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랗게 날아야 빠져나갈 수 있다』
김성신 시인의 『동그랗게 날아야 빠져나갈 수 있다』에서 「거짓말」을 소개한다
거짓말/ 김성신
어슷썰기를 했다, 지난 저녁을
도마 위로 흘러내린 채끝살의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매운맛이 돌았다모서리가 사라진 것들
감출 수 없는 기분을 게워내는
거울에 불길한 내가 붙었다 멀어진다
한참을 그림자로 출렁인다
하나둘 채워 넣은 감정은 이미 사선으로 가득찼다
그림자가 한참을 두리번거리자
하나둘 경계를 넘는 사소한 기분들
낯선 얼굴들이 칼끝에 걸려 미끄러졌다
목젖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상점 밖의 단풍나무가 거리의 찬 공기를 뱉어낻다
헐벗은 마네킹이 딱딱한 어깨를 움칫거리고
거울에 붙은 입술 자국이 단풍처럼 붉게 번진다
언제나 그와는 행인의 얼굴로 마주 보게 된다
어깨에 내려앉은 담배 냄새가 굴렁쇠를 굴린다
그는 어딘가로 향해 초조한 표정으로 걷고
골목길이 막히면 애벌레 삼킨 유리병처럼 숨쉬기 힘들었다
쏟아진 빈 어항처럼 공기가 빠진 전면 거울
나는 너무 늦게까지 서울역에 앉아있었다
인파 속으로 소지하듯 숨어버린 얼굴
비밀은 유리의 단면처럼 뾰족하다
병이 병을 어루만진다
어슷썰기를 한 것이 거짓말일까? 지난 저녁일까? 지난 저녁의 거짓말일까? 도마 위의 많은 재료들은 어슷썰기를 한다. 지난 저녁의 그것은 요리할 재료처럼 싱싱하기에 채끝살의 “핏물이 흥건히 고여”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핏물은 시간이 흐르면 굳기 마련인데 그 상처가 너무 깊어 굳지 못하고 고여 있다는 것은 어쩌면 아물 수 없음을 대변하고 있다.
“하나둘 채워 넣은 감정은”너무 고통스러워 “목젖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고 화자는 되뇐다. 지난 저녁은 지나버린 과거지만 화자에게 현재진행형인 까닭이다..
“언제나 그와는 행인의 얼굴로 마주 보게” 된다는 것은 화자와 상관없는 사람처럼 소통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딘가로 향해 초조한 표정으로 걷고” 그 표정을 읽으려고 애쓰는 화자에게 뚫려 있어야 할 골목길이 막히듯 그와의 마주 봄을 통해 숨쉬기도 힘들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비밀은 유리의 단면처럼 뾰족”하기에 화자에게 파고들어 시간이 흘러도 끊임없이 생채기를 낼 것이다. “핏물이 흥건히 고여” 잊을 수 없는 어떤 것이 될 것이다.
한 생을 살아낸다는 것이 거짓말로 점철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 거짓말로 인해 수없이 상처받으며 상처를 주며 서로에게 뾰족하게 날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병이 병을 어루만진”다는 것은 또다시 깨질 것을 알면서도 벗어날 수 없음을 예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