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취!
재채기, 어디까지 해봤니?
에취, 에취, 에취, 에...취, 엣취!
다섯 번 연속 재채기를 해본 사람은 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맹맹이 소리가 난다.
잠깐은 감기 환자 코스프레도 가능하다.
아침, 열린 베란다 창을 보며 맹맹한 소리로 말했다.
“아, 가을인가 보다.”
환절기가 되면 며칠간 어린 시절 잠깐 있었던 비염 증세가 나타난다.
내 주변에 비염이 나았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딱 한 명, 날 빼고.
비법은 엄마의 무뚝뚝한 땅붕어탕이었다.
말랑하지 않은 딸
엄마는 한 번씩 침통하게 말씀하시곤 했다.
"딸들은 애교가 많다 하드만, 우리 딸은 와 이렇노."
내 기억에 이 한탄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계속되었다.
그러면 나도 무뚝뚝하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흥, 나도 엄마 별로.'
귀여움이라는 노동
딸에게 애교를 왜 기대하는지 모르겠다.
애교 있는 태도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퍼포먼스에 가까운 것 아닌가.
한 손만으로 나이를 셀 수 있는 시절부터 나는 정서적 노동에 반항심을 느꼈다.
'우리 아들은 애교가 없어 걱정이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애교란 특히나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억압의 결과물이며, 생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둘째, 셋째인 쌍둥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예상 밖의 복붙
우리 집 첫째 원희는 아기 때부터 귀여웠다.
자기 자식이 귀엽지 않은 부모가 없겠지만, 원희는 안고 나가면 늘 이목을 끌었다.
오죽하면 실제 만난 적도 없는 사돈댁 아가씨가 원희 사진을 핸드폰 배경 화면으로 해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성격은 그렇지 못했다. 안아 주는 걸 싫어했고, 잘 울지도 않았다.
"누굴 닮은 거야!" 아이의 동그란 눈에 내가 비쳤다. "난가..."
아이는 꼬물꼬물 커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아기계의 영원한 딜레마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를 시전해도
"엄마, 그런 거 물어보면 내가 곤란하잖아."로 응답했다. 어어, 그래...
쌍둥이 동생들이 태어났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기들은 곧 분유와 이유식을 먹고 오동통해지기 시작했다.
둘째 두희는 뚠뚠이가 되었고, 셋째 세희는 온갖 성질을 부리는 성질머리로 성장했다.
두희가 우리 집 어린이 중에 남다르다는 걸 조금 키워보고 알게 되었다.
"두희, 세희! 싸우면 안 되지. 혼나러 가자." 그 말에 두희는 뒤뚱뒤뚱 걸어와 내 손을 잡았다.
아니, 같이 손잡고 가자는 게 아니라!
무릎 위의 말
외모만은 더 작고 귀여웠던 세희는 열받은 표정으로 먼저 진실의 방(아기 방 텐트 앞)에 자리했다.
"두희도 여기 앉아!" '맴매'를 가져와 짐짓 엄한 목소리로 자리를 잡았다.
두희는 내 무릎 위에 앉았다.
"누가 혼날 때 크흥, 엄마 무릎에 앉아요."
못 들은 척 뒤통수만 보인다. 뚠뚠이의 동그란 볼살을 밀며 "바닥에 앉아!" 해도 요지부동.
세희는 이미 분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이를 앞에 세우고 뒤에서 양치를 해줄 때면 두희는 팔을 뒤로 뻗어 엄마 다리를 안았다.
세희는 입에 거품을 물고 "엄마 다했어요." 앙칼지게 양치 그만하라고 독촉했다.
애교란 타고 날 수도 있었다. 쌍둥이로 태어나 똑같이 먹이고 키워도 타고나길 달랐다.
가을에는 붕어를
애교라는 말에 나는 여전히 거부감을 느낀다. 고분고분하고 순한 성격보다 직설적, 카리스마 있는 모습에 늘 더 끌린다. 엄마는 이제 “우리 딸은 애교가 없어.”라며 아쉬워하지 않으신다. 진작에 포기하신 듯하다.
어린 시절, 혼자 엣취 엣취 재채기를 하는 애교 없는 딸에게 엄마는
"아이고, 니가 날 닮아서 비염이 있는갑다." 하시더니 사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니셨다.
며칠 뒤 어디서 구해온 시커먼 붕어 몇 마리를 고아주셨다. 질색팔색을 하며 안 먹겠다고 버텼다.
"이거 먹어야 낫는다. 하나도 안 비리다."
엄마는 말없이 국자를 들어 내 그릇에 국물을 붓기 시작했다.
울 듯 말 듯 몇 숟가락을 떴고,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다시 국자를 들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집안 가득 찼다. "다 묵자."
결국 한 솥 가득 약인지 탕인지를 다 먹고 그 해 겨울부터 비염은커녕, 감기도 잘 안 걸리는 체질이 되었다.
가을은 내게, 재채기의 계절이자, 따끈하고 고소했던 그리고 딸만큼이나 무뚝뚝했던 엄마의 계절이다.
자막 없이 언어 배우기
이제 안다. 나는 애교 대신 사랑을 건넸고, 내 아이들도 그렇게 자란다는 걸.
할머니를 닮은 엄마를 닮은, 과묵한 원희도, 성질머리 세희도 다른 방식으로 엄마를 웃게 한다.
있는 그대로, 타고 난대로 세상 모든 아이는 사랑스럽다.
그러니 누가 애교가 있거나 혹은 없다고, 사랑이 없는 건 아니다.
모든 아이는 저마다의 언어로 사랑을 말한다. 나는 이제 그 낯선 언어들을, 하나씩 배워가는 중이다.
매일매일, 자막 없이 대화를 시도하며. 따끈한 사랑을 마음에 품고.
그 언어는, 결국 엄마가 내게 가르쳐 준 말이었다.
"엣취!"
사랑만큼이나 숨길 수 없는 재채기의 계절.
바야흐로,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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