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위한다는 말이 가장 나를 힘들게 할 때
왜 나는 또 설명해야 하는 사람인가
남편은 악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놀라울 만큼 눈치가 없다.
그는 아침 8시 20분에 나가서 밤 8시 30분에 들어온다. 나는 아침 9시에 아이를 등원시키고, 저녁 7시에 퇴근한다. 그 사이의 공백과 저녁의 모든 일상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된다.
아이들은 엄마가 오기 전까지 밥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퇴근하자마자 일한 사람의 얼굴로, 다시 엄마의 역할을 시작한다.
그런데 남편은 말한다.
“이제 우리 엄마 퇴직했으니까 아이들을 우리 엄마가 와서 봐주시는 건 어떨까?”
말은 부드럽다. 아이를 위하는 선택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 문장 안에는 중요한 게 빠져 있다.
그 선택으로 하루를 살아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름방학에 일주일, 이미 한 번 경험해봤다.
상주 돌봄이라는 말이 얼마나 다른 의미를 갖는지.
퇴근하면 아이를 케어한 사람은 여전히 나였다.
대신 달라진 건, 어머님의 하루 일과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야 하는 저녁 시간이었다.
주말엔 쉬는 날이 아니었다. 모셔야 했고, 외식해야 했고, 나들이를 해야 했다.
아이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함께 있는 어른’을 위한 시간이 늘어났다. 그 일주일 동안 깨달았다.
상주는 돌봄이 아니라 관계 관리의 밀도를 극단적으로 높이는 선택이라는 걸.
솔직히 말하면, 차라리 어머님이 반찬이라도 하실 줄 아시거나 저녁 한 끼라도 대신 해결해주셨다면
나는 상주를 ‘거래’처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상주를 해도 내 하루는 가벼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설명과 더 많은 눈치와 더 많은 정서 노동이 추가된다.
그런데도 남편은 묻는다.
“그래도 아이한테는 좋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나는 화가 난다.
단순히 의견이 달라서가 아니다.
이미 말했고, 이미 겪었고, 이미 증명된 이야기를
왜 또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나인지 이해가 안 되기 때문이다.
남편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어머님의 상주로 인해 일상을 잃지 않는다.
나는 회복할 공간을 잃는다.
그래서 이건 효도의 문제가 아니고,
아이 사랑의 문제가 아니다.
지속 가능한 삶의 구조에 대한 문제다.
이제는 말하려고 한다.
설명 말고, 설득 말고.
“나는 이미 해봤고, 그 방식은 나에게 맞지 않아.”
“이건 도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버틸 수 있느냐의 문제야.”
눈치 없는 사람 옆에서
눈치 보며 살아온 시간이 길수록
사람은 더 빨리 닳는다.
그래서 오늘은,
눈치를 요구하지 않기로 했다.
내 삶의 무게를, 더 이상 증명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