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수의 연재소설
0. 가설
"아, 아. 들리나 오버."
시간도, 장소도, 당장 눈앞에 보이는 광경도 알 수 없었던 탓일까. 한 줄기의 빛처럼 내려온 너의 목소리가 왜 그리도 아름답게 들렸을까. 시공간을 추락 중인 나와 그런 나를 붙잡는 너의 경계가 아스라이 부서졌다.
"들리고 자시고 간에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말은 딱딱하게 했지만 정작 나에게 남은 시간이라곤 그저 빈약한 숫자에 불과했다. 그 빈약한 숫자에 나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이 상당히 아니꼬웠지만 이제 와서 어찌하랴.
"무슨 말이야, 지금?"
"내 말 잘 들어. 지금 나에겐 시간이 얼마 없어. 길면 5분 13초, 짧으면 3분 몇 초. 근데 그마저도 지금 너한테 쓰고 있는 거니까 내 말 끊지 말고 들어."
지금 나의 말이 너에겐 어떻게 들려올까. 슬프고도 아름다운 절규처럼 들릴까, 절벽에 내몰린 아우성처럼 들릴까. 그러나 이젠 아무 소용없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3분 그 언저리. 그 시간 안에 너에게 모든 걸 말해야 하니까.
"내가 데이터 몇 개 보내놨어. 네 성격 상 지금 확인할 것 같진 않으니까 말할게. 그 데이터 잘 보관해 놓고, 3분 뒤에 말해. 네 가설이 옳았다고. 네가 이겼다고."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내 말 끊지 마. 내가 데이터 보냈고,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조금만 더 연구하면 네가 세운 가설이 성립한다고. 네가 십칠 년 동안 지긋지긋하게 매달린 그 가설만이 성립된다고. 알아들어?"
"그딴 게 중요해, 지금? 네 위치 조회했어. 그러니까 잠깐..."
"야, 백이연."
이 와중에도 나를 살리겠다고 노력하는 너의 모습이 왜 이리 서글펐을까. 이젠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란 걸, 어떻게 해야 너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닥치고 들어."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잠시만..."
"잠시만은 필요 없어. 사랑해, 백이연."
너에게 사랑을 말 한 순간부터 10초, 내 목숨이 달린 시간이었다. 그 후에는 너무나도 아득해진 너의 목소리가, 아마 안된다고 외치고 있었겠지. 그래도 좋았다. 너의 십칠 년을 이뤄냈으니까.
비록 나의 삶이 져버린다고 해도, 너의 열일곱 해를 이뤄낸 거니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했다.
1. 닮음
"이연 선배!"
여느 추운 겨울날. 그녀는 자신의 귀에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연화와 새로 얼굴을 보이는 아이가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아이를 본 순간 그대로 얼어버렸다. 전에 보았던 너와 너무 닮아서, 그녀의 십칠 년을 증명해 버린 너와 너무 닮아서. 그녀는 그 야속한 시간을 그저 흘러가게 두었을 뿐인데도 네가 다시 온 것만 같아서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 그 아이를 쳐다만 보았더란다.
"인사해. 새로 온 네 직속 후배."
직속 후배라는 말에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세 사람 사이의 여백을 채웠고,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가 이젠 후배 안 받겠다고 했을 텐데."
"야, 네가 하는 연구가 보통 연구야? 적어도 한 명 정도는 필요했으면서."
연화가 말했다. 백연화, 그녀는 이연의 오랜 동료였으며 그녀의 사정을 모두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몇 해 전의 아픔조차도 그녀는 잘 알고 있었으니, 어쩌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제일 잘 알고 있을 사람이었다.
"됐어. 필요 없어."
말을 마친 그녀는 휑하니 자신의 연구실로 가 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은 그 무엇보다 덤덤해 보였지만 왜일까, 어깨가 그리도 무거워 보이는 까닭이. 아마, 누군가 부족한 탓이겠지.
연화는 후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건들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쟤는 꼭 저래. 내가 자기 속을 모를까."
"저,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당연히 되고말고. 얼른 들어가서 쟤 좀 도와줘."
그럼에도 후배는 들어가길 망설였다. 이미 그녀의 공백이 너무나도 가득히 차 있던 탓이었을까, 사람을 받지 않겠다던 그녀의 말 때문이었을까. 연화가 비로소 후배를 밀어 넣은 뒤에야 후배는 연구실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