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점과 소멸점을 만나다.
오늘 걸을 길이 직선 길의 끝장인 메세타의 정점이다. 어제 20km만 걸은 것은 이 구간을 통과하기에는 벅찬 거리라 그간 걸은 거리 중 가장 짧게 걸었다. 카리온에서 다음 마을인 칼자딜라까지 장장 17km는 중간이 마을이 없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기나긴 직선 길이다. 이 구간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아침부터 서둘러야 한다. 어두움이 걷히기도 전인 5시 45분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가로등 불빛만 있고 사방이 깜깜하다.
어둠 속에 마을을 빠져나올 때는 순례길을 찾는 데 조심을 해야 한다. 아무래도 렌턴 불빛으로 순례길 표시를 찾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래서 여러 순례자들과 함께 걷는 게 편하다. 스페인 순례자들과 함께 마을을 나와 카리온 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니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아무래도 스페인 순례자들을 따라가면 편할 것 같아 그들과 같이 걷는데 일행은 의욕이 앞서 그들 앞을 걷고 있다. 그런데 어둠 속에 순례길 표시가 없다.
렌턴을 밝히고 두리번거리며 순례길 표시를 찾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간신히 어둠 속에 표시를 찾았는데 일행이 없다. 소리쳐 불러도 들리지 않는지 대답이 없어 그들과 함께 걸었다. 로터리를 지나서 이어지는 직선 길. 그 길이 순례길이었다. 이제부터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 길이다. 일행은 앞서 갔을까? 열심히 걸어 봐도 흔적이 없다. 날이 밝으면 순례자가 많아 길을 잃을 곳은 아니기에 스페인 순례자들과 함께 걸었다.
그들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지 연신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한다. 그리고 참 쾌활하다. 초입에 이동트럭으로 간이매점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어제 먹을 간식을 준비하고 밥을 싸 왔기에 마음이 든든하다. 가도 가도 그 자리 같은 변함없는 직선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일행으로부터 어디쯤 가고 있느냐는 문자가 왔다. 장소를 확인해보니 뒤에 오는 있는 중인데 시야에는 보이지는 않는다. 10km를 걸으니 나무로 만든 낡은 쉼터가 있다. 여기서 준비한 빵과 사과 그리고 캔맥주도 한통 마셨다.
이곳에서 만난 스페인 할아버지 순례자는 민머리에 하얀 수염을 기르고 계신 분인데 기억하기가 쉬워 줄곳 자주 만났다. 인연의 끈이 얼마나 질긴지 나중에는 피니스테라에서 만난 끈질긴 인연이었다. 일단 체력을 보충하고 다시 걷는데 직선거리는 끝이 없어 내가 걷는지 표시가 나지 않고 마냥 그 자리란 생각마저 든다. 메세타의 이 길에서 소실점과 소멸점을 경험한다. 이 길에 서며 순례자가 소실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느낀다.
일행과는 차이가 있어 다음 알베르게가 있는 칼자딜라에서 만나기로 하고 홀로 걸었다. 가끔 자전거 순례자가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지나가면서 "부엔 까미노"인사를 나누고 사라진다. 마지막에 작은 언덕을 넘으니 칼사딜라 마을이 보인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그 긴 터널 같은 길을 넘어오는 기분을 느끼며 칼시딜라 마을에 도착하니 3시간 하고도 30분이 걸린 긴 시간이었다.
일행은 기다리며 간식을 먹고 있으니 뒤에 오는 한국인 젊은 친구들이 일행의 안부를 전해 준다. 뒤에 오시는데 고추장에 밥 비벼 먹고 있는 걸 봤단다. 늦을 것 같아서 양발을 벗고 느긋한 쉼을 하는데 개와 함께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도 있다. 혼자 걷는 것보다 반려견과 함께 걷는다면 많은 위안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개도 등에는 자기 식량을 메고 걷는다.
30여분을 기다려 일행을 만나 좀 더 쉰 후 다시 길에 섰다. 6.2km를 걸어서 레디고스 마을에서는 쉬지 않고 다음 마을을 향해 길은 차길을 따라 진행되는데 레욘으로 가는 길을 따라 북상하며 진행이 된다. 레욘도 그리 멀지 않았다. 어제는 이래저래 순례길에 들어서서 음주를 제일 많이 했더니 몸이 묵직하다. 오늘은 테라디요스에 알베르게를 잡아야 할 것 같다. 오랜만에 사설 알베르게에 들었다.
알베르게에는 어제 카리온에서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를 잡지 못한 대전 부부팀과 어머님 두 분은 오늘 선발대로 걸음을 잘 걷는 두 분이 먼저 도착해 알베르게를 예약해 두었다. 그리고 내일 잘 알베르게도 예약하고 걷는다고 한다. 점점 숙소 잡기가 만만하지 않다. 오후 1시 반이 넘자 이곳 알베르게도 만원이 되어 늦은 순례자들은 다음 마을까지 걸어갔다.
하루 피로가 누적이 되면 다음날까지 영향이 있으니 계획한 마을의 알베르게를 잡는 게 여러모로 좋다. 이곳 알베르게는 주방이 없고 주변에 바도 없어 모든 걸 이곳 알베르게 안에서 해결해야 된다. 식사도 주문해서 먹어야 하는데 메뉴도 별로다.
오랜만에 햇살이 좋아 침낭도 햇볕에 말리고 빨래도 해서 널고 샤워도 하고 나니 기분이 상쾌하다. 마을을 돌아보려고 나가니 마을이 너무 작아 둘러볼 때가 없다. 이곳의 wi-fi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것도 기기 부근에서 가능하고 침대에서는 되지도 않는다.
무료한 시간을 해바라기 하며 앞으로 걸을 구간에 대한 공부를 미리 해 두었다. 순례길에 들어선 지 2주가 지났지만 몸이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눈뜨면 걷고 또 걷지만 걷는 것에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직도 물집 하나 잡히지 않는 내 발이 고맙기만 한다. 끝까지 아무 탈없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무사하기를 기원해 본다. 지나온 시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 내 발도 그리 잘 견디어 주리라 믿는다. 부엔 카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