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이, 청첩장만큼 가까웠을까
1. 나는 속지 않긔
'광화문에서 뵐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피싱 문자인지 알았다.
아니, 요즘도 이런 문자에 속는 사람이 있나!
똑똑한 나는 뇌에 힘을 주고 발신처를 확인했다.
평소 개인적인 대화 몇 마디 나눠 본 적 없는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작년에 근무했던 학교.
갑자기 멍해졌다.
이번에는 눈에 힘을 주고 내용을 읽었다.
'청첩장을 드리고 싶어요. 작년 선생님들과 모실 수 있을까요.'
처음 든 생각은 '잘 못 보냈나?'
2. 감사히 받았습니다... 만
몇 년은 동료교사로 알고 지냈고, 작년처럼 동학년도 몇 번 한 사이였다.
비록 커피 한 잔 나눠 본 적 없지만...
청첩장까지 주고받을 사이인가는,
두뇌를 풀가동해도 '잘 모르겠다'는 답이 나왔다.
물론 축하하는 마음이 들었고, 나에게까지 연락을 줘서 고마웠다.
다만 주말에 광화문에 나가기는 힘들었다.
왜냐면 너무 뻘쭘했기 때문이다.
딱, 그 정도 사이였다.
민망하고 완곡한 거절의 메시지 끝에 이번엔 모바일 청첩장이 왔다.
서울 어딘가의 호텔 예식장이었다.
조사였으면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검은 옷부터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애매한 동료에게 애매하게 축하하는 마음은,
여러모로 심란했다.
차라리 수행평가 문제를 만드는 게 훨씬 쉬울 것 같았다.
3. 유교걸의 선택은
결국 유교걸의 본능과 또 거절했을 때의 민망함이
'가자'쪽에 손을 들어주었다.
막상 가기로 하니, 적당한 옷과 구두가 없었다.
아, 적당한 머리도.
당시 나는 10년 만에 숏컷으로 머리를 자른 참이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니 평소의 옷차림과 잘 안 어울렸다.
내 안의 편견과 싸우다,
매니쉬한 셔츠에 스커트 정도로 혼자 합의를 보는 날이 이어졌다.
물론, 초반에야 짧은 머리에 다들 놀랐지만,
나한테 관심 있는 건 나 혼자였다.
문제는 식장에 어떻게 하고 가느냐였다.
결혼식장이 어떤 곳인가.
각자 최고의 전투복을 입고 오는 곳이 아닌가.
경조사용 가방도 따로 있을 정도다.
4. 모든 쇼핑에는 이유가 있다
결국 이번에도 혼자 싸워 혼자 이긴 나는,
숏컷에 어울리는 슬랙스와 셔츠, 구두를 구입하였다.
'남의 잔치에 내가 뭐 하는 거지...' 잠깐 고민하였으나
뭐, 안 친한 누가 언제 결혼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결혼식 당일날.
결과적으로 전 학교 선생님들은 거의 대부분 날 못 알아보셨다.
학년 부장님도, 교무 부장님도, 연구 부장님도.
나만 내적 친밀함을 느끼며 멀리서 마음의 인사를 드렸다.
그런데, 신부도 날 못 알아봤다.
대기실에 들어서자 하얀 드레스의 신부가 앉아 있었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내 뒤편 어딘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순간 어색해진 공기 속에 말을 건넬 타이밍을 놓쳤다.
5. 이 신부가 아닌가?
그리고 대체 뭐라고 한단 말인가.
'나를 아시겠어요? 제가 바로 그 000입니다.'
난감해하다 돌아서려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왜 이렇게 멋있어졌어? 머리 잘랐네!"
1년을 함께 했던 기능 부장님이셨다.
반갑게 인사를 드리는데, 드디어 신부도 나를 봤다.
이런, 여전히 못 알아보는 눈치였다.
우리는 멀리서 서로 애매하게 웃으며 인사했고,
곧 다른 하객들로 시야가 가려졌다.
그날은, 내가 뭔가를 잘못 읽은 것만 같았다.
거리도, 기대도, 인사도. 다 조금씩 엇나간 기분.
멋지게 차려입고 삼삼오오 친한 듯 웃는 하객들 사이에서,
혼자만 외따로 떨어진 섬 같았다.
6. 프로 도리 지킴이
곧 신부대기실에서 나와 준비한 축의금 10만 원을 내고,
방명록에도 축하 메시지를 썼다.
그리고 조용히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인간관계에 도리는 하자.'하고 찾아온 식장에서
돌아서는 발끝이 도리없이 좀 씁쓸했다.
이번에는 기다리고 있던 남편 보기가 겸연쩍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니... 날 잘 못 알아보길래..."
"머리 잘라서 그런가?" 차 문을 열어주며 남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히 더, 속상한 순간이었다.
7. 마음의 거리, 인간관계의 온도
인간관계는 늘 거리 두기가 어렵다.
축하해 주는 마음을 어디까지 표현해야 할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민망하고,
너무 멀리 서 있으면 서운하다.
좋은 마음으로 축하를 전해도
그 마음이 닿는 온도는 늘 제각각이다.
숏컷처럼 짧게, 모바일처럼 빨리
정답으로 가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
그 사잇길 어딘가에서
적당한 마음의 간격을 재는 법을
나는 아직도 배우는 중이다.
8. 경조사룩 있음. 출동 가능
"이렇게 예쁘게 하고 왔는데 커피나 마시고 갈까?"
남편이 싱긋 웃었다.
생각을 달리 하면, 주말의 어느 멋진 날.
좋아하는 옷에 구두를 신고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날이다.
짧은 머리 밑으로,
선선한 가을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이제 숏컷까지는 아니지만,
아직도 짧은 머리를 유지 중이다.
시원하고 단정한 단발머리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경조사용 전투복과 구두도 잘 보관 중이다.
친하든, 덜 친하든 청해주시면
좀 더 기쁜 마음으로 출동할 준비를 마쳐두었다.
역시, 똑똑하게 쇼핑을 해두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