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안 가게 튼튼한 사람이 큰 병 치른다는 거짓
나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유아시절 성장기엔 어쩔 수 없는 성장통(?) 같은 것들로
감기, 열 등등으로 소아과를 자주 갔지만
크게 아픈 적은 없었다.
10대 때는 이상하게 소화를 잘 못 시켰다.
뭘 먹으면 자주 체하거나 설사를 했고 중학교 때 엄마와 함께 동네 내과에서 처음으로 내시경을 하게 됐는데 그때 병명은 “만성위염”이었다.
얼마 살지도 않은 내가 술도 먹지 않은 내가 왜 위염이 생겼는지도 모른 채 그냥 잘 관리하면 되는 병이라고 알고 살았다.
20대가 되고 합법적 음주가 되던 나이.
친구들과 한참 어울리고 놀기 좋아했을 때는 만나면 술이었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았고, 평소 내성적이던 나는 취하면 용감해졌다. 속에 담아두고 스트레스받던 것들을 끄집어냈고 후련했다.
기분이 좋아도, 우울해도 술을 마셨다.
그리고 취직의 실패와 성공에서도, 취직 후에도 회식 등등 술자리는 늘 있었다.
이때쯤 장염으로 설사와 배탈을 늘 살고 살았는데도 겁 없이 나으면 또 술을 먹곤 했다.
이렇게 나처럼 내과에 자주 오는 애들은 큰 병을 빨리 발견해서 오래 살 거라면서.
30대 초 세포분열이 줄어들었는지 배탈은 덜해졌다.
그리고 병원 갈 일이 점차 드물어졌고 면역도 좋아졌는지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다.
이때가 가장 내 인생에서 건강했던 시기인 것 같다.
스트레스에 취약한 성격인 나는 이때도 술을 자주 마셨다. 마실수록 쌔지는 게 주량이라고 양도 늘었다.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면서도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술자리는 꼭 끼었다. 그리고 당시 만났던 남자친구도 술을 좋아했다. 데이트에서도 술은 늘 함께였다.
그러던 중 배가 평소랑 다르게 이상하게 아팠다.
덜컥 겁이 났다. 만성위염인데.. 장염을 많이 앓았었는데..
40대쯤 되어야 한다는 종합검진을 예약하고 검사 결과 문제없음이었다. 그럼 그렇지
30대 중후반쯤부터 생리에 문제가 생겼고 늘 피곤했다.
버티는 삶이 이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다.
만성피로에 시달리면서 커피에 의존하면서도 자는 시간을 늘리려 하지 않았다.
‘내일도 어차피 피곤할 텐데.. 커피 마시지 뭐. 힘들 땐 달달한 거 먹고 버텨!’
20대 땐 맥심커피 한잔에도 가슴이 두근두근거렸지만 지금은 아침, 점심으로 벤티사이즈 커피 두 잔을 마셔야 하루를 버텼다. 그마저도 개운한 상태는 아니었다.
출근했을 때부터 녹초 상태였고 나는 내가 나이가 들어서 체력이 떨어져서, 운동을 하지 않아서, 잠을 많이 안 자서, 술을 마셔서 컨디션이 안 좋나 등등 외부 요인으로 생각했지 몸이 보내는 신호를 참 많이 무시하고 살았다.
그러던 중 자주 눈 다래끼가 생겼다. 초등학교 이후로 걸리지 않은 다래끼가 우습고 귀찮았다.
‘뭐 좀 피곤한가 보지..’
그러다 일이 커져 눈을 째는 수술도 했다.
차츰 다시 잔병치레가 시작되며 병원을 자주 갔다. 이유 없는 피부발진, 감기, 코로나 2번, 그리고 갑자기 시작된 생리 과다출혈과 6개월의 하혈이 갑자기 무서워졌다.
’ 어딘가 잘못 됐나?‘
산부인과를 가서 초음파를 봤다. 초음파 상 자궁과 난소 내막 모두 깨끗했고 우스갯소리로 나이 들면 다 어딘가 혹 하나씩은 달고 산다던 직장 선배들 말과 다르게 하혈의 원인이 근종, 물혹 하나 없이 외과상 문제는 아닌 거 같다고 했다. 그래서 호르몬 불균형 같다고 피임약을 먹어보자고 했다. 난생처음으로 38살에 피임약을 먹었다.
그렇게 6개월을 괴롭히던 하혈이 멎었다. 아직도 원인은 불분명했고 알고 싶었다. 인터넷을 미친 듯이 뒤져봐도 모르겠던 차에 소화가 안돼서 방문한 내과에 증상을 얘기했더니 선생님이 뇌하수체문제일 수도 있다고 했다.
