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시킨의 시를 되뇌는 밤

by 수인


푸시킨의 시를 되뇌는 밤입니다. 겨울밤이 길어 책꽂이의 책을 잡아 펼치는데 그곳에 푸시킨의 시 한 편이 눈을 붙듭니다. 참 오랫동안 마음에 담고 다닌 시입니다. 명언 같기도 한 시를 뜻 없이 유년의 나는 마음에 품었습니다. 푸시킨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삶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읽었는데 다시 접하니 새로운 느낌이 듭니다.

이 시를 맨 처음 발견한 것은 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시절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낡은 사진첩 속이었습니다. 햇살이 따스한 유년의 어느 겨울날 심심하여 이리저리 다니다 방 한쪽에 있는 사진첩을 펼쳐 들었습니다. 사진첩 사진에 사람 얼굴과 함께 푸시킨의 시가 써져 있었습니다. 지금은 너무 오래되어 누구의 사진이었는지 가물거리지만 아버지의 군대시절 사진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마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가슴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에 대한 시였습니다. 유년의 아이가 무엇을 알았을 리 없지만 삶이란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진즉에 본능적으로 알아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명언 같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한 이 시는 삶에 대해 달관하는 자세를 보여 줍니다.


그는 근대문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를 확립한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입니다. 물론 유년의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라면 비슷한 모양새로 사는 것이 삶이란 것을 진즉에 알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망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찾아오고, 현재의 슬픔도 시간이 지나면 소중한 것이 된다는 것을 나이 들어 느끼게 됩니다. 유년에 읽었던 푸시킨의 시를 이 겨울밤 다시 읽으며 절망의 날도 슬픔의 날도 내가 살아낸 날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돌이키게 됩니다.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다고 해도 잘 이별하지 못했던 지난날들도 소중한 나의 것이었음을 압니다.


푸시킨은 정치시나 풍자시 때문에 남러시아로 추방당하기도 하고 편지 한 통이 원인이 되어 유배의 삶을 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유배 중에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모스크바로 귀환을 하지만 글을 검열당하고 개인적 자유까지 제약을 받게 됩니다. 경찰로부터 감시도 받게 됩니다. 나중에 관직에 등용되어 사직하고 싶어 했지만 거부당하고 그를 미워하는 세력가들이 꾸민 음모에 결투를 하다 치명상을 입고 죽고 맙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의 시처럼 그의 삶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처럼 그 또한 삶을 살아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푸시킨은 한때 유배 생활을 하면서 우리 인간의 삶과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시간을 가졌을 겁니다. 푸시킨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모스크바 광장에서 눈먼 걸인이 구걸을 하고 있는데 그 역시 가난한 형편이라 도움을 주지 못하고 글씨 몇 자를 써 주었다고 합니다. 며칠 후 친구와 함께 그 광장에 갔는데 걸인이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와서 감사의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찬구가 궁금하여 그날 써준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별거 아니라고 하면서 “겨울이 왔으니 봄도 멀지 않으리!“라고 써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걸인이 지닌 글을 보고 ”지금은 비록 힘든 날을 보내고 있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니, 봄을 기다리는 이 사람은 도와줄 필요가 있다.“라고 내일의 희망을 읽었을 겁니다.


새날이 밝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우리는 또다시 어려운 시간을 살아내야 합니다. 푸시킨의 시처럼 그 삶이란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다시 힘을 내야 합니다. 지난 한 해 힘들게 버텨온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밤 문득 푸시킨의 시가 내게 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 조금은 위로해 주고 싶은 따스한 손길 같은 것은 아닐지. 문득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행복의 순간도 시간이 흐르면 사라집니다. 나이 들면서 마음의 고요를 위해 평안을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가슴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이라는 푸시킨의 시처럼 현재는 힘들고 고달픈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래에 사는 마음 하나 가지고 느리고 어설프지만 천천히 걸어가려고 합니다.


헤아릴 수 없이 무량한 시간을 건너왔지만 다시 그만큼 건너가야 합니다.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 오늘을 살아내다 보면 따스한 봄날이 올 겁니다. 이 겨울밤 나의 기도는 인생 고해에서 벗어나길 두 손 모아 발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