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를 켠다는 섬(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 작품)
슬도(瑟島), 묵상
거문고를 켠다는 섬 슬도(瑟島), 새벽 돋을_볕을 맞이하며 설레는 가슴을 품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네 시간여를 달렸다. 저기 풍문의 주인공 슬도(瑟島)가 손짓하는 듯하다. 슬도를 향해 다리를 건너며 조심스럽게 속세의 귀를 씻는다. 붉은 꽃망울처럼 부풀었던 마음을 활짝 펼친다. 슬도는 무심하게 이방인인 듯 맞이한다. 나는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일 뿐일까. 바위에 부딪히는 하얀 포말이 잔잔하게 부서지며 은빛으로 사그라지기를 되풀이한다.
등대를 품은 슬도의 갯바위에 살며시 몸을 앉힌다. 바다는 속을 다 보이고 하얗게 까르르 목젖을 드러낸다. 그 풍경이 감춰진 듯 투명하여 눈이 부시게 아름답다. 순간 시원한 바람이 몸을 감싸며 돌고 나는 가만히 몸을 맡긴다. 파도 소리가 구슬퍼질까 두려워지는 순간, 바람은 오던 길을 바꾸며 저 멀리 잽싸게 달아난다. 속세에서 온 내게 그 귀한 슬도의 소리를 아직은 들려줄 시간이 아닌 모양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아침부터 달려온 시간을 가만히 내려놓는다.
등대가 서 있는 난간 위 계단을 오른다. 바람은 시원하고 주위의 풍경이 아름답게 빛난다. 슬도교위, 새끼 업은 고래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새끼를 보호하려는 어미의 마음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입체적인 고래의 동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미를 보호해야 할 나이가 되어도 나는 제구실 못 하는 새끼처럼 산 것 같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채 살아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게 된다. 햇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슬도의 잔물결에 눈이 부시다.
등대를 감싸고 빙빙 돌아 본다. 두 팔을 벌려 슬슬 움직이는데 등대가 나를 감싸는 듯 따뜻하다. 얼마나 오래 등대는 여기 있었을까? 홀로 슬도를 지키며 어떤 세월을 보냈을까? 궁금하여 자료를 찾아보니 1950년대 말 세워졌다고 한다. 사람의 나이로 따지면 이순을 훌쩍 넘겼으리라는 추측이 간다. 등대는 이곳에 서서 무수히 오가는 배들의 어두운 밤길을 안내하였으리라. 등대는 무엇을 묻고 무엇에 답하며 긴 밤을 지새웠을까. 위험한 항로를 비추어 가며 견뎌 온 등대의 길이 있었기에 뭇사람들은 섬에 대한 환상을 키워 가는 것이리라.
슬도는 방어진항으로 들어가는 거센 파도를 막아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해 주는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오랫동안 아무런 불평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등대 하나만을 오롯이 품은 섬이다. 섬 가운데 다시 우뚝 솟아올라 또 다른 섬이 된 등대. 등대는 고집스럽게 홀로 슬도를 지켰으리라. 그 세월이 아득하다. 어떻게 슬도를 지켜 냈느냐고 등대에 물으니 바람으로 대답한다. 그냥 말없이 슬도 곁에 머물렀을 뿐이라고, 곁에 있었을 뿐이라고.
슬도의 몸피가 곰보투성이로 구멍이 뚫려 엉성하다. 활로 거문고 현을 마찰시켜 소리를 내듯 지난한 시간 파도를 불렀으리라. 제 몸에 구멍을 뚫는 고통 속에서 속울음만 깊어졌을 것이다. 그사이 조금씩 바람과 친해지고 조용히 파도를 불러일으키며 거문고를 켜는 법을 익혔으리라. 홀로 서 있는 등대가 외롭지 않도록 언제부턴가 거문고의 현을 무시로 뜯었으리라. 함께한 등대를 위해 거문고의 연주법과 조현법을 익히며 물결 같은 파동에 사르르 녹아들며 화답했으리라. 덧없이 가는 세월에 아쉬움이 한없이 깊어져도 그렇게 견뎌 냈으리라.
