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랫은 안 쓰고 싶었는데
내 밴드 인생에서 펜더 스트랫을 쓸 생각이나 예정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감을 가질만한 요소가 한둘이 아니었다.
- 너무 대표적인 일렉기타 생김새이기도 하고,
- 소리는 어딘가 맹꽁하게 텅 비었는데 소리는 엄청 쏘고,
- 사용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사실 이때 홍대병 말기였다)
아직 사용도 해본 적도 없는 펜더 스트랫과 비교하면, 깁슨 레스폴은 약 7년의 세월 동안 공연과 녹음 모두 만족할 만한 사운드를 들려주었고 나에게는 절대적인 신앙과도 같았다. 앰프를 꽂지 않고 연주해도 확실히 느껴지는 뜨끈한 울림, 남자다운 화끈한 사운드, 픽업셀렉터로 곡의 적재적소에 사용하기 쉬운 조작성, 자주 부러지는 목(?), 무엇보다 압도적으로 잘생긴 이 기타를 대체할 기타 따윈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내던 와중,
”난 네가 스트랫을 좀 써봤으면 좋겠어. 아, 로즈우드 지판으로다가.“
지방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어느 날이었다.
봉고 안에서 베이스 행님이 담배 한 대를 쓱 피우며 갑작스러운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지만 분하게도 당장 ‘엥, 우리 레스폴쟝한테 왜 그래요’ 같은 반문이 나오지 않는다.
“62요? 저는 굳이 쓴다면 57쪽이...”
그 와중에 밸도 없이 장비얘기는 못 참고 어이없게 취향을 내뱉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급기야 그는 나에게 말했다.
“네 묘비에 쓸 거야. “ 오늘따라 워딩이 자극적이다.
“‘스트랫 좀 써줘’라고 말이야.”
베이스 행님은 사운드에 있어 밴드의 앙상블적인 면을 더 생각하는 사람으로, 야생스럽고 마초적인 개성 있는 사운드보다 깔끔한 사운드를 좀 더 선호한다. 평소 악기에 대해 딱히 별말이 없던 그가 나의 고집스러운 악기철학에 진심 어린 간청을 한 것이다.
그렇게 예정에도 없는 기타 구매계획이 생겨버렸다. 그간 써온 기타에 대한 별다른 칭찬의 말도 없이 다른 기타를 써보는 건 어떻겠냐니. 너무 분했지만, 찰나의 실망감은 금세 사라지고야 만다.
'잠깐, 이건 럭키비키잖아...?'
새로운 악기를 하나 구매할 것이라는 기대감에 도파민은 멈출 줄 모르고 뇌 속에서 꿀렁였다.
아니, 한 대 더 살 수 있다니까?
밴드를 위해 스트랫은 사지만, 나의 사심까지 채울 수 있는 완벽하고 합리적인 지출 플랜이 생긴 것이다. 난 어쩔 수 없이 스트랫을 써야 하는 운명이라며 일말의 죄책감 없이 슬쩍 자위했다. 무엇보다 뮬저씨 평생 숙원인 ‘좌깁우펜’ 콜렉션 완성이 목전에 있다.
이제는 어느덧 정보화 시대. 이제 목표는 정해졌고, 집에 돌아가 인터넷에 적당한 가격의 중고 기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건 '뮬질'이라고 하는 것으로, 내가 이 지구 위에 살면서 가장 행복함을 느끼는 소일거리 중 하나다. 종종 예쁜 기타가 있으면 ‘음 당장 내가 살건 절대 아니고’ 따위의 운을 먼저 띄우면서 여자친구에게 어떠냐고 보여주곤 한다. 디자인과를 전공한 여자친구의 취향은 제법 괴팍하리만치 확고한 편이어서 나는 그녀의 안목을 제법 신뢰한다.
그녀가 물건을 볼 때 유독 싫어하는 색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3톤 썬버스트. 구옥 빌라에서 흔히 보이는 체리몰딩 같다고… 3톤 썬버스트로 도장된 악기에게 인격이 있다면 내 여자친구가 울린 악기들이 제법 많을 것이다. 그녀의 눈에 못생긴 것은 존재 가치가 없다.
참고로 내 여자친구는 에릭클랩튼을 정말 좋아한다.
