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탈의 꽃 피우시길

by 수인

무탈의 꽃 피우시길

을사년(乙巳年) 새해가 밝았다. 절기 중 입춘(立春)인 2월 3일이 지나야 을사년이 비로소 시작된다. 푸른 용의 해를 지나 푸른 뱀의 해라고 쇼핑업체에서는 뱀과 관련된 콘텐츠를 만들어 한몫 잡으려고 분주히 움직인다. 을(乙)은 오행 중 목(木)인 나무이고 사(巳)는 뱀에 해당된다. 을(乙)은 나무, 생명력, 새싹을 의미하고, 사(巳)는 지혜와 통찰력, 신비로운 기운 등을 내포하고 있다. 을사년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는데 내게는 삼재가 들어오는 해이기도 하다.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를 시작하면서 값진 한 해를 꿈꾸었는데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을 가슴에 묻어야 했다. 되뇌어 담기도 힘든, 공항 사고로 하루가 일 년처럼 아득했다. 비상계엄령 선포로 어지러운 시국 때문에 해외에 나가는 일을 걱정하길래 “그래도 괜찮을 거야”라고 했는데 그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세상에 괜찮은 일은 그 어떤 것도 없다는 뒤늦은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아프게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분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하지만, 잊을 수 없는 일이기에 가슴에 묻고 다만 견딜 뿐이다. 이제 그 무엇에도 빗댈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큰일 앞에 서면 개인의 소소한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산행에서 넘어져 팔꿈치가 빠져 구조 헬기를 타고, 119에 옮겨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전신마취를 하고 깁스를 했다. 병원에 입원을 했어도 그것은 사치일 뿐이었다. 어떠한 충격이 와도 다 그러려니 하며 견디는 법을 터득하기도 한다. 그 갑진년을 가슴에 묻는다. 언젠가 꺼내보며 기억하게 되리라.


을사년은 오는지도 모르게 은밀하게 와 있었다. 갑진년의 꼬리를 붙잡고 놓지 못한 채 시작되는 을사년이 두렵기까지 하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을사년 뱀띠 해 특별전 ‘만사형통(萬巳亨通)’을 전시한다는 소식이 풍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는 ‘만사형통’한 을사년을 기원하는 전시란다. 총명한 뱀, 두려운 뱀, 신성한 뱀으로 나누어 전시한다고 하는데 이 모든 뱀들이 내겐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은밀하게 움직이는 이유가 가장 크다.


을사년은 쓸쓸하고 스산한 부정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을사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도 한다.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일본군을 동원하여 강제로 체결한 을사늑약이 을사년 1905년이었다. 얼마나 분위기가 안 좋았을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을사년의 침통한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을사오적(乙巳五賊)으로 다섯 명의 매국노들이 많은 이권과 뇌물을 받으며 친일 행각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을사년 1965년에는 한일협정도 있었다. 문제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공식 사과도 없었고, 일제가 강탈한 문화재를 일본의 소유물로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을사년 2025년은 광복절 80주년이다. 뱀이 허물을 벗어 새롭게 태어나듯이 이 정국을 지혜롭게 대처해 나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


내 유년의 고향인 산골의 여름은 유독 길었다. 비포장도로와 풀이 우거진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걸어 다녔다. 어디에서든 뱀이 기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뱀을 유독 싫어했는데 해질녘이 되면 출몰할까 머리카락이 곤두서곤 했다. 뱀을 만나면 기겁하며 도망쳤던 시절이 있었다. 탱자 가시 울타리에 뱀의 허물이 걸려있곤 했는데 하얀색이라 유독 눈에 띄었다. 날카로운 가시를 뚫고 허물만 남기고 사라진 뱀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뱀을 생각하면 독을 품고 있는 독사가 먼저 떠올라 더욱 두려운 존재로 느껴진다.


뱀은 허물을 벗을 때마다 성장한다. 허물을 벗지 못하면 성장을 멈추는 것이나 다름없다. 허물을 벗어 옷을 갈아입듯 새로운 피부로 교체하는 과정이다. 탈피가 제대로 안되면 뱀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생긴다. 을사년은 허물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는 뱀처럼 사람도 과거를 벗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는 회복과 부활의 상징이 되었으면 좋겠다. 구불구불 기어서 이곳저곳을 다니는 뱀은 한 번에 10개 알을 낳아서 강한 생명력과 풍요로움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불교에서 뱀은 지혜의 등불을 밝혀주고 올바르게 살라고 어리석은 이들을 일깨우는 존재라고 한다. 하지만 인간을 해치는 두려운 존재로도 인식되기에 이중적인 면도 있다. 그렇지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강한 생명력이 있다면 회복과 부활을 통해 풍요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황망하여 형용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도 회복탄력성을 발휘해 또 살아가야 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을사년(乙巳年)이 우리 앞에 소리 없이 은밀하게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을사년, 내게 찾아온 삼재를 이겨내기 위해 웹 서핑을 한다. 중국의 도교사상과 점성술에서 비롯된 개념인 삼재는 운세에 따라 9년 주기로 찾아오는 세 가지 재난을 의미한다. 재앙의 시작과 재앙의 발생, 재앙이 종료되는 불운의 3년간을 말한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여정에 주기적으로 어려운 시련이 찾아오는 삶의 변화와 순환 과정을 말하고 있다. 천지인의 재해이기에 천재지변과 같이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라고도 하지만 복삼재라는 개념도 있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국면을 준비하는 기회로 해석되기도 한다.


계절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하물며 인간의 삶이 자연현상에 따라 반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이 가면 꽃 피는 봄이 오듯이 계절은 달라진다. 무슨 일이든 이중적인 의미가 있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을사년 새해,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현명하게 대처하여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만사형통을 기원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근심과 걱정이 없는 평온한 일상이 되는 무탈의 꽃 피우시길 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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