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자 명단에 내 가족 이름이

관행을 바꾸자(1)

by 가을하늘

2019년 5월 29일 헝가리에서 한국인 승객 30여 명이 탄 유람선이 침몰해 27명이 사망한 사고 때의 일이다.

30일 아침 이 소식이 들어오자 각 방송사들이 앞다투어 뉴스특보를 열고 관련 소식을 전했다. 외교부나 청와대, 해당 여행사 등에 중계차와 취재진이 바삐 기사와 정보를 보내오고, 스튜디오 안에서는 앵커와 출연 기자가 계속 뉴스특보 방송을 진행했다. 특보를 시작한 지 얼마쯤 지났을까. 사망자의 명단이 입수돼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부 사건팀장과 담당 기자는 별생각 없이 서둘러 이를 보도하려고 해당 기자에게 자막으로 작성해 리포트 제작에 넣으려 했다. 그런데, 잠시 후 이를 알게 된 보도국장이 황급히 사회부 쪽으로 달려와서 소리쳤다.

“사망자 이름 화면에 표출시키면 안 돼! 생각해 봐! TV화면에 사망자 명단에 내 가족의 이름이 있는 걸 보면 그 충격이 얼마나 클지 말이야!”

보도국장의 외침 뒤, 잠시 멀뚱히 있던 사회부 기자들과 데스크는 그때부터 사망자 명단을 원고에서 지우고 방송에 내지 않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전만 해도, 큰 사고가 났을 때 사망자의 명단이 입수되면 으레 이를 화면에 표출시키고, 기자들이 사망자 명단을 일일이 낭독까지 하는 게 관행이었다. 2014년 2월 18일 경주 리조트 붕괴 사고로 때까지만 해도 TV화면에 큰 자막으로 사망자의 실명을 노출시켰다.

그런데, 그 해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사고 당사자와 이재민과 유족들이 받게 될 충격과 2차 피해 가능성 지적이 잇따르면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 뒤 2014년 9월에 ‘재난보도준칙’이 만들어졌다. 한국기자협회 등 5개 언론단체가 함께 만들었다. 여기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제18조(피해자 보호) 취재 보도 과정에서 사망자와 부상자 등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나 희망사항을 존중하고, 그들의 명예나 사생활, 심리적 안정 등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제19조(신상공개 주의)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 사람들의 상세한 신상 공개는 인격권이나 초상권, 사생활 침해 등의 우려가 있으므로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제20조(피해자 인터뷰)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사람들에게 인터뷰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인터뷰를 원치 않을 경우에는 그 의사를 존중해야 하며 비밀 촬영이나 녹음 등은 하지 않는다. 인터뷰에 응한다 할지라도 질문 내용과 질문 방법, 인터뷰 시간 등을 세심하게 배려해 피해자의 심리적 육체적 안정을 해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듬해 KBS도 자체적으로 ‘재난보도준칙’을 만들었다. 여기에도 유사한 내용이 적혔다.


10) 피해자 배려와 인권 보호

(1) 취재 보도 과정에서 사망자와 부상자 등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나 희망 사항을

존중하고, 피해자의 명예나 사생활, 심리적 안정 등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2) 피해자의 가족이 피해자의 부상·사망 또는 실종 등의 사실을 알기 이전에 피해자의 인적 사항을 보도하지

않는다.

(3) 피해자와 그 가족, 주변 사람들의 상세한 신상 공개는 인격권이나 초상권, 사생활 침해 등의 우려가

있으므로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


위 언론 5 단체의 재난보도준칙이나 KBS의 재난보도준칙에서 ‘사망자의 명단을 써서는 안 된다’는 명시적 조항은 없지만, 포괄적으로 해석해 보면 사망자의 명단을 TV에 공개하는 것은 피해자와 그 가족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것일 수 있다. 특히 피해자 가족이 피해자의 사망, 또는 실종 사실을 관계당국으로부터 통보받기 이전에, 가족들 모두의 동의를 얻기 전에 성급히 사망자 명단을 TV에 싣는 건 피해자와 그 가족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이고, 심지어 엄청난 충격을 줄 수 있다.

2015년 KBS 재난보도준칙이 만들어진 뒤로 한동안, 몇 년간은 적어도 뉴스특보에서는 사망자를 실명으로 방송에 내는 일이 점점 사라졌다.

그러나, 4년이 흘러 2019년이 되자, 그사이 많은 기자들이 준칙을 잊었다. 데스크들도 까먹었다. 큰 사고와 재난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로 자주 일어나지 않으니, 잊어버리기 십상이었고, 또다시 과거의 관행대로 재난방송을 한다. 선배 기자들도 재난보도준칙이나 피해자 배려, 인권보호 따위를 후배에게 가르치는 것에 게을러지고, 새로 들어오는 기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도제식 시스템 속에서 낡은 관행을 답습한다.

세월호 참사 후 뼈저린 반성으로 만든 <재난보도준칙> 책자는 5년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책이 되어 사무실 어딘가에 굴러다니고, 기자와 데스크는 세월호 참사 이전의 관행이 다시 살아나 기사와 보도, 특보 곳곳에 옛 관행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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