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행을 바꾸자(2)
2023년 3월 5일 심야에 인천 송림동 현대시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 당국이 대응 2단계를 내린 정도의 큰 불이었다. 진화 작업 2시간여 만에 불은 꺼졌다. 각 사는 아침뉴스에 화재 소식을 리포트로 전했다. 각 리포트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KBS : 시뻘건 불길이 시장을 뒤덮습니다. 불길과 함께 검은 연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MBC : 시뻘건 화염이 검은 연기와 함께 쉴 새 없이 치솟습니다.
SBS : 컴컴한 시장 한가운데에서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습니다.
YTN : 시장 건물 안에서 가스 터지는 소리와 함께 시뻘건 불길이 치솟습니다.
도대체 화재 리포트를 할 때 ‘시뻘건’이란 단어는 언제까지 쓸 건가. 왜 저 단어를 버릴 용기가 없는가. 화재나 사고 리포트의 도입부에 스케치 문장을 쓰는 건 심각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위해 불가피한 면이 있긴 하다. 그렇다고 위와 같은 ‘불구경’만 시켜주는 상투적 문구 사용은 낡디 낡은 관행이다. 1분 30초의 짧은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방대한 취재 내용을 농축해 한 문장 한 문장을 쓰는 마당에, 저런 ‘시뻘건’ 류의 정보값 하나 없는 단어가 웬 말인가.
교통사고 기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상투적 문구가 있다. ‘자동차가 종잇장처럼 구겨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따위의 문구다.
누구는 저런 억센 표현들이 뉴스에 나오면 시청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 않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선정적이고 격한 표현으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모든 방송사가 수십 년간 한결같이 저런 표현을 쓰고 있으니 답답하다.
‘시뻘건 불길’로 시작하는 첫 문장은 날리고 두 번째 문장부터 살려도 리포트 내용을 전달하고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두 번째 문장부터 정보가 담겨 있으니 주저 없이 두 번째 문장부터 쓰자. 데스크는 후배 기사를 고쳐줄 때 ‘시뻘건 불길’로 첫 문장을 써 왔다면, 가차 없이 삭제하기 바란다. 그 뒤에 있는 두 번째 문장이 좀 어색하다면, 거기서부터 다듬어주기 바란다.
또 한 가지 상투적 문장. “소방관들이 연신 물을 뿌려보지만,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또는 역부족입니다).”류의 ‘진화작업 폄하성’ 문장이다. 이 말도 방송사를 불문하고 화재 리포트에서 단골로 등장한다. 이 문장의 메시지는 도대체 무언가. 불의 위력? 인간의 미약함? 도무지 지향점을 알 수 없는 괴문장이다. 생명을 구하기 위해 화마에 맞서는 소방관들의 숭고한 사투를 ‘뿌려본다’라는 말로 ‘나약하고 소심한 행동’으로 평가 절하하는 듯하다.
당연히 화재 초기에 소방관들이 물을 뿌린다 해서 모든 불이 금방 꺼지진 않는다. 시간이 필요하고, 인력과 작전이 필요하다. 그 황급한 와중에 몸을 던져 그 일을 수행하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애써 이런 노력을 하찮게 깎아내리는 멘트를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기원조차 알 수 없으나, 화재 리포트 문장 작성 때마다 이 관행을 정성스럽게 답습한다. 제발 걷어치우자.
이 문제를 좀 더 확장해 보면, 재난방송과 뉴스의 주제와 콘텐츠 형식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져야 함에도, 아직도 현장 기자들의 행태는 관행에 의존하고 있고, 여전히 ‘배운 대로 만드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다.
언론은 상황과 목적에 맞는 내용을 간명하고 직접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공중이 과도한 불안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고, 적정한 수준의 위험 인식을 형성함으로써 재난에 보다 더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런 주관적 평가나 극화된 표현을 습관적으로 따라 하는 것은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고 적정하게 전달하지 못하여 왜곡을 만들어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