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삼포세대라는 말로 연애, 결혼, 아이를 포기한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말이 유행하더니, 오륙 년 전에는 집과 경력을 포기한 오포 세대를 거쳐, 이삼 년 전부터는 N가지를 포기한 N포 세대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이런 말이 들릴 때마다 나는 씁쓸한 마음을 넘어 비통하다. 내 존재가 젊은이들에게 N 가지를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자신들의 최악의 미래의 모습으로 비취질 수도 있다는 아찔한 생각에 고개가 숙여지기 때문이다. 물론 포기하고 얻는 것이 있다면 말이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요즘 세대들에게 위로니 격려 줄 입장도 아니고 여력도 없다. 다만 포기의 대가가 만족감이나 행복이라고는 못하겠지만, 다른 기회를 위한 자리내주기로 한다면 아 다르고 어다르다고 세상보는 눈이 넓어지고 포용하는 나를 열심히 살아고 있다고 격려 할 수 있다.
결혼 연애 집 그리고 자녀들을 장애와 가정 형편상 요즘 세대와 비슷한 이유로 포기하고 살다 보니 비혼의 기성세대가 되었다. 같은 듯 다른 이유로 내가 포기한 것들을 되짚어 보니 나는 여태 획득하거나 경험하지 못했을 뿐 아무것도 꿈을 포기한 적이 없다. 사실 아예 기회조차 없었기에 나를 가늠못하고 너무 과대평가했고 아직도 그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마음먹고 하면 다 잘할 거라는 생각으로 신체적 장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신체와 정신은 인생을 균등한 비율로 담당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성취 여부와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에는 도전을 했고 그런 과정에서 인생의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전셋집을 포기했고, 사회보장이 잘 돼있어도 장애가 있는 외국인에게는 철벽인 이국 땅에서 간간히 하던 파트타임 일로는 학비와 생활비 감당이 어려워 학위를 포기하고 돌아왔다. 0사실 아직 그 여파에 허덕인다. 어쩌면 포기 연속인 인생처럼 보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분에 넘치는 것을 바란 내 허영심이 문제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내 분에 넘치는 것들을 왜 바라서는 안 된다고 하는 걸일까. 경제적 능력을 얻기 위해 내 생활 경제가 파탄 나는 상황을 나라고 바랐겠는가.
한때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이 세월을 견디며 얻은 건 암뿐이라는 생각에 억울한 생각뿐이었다. 왜 나만, 어째서 나는 그런 고통의 길들을 선택했던 걸까, 세상은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왜 이렇게 나를 밀어 떨어뜨리는 걸까. 나는 세상이 뒤집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이라도 났으면... 그러나 전 세계를 전쟁보다 지독하게 덮쳐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은 코비드 19 바이러스에도 시스템이 조금 바뀌었을 여전히 세상의 중심에 내가 들어갈 자리는 빈약하다. 병들고 나이 들어 설자리가 아예 없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바라고 이루려는 것이 많은 삶을 살고 있다.
지금의 나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들은 가난한 고학력 변두리 작가 지망생 암 환자 비혼녀다. 한마디로 주변부 인생. 그런데 변두리는 채워지지 않은 여백이 많다. 그래서 내가 비척거려도 나를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볼 사람도 얼마 없다. 병 때문에 어둥바둥 중심 진입만 노리던 눈을 돌려 나 자신에게로 돌리니 사간과 심적 여유가 생겼다. 어쩌면 남들 보기에는 포기 일지 모르지만 암이 일상을 치고 들어오니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이제 내 시점, 남의 시점으로 나를 판단하지 말고, 지극히 주관 적인 1인칭 나로 돌아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