‘뇌하수체..? 뭐 하는 기관이지? ’
검색을 해보니 부비동과 끝쪽에 자리 잡은 기관인데 호르몬분비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검색을 할수록 무서운 말이 많았고, 평소 비혼주의자인 나는 불임에 대한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임보다 뇌하수체가 더 무섭고 걱정됐고 검사 병원들을 찾다가 일단 호르몬 검사부터 해보잔 생각이 들어 산부인과에서 피검사를 했다.
당시 산부인과 의사에게 정신이 없었는지 뇌하수체 얘긴 하지 않았고, 피검사 결과 난 결혼한 적도 없는데 프로락틴 수치가 높게나와 부정출혈도 잡을 겸 피임약을 4개월 정도 먹었다.
해가 바뀌고 생리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별문제 없이 지내다가 장염으로 다시 피검사를 하게 됐다. 염증수치도 정상이고 괜찮다며 수액 맞고 가래서 약을 처방받고 수액을 맞았다. 이때부터 걱정된 질병은 직장, 대장암이었다.
변비와 설사를 오가며 잔변감이 있고 대장내시경에선 용동을 4개나 뗐다. 그래도 대장은 큰 문제가 없다고 하여 직장이 걱정되었다.
무서운 마음에 열심히 또 검색을 해보았다.
- 갑자기 변을 보기 힘들어지거나 변 보는 횟수가 변하는 등의 배변 습관의 변화
- 설사, 변비 또는 배변 후 뒤무직(변이 남은 느낌)
- 혈변(선홍색 또는 검붉은 색) 또는 점액변
- 예전보다 가늘어진 변
- 복부 불편감(복통, 복부 팽만)
- 체중이나 근력의 감소
- 피로감
- 식욕 부진, 소화 불량, 오심과 구토
- 복부에서 종물, 즉 덩어리 같은 것이 만져짐
(네이버 지식백과)
체중감소와 혈변을 빼고는 내 증상이 너무 딱 맞았다.
그리고 배란기만 되면 항문 주위 통증이 매우 심했다. 이것도 찾아보니 배란통으로 그럴 수 있다고 해서 마음을 놓았다.
그럼 이렇게 무수히 건강 걱정을 하면서 내 생활 태도는 달라졌을까?
아니다.
승진 때문에 시험을 봐야 했던 나는 더 밤을 새워가며 일했고 연차가 오른 만큼 업무강도는 훨씬 쌔지고 그와 비례해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그 외 내가 운영하는 독서모임, 취미활동 등등으로 잠을 더욱 안 잤고 술은 말할 것도 없이 자주 마셨다.
몸이 저렇게 신호를 많이 보냈는데도
”난 자주 병원을 갔는데 문제없었어! 원래 나처럼 잔병치레가 많은 애들이 가늘고 길게 오래 사는 거야 “ 라며
친구들한테 농담을 치곤 했다.
다들 나보다 나를 더 걱정했다.
너무 무리하는 거 같다고, 쉬어가라고, 건강 챙기라고.
괜찮다니까? 난 가늘고 길게 오래 산다니까?
대장, 직장에 문제가 있음 체중이 줄어든다는데 먹고, 놀고, 피곤하니 바로 자고, 운동하지 않은 결과로 2년 사이 10킬로가 쪘고 굶어도 운동을 해도 빠지질 않았다.
이번에 한 건강검진은 피검사는 멀쩡했고 과체중, 비만, 폐결절, 대사증후궁 경계의 소견이 있었다.
폐..? 내가 숨찬 이유가 저건가? 폐는 어디 가서 검사하지?
아 아니야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살았는데 폐도 괜찮겠지, 숨이 찬 건 내가 운동을 안 해서! 살이 쪄서 몸이 둔해지고 폐기능만 좀 떨어진 거야!
그리고 백혈병진단을 받기 한 달 전, 생리 과다출혈이 다시 생겼고 이땐 곧 멈췄기 때문에 병원을 가지도 않았다.
그리고 병 진단 일주일 전 설사를 했고 전날 먹은 순댓국에 막걸리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고 다시 생리 과다출혈이 아니라 멈추지 않는 피를 보며 잘못됐다. 생각으로 한 피검사로 두 달이 이렇게 지났다.
몸은 신호를 보낸다.
너 지금 쉴 때야,
어? 그래도 안 쉬어? 어쭈
얘 봐라 아직도 무리하고 무서운 줄 모르네?
정신 안 차리냐!
혈액암.. 생소한 단어와 비현실 사이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정말로 쉬지 않으면 몸을 돌보지 않으면 생명을 뺏길 수도 있다.라는 최종 경고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