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문/ 임채우

『설문』

by 수인


임채우 시인님의 『설문』이란 시집에서 「설문雪門·7 」을 소개합니다.



설문雪門·7 / 임채우


지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눈의 문, 눈의 제국으로 들어가는

눈부신 백설이 법이고 진리인

그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


내가 발을 딛는 설씨卨氏 문중은

이미 훼파되어 흩어져버렸다

반농반도半農半都, 논두렁 위의 가건물

가끔 외로운 왜가리 한 마리 홰를 치고

무시로 드나들며 먼지를 뒤집어쓴 트럭과 마을버스와

낮술에 취한 사내들, 야산은 헐리어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하늘공원에서 울려 퍼지는 트럼펫 진혼곡 소리


설문은 어디에 있는가

언어와 실재가 심각하게 뒤틀리고

나는 피 흘리는 언어를 껴안는다

설문은 사시사철 눈이 펑펑 내리고

옮겨 심은 언덕배기 노송에도 눈이 내리고

세상의 온갖 추함을 덮는구나

나의 추상은 가없다


아, 언어여!

추상이여, 빛이여,

생기 잃은

아름다움이여!





설문雪門이란 언어를 들었을 때 시인은 “눈부신 백설이 법이고 진리인”관문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막상 설문에 들어서니 문중은 흩어져버리고, 외로운 왜가리 한 마리와 먼지 쓴 트럭과 마을버스를 목격하게 된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낮술에 취한 사내들, 야산은 헐리어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하늘공원에서 울려 퍼지는 트럼펫 진혼곡 소리”만이 설문을 대변하고 있다.


어쩌면 설문은 시인에게 잃어버린 고향의 어디메쯤과 비슷한 곳은 아니었을지. 아름다웠던 산수가 전원주택이란 이름으로 훼손되고, 죽은 자를 위해 울려 퍼지는 진혼곡만이 남아 시인을 쓸쓸하게 맞이해 주는 이름만 남아 생기 잃은 곳.


“언어와 실재가 심각하게 뒤틀리”는 것이 어찌 설문뿐이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듯이 언어라고 해서 뭐가 다르겠는가. 설문雪門처럼 눈부신 눈이 내려 세상의 추함을 덮고, 잠시라도 아름다움에 젖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눈이 녹고 나면 다시 드러나는 것들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다.


설문이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 문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고 우리의 생각이다. 설문은 그냥 설문일 뿐이다. 설문雪門을 읽으며 인생이 꽃피고 시드는 것처럼 진혼곡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부질없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설문이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