그래서 그런지, 새로운 스트랫이 하나 필요하다고 여자친구에게 이야기를 하니, 나는 생각지도 못한 메루카리에 올라온 토리노 레드 색상의 새끈한 에릭클랩튼 시그니쳐 기타(블랙키)를 먼저 소개해 주기도 했다.
요즘같이 폴피스가 드러난 못생긴 노이즈리스가 아닌, 이렇게 레이스센서가 박힌 구형 시그니처. 하지만 운송료까지 생각하니 너무 비싸서(200만 원짜리 기타가 한국에 오면 260만 원이 된다;) 결국 포기했다. 여자친구도 못내 아쉬워했다.
사실 온라인으로 깔짝이는 아이쇼핑도 좋지만, 직접 쳐봐야 그 기타의 소리를 알 수 있는 법.
우선 피에스타 레드나 다코타 레드만 알던 내게 토리노 레드라는 색이 너무 매력적이었으므로, 57 타입이든 62 타입이든 신경 쓰지 않게 되어버렸다. 색만 이쁘면 된다는 생각에 국내 중고악기샵까지 뒤졌고, 04년식의 예쁜 토리노레드 색의 62 타입 일제 펜더 스트랫을 발견했다. 이거다! 싶어서 바로 예약을 걸고 며칠 뒤 퇴근하자마자 중고기타 매장을 방문했다.
우리 벌건 이쁜이는 어디 진열되어 있나 하고 가게에서 기타를 찾던 중,
제법 아름다워 보이는 투톤 썬버스트 색상의 93년식
57 스트랫을 발견했다. 이것도 일제…!
나는 뭔가 운명처럼 다가온 충동감에 이 57을 먼저 시연해 보기로 했다. 57 사양이면서 V넥이 아니라는 점이 뜬금없이 웃겼다. 근본이 딱히 없는 것이 이 시절 일제 펜더의 특징이라지만, 넥쉐잎은 동양인 손에 맞게 일부러 C넥을 고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익명의 빌더의 배려심이 느껴졌다. 나중에서야 옾톡방에서 자문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이지만, 당시 93년 출시 당시 미제 하드웨어에 픽업까지 달고 나온 최고사양 일펜이었다
테스팅 앰프는 마샬 아스토리아 앰프. 그리고 베뮤람 사의 잔레이와 아날로그맨 DS-1이 시연용 페달보드에 올려져 있었다(잼페달 딜레이 사운드도 체험해보고 싶었으나, 고장이 난 상태였다).
왠지 궁합이 잘 맞을 것 같아 잔레이와 함께 스택하여 밟아봤는데, 소리의 입자감은 깁슨보다 얇지만 그 웅장함이라던가, 꺼끌대면서 주욱 찌르는 맛이 꽤 스트레이트했고 맘에 들었다. 커샵이든 MBS든 나는 펜더에 있어 문외한이지만 이 정도면 되지 않나 라는 확신이 생겼다. 급작스런 만남이었지만 훌륭한 만족감이었기에 일단 이 57은 킵을 해 놓기로 하고, 기존에 예약을 신청했던 62를 번갈아 쳐보았다. 내가 아는 미펜 62리이슈 사운드는 그래도 바짝 마른 사운드에 텅텅대면서도 로우의 푸근함은 잊지 않는 따스함이 있었는데, 이건 이쁘기만 하지 좀 실망감이 컸다. 힘도 없고, 그냥 적당히 컴핑감만 있는 맹탕이다.
그러던 중, 샵에서 새어 나오는 57의 소리를 들은 여자친구가 헐레벌떡 기타 숍으로 뛰어들어와선 이 기타의 정체를 물어보았다. 상상도 못 한 좋은 기타와의 만남에 신난 나는 번갈아가며 두 기타의 사운드를 들려주었고, 여자친구는 예약한 62보다 57의 사운드가 훨씬 낫다는 나의 의견에 격하게 동의했다. 문제는 이 기타 색이 썬버스트라 여자친구에게 또 무슨 모욕을 당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다행히 체리색이 빠진 투톤 선버스트라 너무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외관도 소리도 모두 괜찮은 기타를 잘 고른 것 같아 그냥 생각할 새도 없이 5개월 무이자 할부로 긁어버렸다. 안녕… 내 돈…
그렇게 첫 펜더 스트랫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