 한 송이의 라벤더를 나의 손에 들었다. 네가 좋아하던 수국도, 내가 예뻐하던 장미도 아니었다. 그저 한 송이의 수수한 라벤더였다.

"일찍 왔네? 안 추웠어?"

저 멀리서부터 나를 보고 뛰어온 네가 숨을 고르고 한 첫 말이었다. 그 순간 나의 숨이 턱 막혔다. 앞으로의 너의 미래가 잠시나마 나의 눈앞에 그려져서일까, 나는 아무런 말 없이 꽃을 내밀었다. 너는 그 별 볼일 없는 꽃이 뭐가 그리도 좋은지 헤헤 웃으며 받아 들었다. 그런 너의 모습이 왜 그리도 바보 같은지, 왜 그리도 예쁜지는 알 수 없었다.

"할 말 있다며, 뭔데?"

너의 물음에 나는 할 말을 멈추었다. 발걸음이 멈춘 것도, 머릿속이 새햐얗게 변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려던 말이 입에 찐득하게 붙어버릴 뿐이었다. 그래도 말해야 했다. 너는 나의 모든 것을 너의 마지막까지 지켜내겠다고 했으니까.

"우리 그만 만나자."

그 순간의 너의 표정은 안 봐도 뻔했다. 너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왜?"

왜라는 질문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흘러내리는 네 눈물을 닦아줄 뿐, 내 손을 쳐내는 너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너는 가장 아픈 곳을 찔린 사람처럼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 전한 라벤더는 네 눈물 아래에서 풋풋하게 빛나고 있을 뿐, 너에게 별 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 듯했다. 생각을 거듭하고, 내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이젠 너에게 진심이 아닌가 봐."

이어진 나의 말에 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내가 내밀었던 라벤더의 끝을 만지작 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끝을 전하고 너와 내가 돌아서야 할 시간이 되었다.

나에게도 너무나 야속했다. 이 시간이, 네 눈물이 너무나도 야속해 견딜 수 없었다. 그럼에도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존재했다. 무수히 많고 많은 말 중에 고르고 골라 너에게 전해야 하는 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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