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대신 애써줘서 고맙다”

라는 말이 왜 이렇게 얄미웠을까?

by 혼자서도 합니다만


엄마가 항암을 앞두고 있었을 때,
나는 올해 초 엄마를 모시고 가까운 곳으로 다녀왔다.
멀리도 아니고, 대단한 여행도 아니었다.
그냥 반일짜리 여행. 숨 좀 돌리자는 마음이었다.

엄마는 그 시간을 정말 좋아했다.
웃었고, 사진을 찍었고, “이런 데를 또 올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퇴근한 아빠가 엄마 옆에서 전화로 말했다.

“내 대신 애써줘서 너무 고맙다.”

이상하게도, 그 말이 고맙게 들리지 않았다.
너무 얄미웠다.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나는 실제로 애썼고,
아빠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왜 마음이 이렇게 불편했을까.

곱씹어보니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대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병원 진료를 함께 가고,

항암 일정에 맞춰 연차와 반차를 쓰고,
수술 설명을 듣고, 보호자 서명을 하고,
엄마의 감정 기복을 받아내는 일들은
누군가의 자리를 잠시 채운 일이 아니었다.

그건 내 삶의 시간을 잘라서 함께 살아낸 일이었다.

그런데 “내 대신”이라는 말은
그 시간을 대리 수행처럼 만들어버렸다.


아빠는 평일에 엄마가 입원해있을 때 전화를 잘 하지 않았다.

“말소리를 잘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였다.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픈 사람과 통화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빈자리는 늘 내가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아빠의 “고맙다”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역할 이전 확인서처럼 들렸다.


나는 못 했고
너가 했다
그래서 나는 고맙다

그 문장 뒤에는
“앞으로는 내가 할게”도,
“같이 하자”도 없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가

혹시 못된 딸은 아닐까,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이건 불효도 아니고, 이기적인 마음도 아니다.

책임이 한쪽으로 쏠렸을 때 생기는 아주 정상적인 감정이다.


사실 많은 가족 돌봄은 이렇게 굴러간다.

누군가는 빠지고,
가장 책임감 있는 사람이 대신 들어간다.
그리고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이렇게 묻게 된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왜 자꾸 내가 해야 하지?”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빠질 수가 없네.”
“이러다 나부터 무너지는 거 아니야?”

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면,
그건 이미 너무 많이 해왔다는 증거다.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그래서 병원에도 간다.
그래서 시간을 낸다.

다만 이제는 안다.

내가 무너져서까지 하는 돌봄은 효도가 아니라는 걸.

그리고 “내 대신 애써줘서 고맙다”라는 말이
왜 그렇게 얄미웠는지도.

그 말이 고마워서가 아니라,
그 말로 모든 책임이 정리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나처럼 이 문장 앞에서 마음이 불편했다면,

그건 당신이 냉정해서가 아니라
너무 오래 혼자 버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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