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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Oct 21. 2022

낭비하지 않는 글쓰기

암환자의 글쓰기

   "나는 이 난감한 글을 읽느라고 시간 낭비했고 너는 이런 글을 쓰느라 시간 낭비했다. “

 표현은 좀 더 유연했다고 생각했지만 내 글에 대한 평가를 들었을 때 분노가 얼굴로 그대로 표현됐는지  폴은 테이블 위 빈 커피잔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외국어로 문학을 공부하기 때문에 어감을 표현하기도 어렵고 내가 읽어 내기도 어려웠던 거 같아.” 그가 나를 위로하려는 듯 부연해서 말을 건넸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화가 가시질 않았다. 네가 나의 생각을 뭘 안다고 지적질이냐고 생각했지만 다시 읽어본 나의 글은 장수 채우기에 급급한 티가 났고 두서가 없었다. 오히려 나이도 한참 어린 폴이 내 글을 보고 나의 상태를 어찌 파악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삼십 대 중반에  영국에서 공부를 시작했을 때 한국의 대학원 수업과 달라  무척 당황했다. 그곳은 박사과정이나 MPhill(연구 석사로 일반 석사와 박사 중간단계) 은 연구자로 분류가 되기 되기 때문에 수업이 없었다.  혼자서 연구 주제를 정하고 자료를 찾고 진행 상황을 페이퍼로 만든 후 지도교수와 논의를 하는 게 다 였다. 그제서 학기 중간인 4월 입학을 허가한 이유를 그제야 이해했다. 그러나 나 홀로 4월 입학이니 다른 박사과정들과 정보를 교환할 통로도 막막했다. 물론 학과장과 지도 교수가 나를 배려해 직접 안내해주고 일상생활 조언을 받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지만  주입식 교육에 익숙했던 나는 상당히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고심은 이미 정상 학기에 입학한 학생도 여전히 문제였던 모양인지 학과장이 영문과 외국인 대학원생들의 문학적 글쓰기 모임을 만들었고 영국인 폴이 우리 조의 조장이 되었다. 폴은 무명이긴 했지만 등단한 시인이었고 무엇보다 그의 글은 깊이가 있고 명료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그를  만났을 때  영어로 표현이 안된다고 고민을 털어놓자 그는 내 글을 보더니 손을 봐줬다. 그가 핵심만 남기고 불필요한 미사여구를 지우고 같은 뜻이라도 미묘한 차이가 나는 동사를 바꿔 표현을 몇 개 수정해 줬는데 그것만으로도 글이 달라 보였다. 지도 교수까지 이 정도면 흠잡을 데 없는 표현력이라고 칭찬을 했고 사실을 고백한 내게 근엄한 얼굴과 맞지 않는 - 진지하게 폴과 사귀어보라고 했지만 그에게 이미 약혼녀가 있었기에- 내게 꼭 필요한 친구라면  밥 사고 선물 공세로 돈 좀 들이라고 우스개 소리처럼 조언도 했다. 그 뒤 나는 여로모로 공을 들여  그에게 글쓰기 도움을 받았다. 폴은 자신도 동양인 친구는 처음이라 문화 차이에 대한 공부를 할 수 있어 좋다며 기꺼이 도움을 줬다. 그런데 사단이 난 것은 연구성과 평가를 받는 annual review를 앞두고였다.  이것저것 손댄 작품은 여서 개나 되는데 하나로 연결할 주제를 두고 헤매던 것이 그대로 글로 나타났고 것도 영어로 쓰니 더욱 엉망이었을 터였다. 폴 역시도 애뉴얼 리뷰로 바쁜 때지만 나의 도움 요청에 기꺼이 응해 줬다. 그런데 내 글을 보고 피차 시간낭비였다는 뼈 때리는 말을 한 것이다. 며칠을 고심한  내 글을 낭비라고 하는 그에게 화가 났다. 아마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헤매는 나를 들켜 창피했고 그것이 화로 표현된 것 같다. 폴의 충격요법이 통했는지 나는 각각 다른 작품을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드를 비유로 작품들을 엮어 내 무사히 애뉴얼 리뷰를 통과했다. 그리고 폴의 시 낭송회 초대를 받고 그의 시 낭독을 들으며 마음의 울림은 길게 설명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시가 보다 압축적인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잘 고른 한 미디에 그의 삶과 인생이 보였다. 나는 그에게 존경심이 생겼다.  

 막막함. 야심 차게 잘 해내고 싶은 생각만 가득 찼는데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것은 내가 삶에 익숙해지지 못하고 겉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어김없이 글로 표현된다.

 

딱 일 년 전 암이 뼈로 전이 되었는지 검사가 이어지던 불안한 시간을 견뎌볼 요량으로 브런치를 시작했다. 9월 말일부터  10월 말까지 한 달 동의 기간은 '브런치 북 출판 프로젝트'와 맞물리며 내가 집중 적으로 글쓰기 좋았다. 그런데 암 투병 생활에 대해 기록처럼 써서 공유해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친구들로부터 나답지 않게 글이 너무 길고 어둡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겪은 모든 치료과정과  감정을 다 쏟아 내려는 욕심이 읽는 사람에게 부담을 준 모양이다. 심지어 가슴  아파서 못 보겠다는 글쟁이 친구의 말은 내 글쓰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었던 걸까?

 

  비혼 독거 암환자로서 나는 누군가에게 내 얘기를 하고 싶었고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을 독자라고 상정했다. 브런치 시작 이전부터 나는 치료를 받으며 든 내 생각들을 소설과 수필, 일기에 담아 기록하려 했다. 이 작업은 암의 공포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나의 정체성을 잊지 않도록 해주었다. 혼자 병치례 하며 공포와 우울감을 쏟아내 항암 기간을 견디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항암여파로 사회적 활동과 멀어진 내가 여전히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위로를 주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잃지 않으려 하다 보니 나에게 지나치게 과몰입하게 되었다. "내가 제일 잘 나가"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니 "내가 젤 힘들어"라는 생각들이 감상으로 넘쳐 났다.  내  감정의 배출구로 이용하니 언어와 생각과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정의 과잉이 오히려  내 글을 전달되기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 앞에 조급한 의욕이 나를 혼돈의 지옥으로 미리 들어가게 했다.

 

    생각을 충분히 표현할 시간. 감정을 거르고 압축하는 시간을 오래 거치자.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낭비되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해 모든 생각을 토해 내려하지 말고 추려내고 언어로 압축하는 과정을 오래 갖아야 한다. 헛되지 않은 글쓰기가 인생의 낭비를 막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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