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도 생명이다 (202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선정 작품)
생명 사유
태양이 잉걸불처럼 내리쬔다. 할머니 몇 분이 그늘도 없는 노상에 다붓다붓 앉아 농산물을 팔고 있다. 고만고만한 것들 사이로 고무 대야에 담겨 언뜻 비치는 복숭아가 손짓한다. 가까이 가서 연분홍빛 복숭아를 보니 입맛이 돈다. 복숭아를 보면 몸이 가렵긴 해도 관심이 간다. 노상 어디쯤에 엄마가 붙박이로 쪼그리고 앉아 있을 것만 같아서다.
엄마에게도 연분홍 복사꽃처럼 곱고 매초롬하던 시절이 있었다. 복숭아처럼 탱글탱글하고 오달지던 엄마는 이제 주름살 가득한 할머니가 되어 이울고 있다. 꽃이 피고 지고 열매가 맺고, 그런 세월을 벗 삼아 사는 동안 복숭아나무는 고목이 되었다. 엄마의 얼굴에 검버섯이 피듯 나무도 여기저기 검버섯 같은 옹이를 가득 키워 냈다. 복숭아 농사를 짓는 일은 복사꽃 향기처럼 은은하지도 복숭아처럼 달콤하지도 않다.
복숭아 농사는 다른 과일보다 일하기가 어렵고 불편한 점이 많다. 복숭아에 있는 털 때문에 작업하기도 까다롭고 자칫 피부에 닿기라도 하면 알레르기가 생기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복숭아 수확 철이 여름이라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작업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백도 품종은 물러서 조금만 잘못 만져도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 복숭아와 복숭아 사이에 틈을 주지 않으면 상해서 여러 가지로 손해가 많은 과일이다. 이러저러한 어려움이 많다는 가족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는 복숭아 농사를 그만 짓겠다고 약조를 하셨다.
우리는 소박한 꿈을 꾸었다. 이제 우리 가족도 과수원을 폐원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바닷가나 계곡으로 여름휴가도 가고 좀 편히 살 수 있으리라는 꿈이었다.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우리의 그 꿈을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과수원에 있는 복숭아나무 폐원 안 하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아라.”
그 말씀을 끝으로 아버지는 가족들의 마음을 모르는 척 돌아앉아 버렸다.
세계무역기구 출범 이후 칠레와 FTA를 체결하면서 정부에서 과수원 폐원 추진과 함께 작목 전환 지원을 해 주겠다고 했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부모님 연세도 있고 하니 아버지를 설득했다. 복숭아나무를 베어 버리겠다고 아버지는 반쯤 승낙_하셨고, 드디어 폐원을 결정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마음을 바꾸셨다.
다시 힘든 노동의 시간은 계속되었다. 지칠 줄 모르는 한여름의 태양은 가족들의 소박한 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뜨거운 태양을 벗 삼아 여름을 보내야 했다. 가끔 태풍 소식이라도 들리면 복숭아가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면서 밤을 지새웠다. 하늘도 무심하다는 엄마의 한숨 소리는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경제적으로 크게 도움도 주지 않는 과수 농사는 가족들에게 고통 그 자체의 시간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살아 있는 나무를 어떻게 자르냐. 생명 있는 것을 함부로 자르면 쓰겄냐?”
힘든 시간이 고통스럽게 흐르고 사정이나 좀 알아보자면서 아버지를 붙들고 물었을 때 태연히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가 여름을 대하는 자세는 우리와는 다른, 생명 존중의 시간 같았다. 알 듯 모를 듯 시간만 좀먹고 이제 그 무심한 여름은 아무리 강산이 변해도 끝이 날 것 같지 않게 되었다. 우리야 대충 하면 되었지만, 엄마는 농사에 찌들어 몸이 천근만근이 되는 시간을 보내셨다.
그 세월을 무엇에 비겨 말할 수 있으랴. 만생종 백도가 한창 출하되는 시기는 7월 말에서 8월 15일 전후다. 한 해 한 해 여름은 한없이 무더워졌고, 작업은 더 어려워졌다. 유년의 엄마는 고무 대야에 복숭아를 담아 머리에 이고 오일장 난전에서 팔았다. 때론 복숭아를 시외버스에 싣고 남광주 도깨비시장으로 팔러 다니시곤 했다. 무더운 여름 복숭아를 따서, 그늘도 없는 노상에 앉아 팔아야 하는 고된 작업은 복사꽃처럼 고왔던 엄마의 얼굴을 검버섯과 주름으로 포장했다.
언제부턴가 노점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엄마의 모습이 그려지곤 했다. 직업 특성상 단속 업무를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산다는 건,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도, 하기 싫은 일이라고 하여 안 할 수도 없었다. 가끔은 부합되지 않는 일이라도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정부의 시책이 폐원이라고 하지만 아버지도 정성 들여 키운 나무를 자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단한 인생길에 만난 복숭아나무였다. “복숭아나무가 있었기에 복숭아를 팔아 너희들 육 남매를 키웠다. 그 인연을 어찌 모른 척하고 단숨에 베어 버릴 수 있겠냐.”라고 하셨다. 복숭아나무에 의지하며 평생 고난의 시간을 함께 견뎌 냈다고 했다. 의사 표현을 못 하는 나무라고 해도 생명이 있음을 이야기하실 때는 유독 완고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 세월이 벌써 사십여 년이 넘는다. 노점상을 하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어찌해 볼 수 없는 세월의 무게를 가늠해 보게 된다. 부모님도 나이 드시고 나무도 세월을 비켜 갈 수 없는 고목으로 성장했다. 더불어 자식들도 각자의 성을 찾아 날아갔다. 하지만 남동생들은 아직도 복숭아 농사에 매달리고 있다. 더는 부모님이 감당하기에 힘든 노동의 시간을 요구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은 우리 모두의 짐이 되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부모님께 생명 없는 것은 없었다. 폐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부모님이 나이 드시면 과수 농사를 하지 않아도 될 줄 알고 세월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과수원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는 과수원의 노예가 되어 젊은 날을 그곳에 바치셨다. 더불어 엄마의 꿈도 복사꽃처럼 하르르 지고 고왔던 모습은 사라져 얼굴에는 주름살만 한가득 채워졌다.
이제 대물림된 과수 농사를 거들고 있는 동생들의 삶이 누구도 구제할 수 없는 고통의 길에 들어섰음을 알기에 안타까운 마음이다. 나무와 함께 더불어 살아온 세월이 동생들의 시간마저 삼켜 버릴까 걱정이다. 다만 이 여름 저 나무의 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길, 부모님의 근심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청명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