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 고스톱 치실래요?

명절이라는 판 위에서

by 시트러스

1. 선(先): 판의 시작

"우리 아들이랑 살아서 얼마나 좋니? 결혼 잘했다, 얘."

드라마 대사 같은 이 말을 나는 설날 아침, 김이 자욱하게 오른 부엌에서 들었다.

차이가 있다면 배경음이 OST가 아니라 기름 튀는 소리였다는 것.
그리고 나도 순순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점이다.


"이거 나물 무친 거니까... 아니다, 아범아. 이건 냉장고 넣어 놔라."

나는 옆에서 비닐 봉다리나 쥐고 서 있었다.

“00아, 저번에 참기름 준 거 남았니?" 내가 알 리가 없다.

"아이구, 됐다. 아범아, 이것도 챙겨라." 그리고 다시 들려오는 그 말.

"너는 우리 아들이랑 살아서..."


요리에 관해서라면 부정할 수 없다. 10년 전, 나는 이유식을 만들다 칼에 베여 열 바늘을 꿰맸다.

그날 이후, 요리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 손에서 떠나갔다. 설날 상차림은 내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것에 대해서라면...


2. 패를 쥐다

"00아, 이것 좀 뒤집어 봐라."

"네 넵! 어머님!" 봉다리를 팽개치고 달려가지만, 그마저도 남편에게 막혔다.

"엄마가 주신 거 좀 싸놔. 이건 내가 할게."

사실 기름 튀는 거 무서웠는데... 기름보다 더 빨리 튀어 나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처음에는 분명 나도 의욕 넘치는 신입 며느리였다.


결혼하던 해의 나는 기합이 바짝 든 신규 교사 같았다.

어딜 가도 무난히 지냈으니 시댁에서도 잘 해낼 줄 알았다.

"명절에 모이면 고스톱 치겠지? 연습해야지." 의욕에 차서 화투도 한 통 샀다.

설날이면 윷놀이도 하고, 고스톱도 치고. 그 판에 슬쩍 끼어 앉아 자연스럽게 식구가 될 줄 알았다.


3. 판돈이 다르다

"어어, 우리 집도 치지. 그런데... 우리 엄마 그런 거 되게 잘하셔."

"그리고... 형수님 S대 나오셨대." 뭐라고?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걱정하지 마. 형은 K대야. 괜찮아!"

두 분은 해외 근무를 주로 하셔서 몇 년에 한 번씩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와, 그것 참 안심되는 정보네!


그때 깨달았다.
가장 막내에 쪼랩인 내가 이 집에서 뭔가 이길 수 있는 게 별로 없겠구나.

고스톱? 어림없지. 잘 닦인 패들이 광처럼 번쩍였다. 나는 아직 쌍피 하나 못 모은 초짜인데.

애교? 무뚝뚝한 경상도 외길 인생을 걸어온 나였다. 한 번 쪼그라든 마음은 쉽게 펴지지 않았다.

야심 차게 사두었던 화투는 서랍 깊숙이 들어갔다.


4. 청단·홍단보다 센 어머님의 판

어머님의 패는 더 셌다. 청단, 홍단에 고도리쯤은 가볍게 들고 계실 듯한 기세였다.

결혼 초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쓸데없이 전화 안 해도 된다."

물론 딱히 쓸 데가 없긴 했다.

제사는 "그런 거 싫어서 내가 다 없앴다." 이쯤 되자 나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섀도우 복싱하듯 연습했던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아무도 링에 올라오지 않았는데 나만 인사와 각오를 쥐고 서 있었다.


결혼 첫해, 상을 차려주시며 "이제 이런 건 너희가 해라." 하셨는데, 10년째 같은 말씀 중이시다.

내가 쭈뼛거리다 뭔가 하려 하면 순식간에 역할을 뺏기고 아이들 담당이 된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잘 논다. 결국 나는 제일 안절부절못하며, 한가한 사람이 된다.


5. Stop을 못 외쳤다

진작에 스톱을 외쳤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판은 아무도 나를 몰아붙이지 않았다.

"제수씨, 애들 많이 컸네요."

"동서, 맥주 한 잔 할래요?"

말은 늘 먼저 건너왔다. 나는 그 말들을 조심스레 받아 쥐었다.


결국 어색함이 가시고 나면 떡국 국물처럼 마음이 풀린다.

어쩌면 나는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고스톱' 판에 끼어들지 못했다고, 지레 주눅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내 패를 들춰본 적 없는데 혼자서만 '몇 점짜리' 며느리인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요리도 못하고, 고스톱도 못 치고, SKY는 멀어서 못 갔다. (... 진짜 멀긴 했다.)

그런데 이 집은 패를 비교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판은 생각보다 고요한데, 소란스러웠던 건 내 마음이었다.


6. Go는 안 해도 된다

떡국 위에 올라가는 건 꼭 화려한 고명만 있는 게 아니다.
얇게 썬 파 한 줌이 있어야 국물이 산다. 눈에 띄지 않아도 빠지면 허전한 것.

나는 그 파 같은 자리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한다. 고명 중에 뭐, 소심한 고명도 하나 있겠지.


옹기종기 모인 이 집의 명절 풍경에 나도 들어간다.

아이들 웃음소리, 어머님의 쿨한 한마디, 형님의 무심한 듯 다정한 덕담 사이에서.

"작년에 가신 두바이요... 거기 두쫀쿠는 없죠?" 실없는 농담도 연습해 본다.


고스톱판은 깔리지 않지만 나는 이미 이 집의 패 한 장이다.

설날 아침 떡국처럼, 말없이 김을 올리며 그 자리를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