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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천국

몰랐지만 알아가는 중

by 그로밋킴

처음 병이 발병하고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 TOP 3.


1. 원인이 뭐래?

2. 얼마나 치료해야 한대?

3. 완치된대?


답은 “몰라”였다.


처음 진단받았던 날 원인이 무엇이냐 물으니 교수님은 백혈병의 원인은 없다고 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방사선이나 벤젠과 같은 화학물품에 많이 노출된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이도 100% 정확한 원인이 아니라고 하셨다.


엄마는 CSI 프로파일러가 되어 온갖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너 바깥에서 나쁜 음식 많이 먹어서 그런 거 아니야?”

“밤새 잠을 안 자서?”

“회사 스트레스 때문에?”


하지만 선생님은 단호박처럼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못 박아주셨다. 이건 말 그대로 세포가 어느 날 갑자기 사춘기 온 10대처럼 ‘갑자기, 느닷없이, 우연히’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병이라고.

그래, 우리 세포가 그냥 삐뚤어진 거라고 생각하자.

사춘기도 언젠가 끝나듯이 치료받다 보면 어느새 내 세포도 돌아오겠지


“얼마나 치료해야 하나요?”

“모르겠습니다.”


많은 답에 몰라, 몰라요라고 답하면서 몰라 천국에 들어갔다. 내가 아는 거라곤 입원은 연속 두 달 꼬박, 항암 계획은 6개월 정도다. 근데 컨디션이랑 혈액 수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어디 갈 때 “언제 도착해요? “라고 물었는데 “교통 상황 봐서요”라고 답하는 느낌이었다.


“완치는 가능해요?”

처음엔 이것도 “몰라요” 였다가 중간에 “특별한 경우만 없으면 가능합니다”로 바뀌었다. 이것도 어디갈 때 금방 도착해요?라고 물었을 때 “막히지만 않으면요.”라고 답한 것 같았다.


그리고 시작된 주변의 무한 질문 공세.


- 부작용은 없어?

- 언제 괜찮아져?

- 회사는 언제 나와?

- 재발 위험은? (야, 나 아직 치료 중이야!)

- 먹는 건 다 먹을 수 있어?

- 면회돼?


우리 병동은 ‘무균실 왕국’이라 면회가 원칙적으로 금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의 면회객이 독감과 코로나를 선물로 놓고 가는 바람에 병동이 아수라장이 됐다.

스릴러 영화 같이 모두가 커튼을 꽉꽉 닫고, 누가 바이러스 옮길세라 서로를 경계했다. 마스크는 기본, 손 씻기는 강박, 손소독제도 어디 손만 닿으면 발랐다. 백혈병 환자는 암을 치료하면서 아이러니하게 세상의 무수한 균을 조심해야 한다. 호중구가 낮아 면역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가장 치명적인 건 감염이었고 티끌만 한 먼지도 위험할 수 있는 게 우리 현실이었다.


언제 괜찮아지는지 나도 모르겠고, 재발 확률도 100%는 아니지만 치료 잘 되면 5% 이하로 낮을 거고, 회사는… 글쎄, 그때 가봐야 안다.


입원 한 달이 넘어가면서 나는 나만의 생존 매뉴얼을 만들어갔다.


• 오늘 먹어도 되는 음식

• 먹어도 되지만 부작용을 부를 수 있는 음식

• 오늘 혈액수치가 의미하는 것

• 호중구가 말하는 오늘의 운세(?)

• 부작용이 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GPT 도움을 많이 받았고, 간호사 선생님들께 귀찮게 물어보며 열심히 공부해 가며 조금씩 몰라의 영역을 ‘아는 영역’으로 바꿔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모든 게 “몰라”였지만

지금은 많은 걸 알고, 이해하고, 준비할 수 있게 됐다.


몰라 천국에서 시작했지만, 이젠 ‘알아가는 천국’으로 가는 중이다. 그리고 이 여정의 끝에는 분명 완치천국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는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나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그땐 정말 하나도 몰랐어. 근데 결국 이겨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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