곰보투성이 슬도의 몸피를 보고 있으니 주름살이 깊게 파인 엄마의 얼굴과 거북손이 오버랩 된다. 홀시어머니에 시아주버니와 시동생만 다섯인 가난한 아버지의 나라로 꽃다운 스무 살에 엄마는 시집을 왔다. 아득한 세월을 뒤로한 시간만큼 이제는 꼿꼿했던 등이 굽어 버렸다. 겨우 허리에 손을 얹으며 등을 펴지만 세월을 이길 수는 없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 산골짜기 깡촌에서 농사일에 찌들어 어렵게 살아왔다. 어쩌다 도시로 나가는 길은 늘 험난한 파도에 휩쓸리듯 어려운 고갯길이었다. 살아 내어도 별반 나아질 것 없는 살림살이에 여섯 자식까지 입히고 키우느라 자신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안으로 곪아 지탱할 힘을 잃어버린 몸은 속이 텅 빈 나무처럼 폐허가 되었는지 자꾸만 아래를 향하고 어느새 하심에 드는 법을 터득한 것 같다.
뜨거운 여름날 붉은 화기에 화상을 입는 일처럼 온몸이 녹아들어 가는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새끼 업은 고래처럼 삶의 무게에 짓눌려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세파에 시달리는 자식들이 안쓰러워 방패가 되어 준 삶이었다. 산수(傘壽)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는데도 고집스럽게 아버지의 나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진두지휘하고 있다. 마치 홀로 슬도를 지키는 등대처럼 이제는 자식들도 떠나 버린 빈자리를 곡진하게 지켜 내고 있다.
이제 아버지의 나라에는 아버지뿐, 모두 각자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대신 세상으로 나가는 길 하나 남겨 두지 않은 채 아버지는 혼자만의 세계로 조금씩 빠져드는 중이다. 선비처럼 꼿꼿했던 모든 순간이 거짓말처럼 찰나로 사라지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소리는 아버지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또 다른 울음소리일 뿐이다. 텔레비전조차 켜지 않는 아버지는 묵상의 힘을 터득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아버지의 세계에 다가갈 수 없고 오직 엄마만이 그 곁에 머물러 있다. 이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몰라 전전긍긍하느라 엄마의 속울음만 슬도의 바다처럼 깊어지고 있다.
슬도에는 등대뿐이듯 아버지한테는 엄마만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느그 엄마 시집와서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야.”라고 무심코 말을 뱉어 내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하지만 그때뿐 자신의 기억에 갇힌 아버지의 요구 사항은 더 미묘해지고 있다. 그 자리를 고집스럽게 홀로 지켜 내는 엄마에게 우리는 무늬만 어른이 되어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오랜 세월 엄마만의 방식에 젖은 아버지, 누구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가 없게 되었다. 가끔 우리는 갈매기처럼 날아들어 세파에 울먹이며 잠시 쉬어 가는 속물이 되었을 뿐이다.
멀리 뱃고동 소리에 정신이 돌아온다. 이 작은 섬 슬도를 뒤로 하고 등대를 내려오는데 갈매기 한 쌍이 이별의 노래 한 곡조 구슬프게 뽑는다. 문득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고 노래했던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 서두가 생각난다. 이 슬도가 뭇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등대가 있기 때문이리라. 홀로 외롭게 지켜 내는 등대, 등대를 위해 기꺼이 거문고를 켤 줄 아는 슬도, 곁에서 서로를 말없이 지켜 주고 있다.
슬도가 붉은 노을에 찬란히 물든다. 또 이렇게 하루가 저문다. 문득 어디선가 왜바람이 스치고 파도가 일더니 홀린 듯 거문고를 켜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온다. 온몸에 아련하게 전율이 일고 돌아보니 애틋한 마음을 흔드는 슬도와 등대뿐이다. 거문고 연주를 듣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의 환청이었을까. 객을 붙들어 보는 슬도명파(瑟島鳴波)의 노래였을까. 수평선이 아득히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