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은 뒷면 요리법 대로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말은 영화[ 봄날의 간다]에서처럼 이영애가 20여년전의 상큼한 외모로 말하지 않더라도 상당히 사람을 유혹한다. 외국에 나가서 슈퍼마켓에서 라면을 팔면 반가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기도 했다. 영국에서 공부할 때 친구가 외국에서 파는 것과 한국 인스턴트 본고장 맛이 다르다며 라면을 종류별로 크리스마스 선물로 붙여줬다. 어찌나 고마운지. 기숙사는 대개 성탄절 일주일 전부터 모두 가족을 찾아 떠나거나 여행을 가기에 기숙사가 썰렁하다. 정말 딱 '나 홀로 기숙사'풍경이 연출되는데 복도를 자나치다 사람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반갑다. 내 방은 컴퓨터 클러스터 근처라 학생들이 꽤 왔다 갔다 해서 평상시에 짜증 나던 지나다니는 사람소리가 정겨워지는 시기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침대에서 꼼지락 거리다 라면으로 저녁을 때울까 하여 기숙사 공동 부엌에서 라면을 끓일 때 그 냄새가 꽤 강력하게 퍼진 모양이었다. 컴퓨터 실을 오가던 외국 친구들이 부엌문을 열고 이게 그 유명한 한국라면 냄새냐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마침 여분의 라면도 있고 해서 "한국 매운 라면 먹어볼래?"라고 묻자 "그 말을 기다렸어"라며 잠깐 자기 방에 다녀오겠다더니 울퉁불퉁하지만 꽤 맛있게 직접 구운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들고 두 명을 더 데려왔다. 아 더 끓여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매워서 잘 못 먹을 거 같아 그냥 두 개만 끓였다. 그야말로 라면 먹기의 진수인 두 개를 끓여 네 명이서 나눠먹기를 했다. 냄비 뚜껑에 면을 식혀 먹는 것까지 하면 더 좋아겠지만 뚜껑 없는 소스펜에 끓였던지라 접시에 나눠먹었는데 맵다며 눈물 코물 짜가며 다들 너무 맛있게 먹고 심지어 멕시코인 친구는 라면 국물에 바케트 빵을 찍어먹기까지 했다.
이렇게 라면의 유혹은 국적 불문하고 치명적이지만 항상 뛰따르는 치명적 문제는 건강에 안 좋다는 인식인 듯하다. 좀 더 건강하게 인스턴트라면을 즐기는 방법이 신문기사에도 올라오고 여기저기 공유되기도 한다. 그런데 내 경우 대개 요리하기 귀찮거나 냉장고가 텅 빈 날 슈퍼가 기도 귀찮고 배달시키기조차 귀찮아 끓여 먹는 경우가 대분분이니 '건강하게 먹으려면 그냥 밥 해먹고 말지 뭘 유난을 떠나' 그런 주의였다. 그리고 라면은 계란도 넣지 않고 그냥 라면 그대로 국물 자작하게 끓여야 맛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신경 쓸 데가 많고 바빠 몸도 지쳤는지 메스꺼움이 심해졌다. 그래서 항암제 복용전 될 수 있는 한 밥을 챙겨 먹으려 하는데 오늘 아침은 정말 만사가 귀찮았다. 빈속에다 먹어도 된다 하지만 항암제는 냄새부터 메스꺼움을 유발한다. 의사는 잘 먹어야 오히려 메스꺼움이 덜하다고 하고 실제 그렇기도 하다. 해서 뭔가 먹기는 해야겠는데 오늘따라 간편 누룽지도 떨어지고 얼큰한 국물은 먹고 싶지만 요리하기는 정말 싫고 그래서 라면을 꺼내 들었다. 암환자가 아침부터 라면?, 잠시 망설였지만 친구 아버님이 폐암 3기로 입맛이 없어 고생하시니 의사가 라면도 좋고 빵, 햄버거도 좋으니 잘 드시는 게 중요하다고 했단 말이 생각났다. 그 말이 내 귀차니즘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핑계가 됐다. 그런데 물이 냄비에서 끓자 고민이 생겼다.
라면의 기름을 거르고 먹을 것인가, 그냥 그대로 수프를 투하할 것인가,
귀찮은 와중에 라면 기름을 거르고 먹자라고 결론내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여 한번 끓인 물을 버리고 기름기를 빼고 먹었다. 김도 넣고 양파와 파도 넣어 영양가도 고려했다. 내가 암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귀차니즘을 이겼다. 그런데 맛이 없다. 맨숭맨숭한 맛, 전혀 얼큰 칼칼한 맛이 아니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차라리 잔치국수를 끓여 먹을걸. 역시 라면은 기름이 둥둥 뜨고 짭짤해야 한다. 귀차니즘이 만연한때는, 더구나 속이 메슥거릴 때는 라면 뒷면 레시피대로 끓이는 게 최고였는데. 라면 회사에서 최적의 맛을 위해 수많은 실험을 거쳤을 텐데...... 설명서 무시하지 말자.
그리고 얼마 전 들은 팁을 공개하자면 라면 봉지에 계란 사진이 있으면 넣어 먹으면 더 맛있고 없다면 안 넣어 먹는 것이 맛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