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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Mar 13. 2022

영문과 출신의 영어 울렁증

영어가 내게 와 수난을 당하고 있다. 

 영문과는 영문도 모르고  지원하는 과고 불문과는 모든 걸 불문에 붙인다는 아재 개그가 통용되는 시절 영문학과에 입학을 했다. 내가 대학 입학 지원을 할 때 들쑥날쑥한 내 모의고사 성적을 보며 내 담임선생님과 나의 어머니가 담합하여 여대에 들어갈 것을 종용했다. 사실 나는 최고 점수를 받은 모의고사 성적을 다시 낼 수 있다고 장담하며 남녀 공학 고고학과에 지원하고자 했다.  옛날이야기나 고전소설을  좋아했고 유적 발굴에 흥미가 있었다.  우연히 접한 이집트 투탄카멘 왕 무덤  발굴 기와 로마시대 폼페이 발굴기 등을 읽으며 나 역시 고고학자가 되어  고대 사람들의 생활을 현재에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왜 남의 멀쩡한 무덤을 파고 다니냐” 

우회적으로 어머니는 나의 고고학과 선택을 반대했다. 나 역시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재수는 집 형편상 어렵고 안정적으로 단번에 합격할 할 대학에 지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졸업 후 취업이 잘되며 다니는 동안 어머니를 만족스럽게 할 여대 영문과 지원하였다.  아마 나의 영어 울렁증은 나름 영어성적이 괜찮다는나의  자부심이 입학 오리엔테이션부터 무너지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온 친구, 학원에서 실력을 갈고닦고 들어온 친구들이 다수였고 그들의 영어는 유창했다. 거기다 한 교수님이 '넌 서울서 멀쩡한 고등학교 다닌 애가 발음이 왜 그 모양이냐' 했을 때 영문과를 선택한걸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냥 무덤을 파고 다녀도 내 좋은 거 할걸... 내가 영국에서 파트타임으로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진짜 고고학 전공자에게 아직 파고 다닐 무덤이 있냐고 장난스럽게 물었을때 그는 정색을하며 자신의 일은  선인 자취를 더듬으며 선조들의 문화유산은 모두 우리 발밑에 있고 그 위에 우리가 서있다고다고진지하게  말할 때 나는 진심 그가 부러웠다. 


 이후  줄곧 영어울렁증에 시달리고 있다.  발음이 썩 좋지 못해 받던 스트레스는 영국에 유학을 하며 사라졌다. 현지에 살아보고 실제로 발음이 좋아져서라는 이유보다는  영어의 모국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영국에서 외국인의 발음은 내가 듣기에 아무리 유창해도 그들에게는 어차피 내이티브 취급을 받진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미국에서 온 동기의  발음도 못 알아듣겠다는 영국에서 내가 기죽을 일은 없었다. 물론 울렁증과 관계없이 영어를 써야만 살아남는 상황이었으니 나는 또박또박 내 의사전달을 하는 것에 치중했다.

 단, 21을 '트웨니 원'이라고 무의식 중에 발음하는 나의 한국어 억양에 미국식 발음을 지적하며, “English is English, not American"이라고 강조하는 영국 지도교수의 말을 깊이 새기며 최대한 영국식 발음을 흉내 내려했다. 옥스퍼드 출신에 귀족 가문의 후예로 포쉬 잉글리시(Posh English 영국 상류 계층이 구사하는 영어)를 구사하는 지도 교수의 말투를 흉내 내자 만나는 영국인들 마다 영어 실력이 향상됐다며 칭찬을 했다. 하지만 그건 실력이 아니라 영국에서 살아남기 요령이 늘었을 뿐이었다. 


 나는 다양한 현지인과 영어 한마디라도 더해보려고 슈퍼마컽 대신 재래시장에 자주 갔다. 영국 마트에서는 보기 드문 배추나 고추 같은 것도 살 수 있기에 자주 애용을 했는데 문제는 그들의 말을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해 상당기간 고생을 했다.  시장이나 펍에 다녀오면 나의 정통 영국 발음 흉내 내기는 점점 더 어색해졌다. 

  내가 공부하던 곳은 영국에서 사투리가 심한 북동부 지방이었다. ”라디, 콤박 툰(Lady, come back tonight)", “땅스 베리 무치(Thanks very much)"라고 말하는 채소가게 아저씨의 말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처음엔 서로 못 알아들어 싸우듯이 큰소리로 말하며 심지어는 스펠링을 하나하나 말하기도 했는데 뜻하지 않게 박지성 덕분에 금세 친해졌다. 한국사람이라고 하니 당시 맨유에서 주가를 올리던 박지성을 안다며 자신이 팀은 다르지만  축구팬이라며 수다를 떨기도 했다. 게다가  내 성이 박 씨라는 걸 알고는 박지성 인척이라며 잘해줬다. 내가 아무리 한국에서 박은 가장 흔한 성씨 중의 하나라고 설명해도 자기 멋대로 인척이라는 생각을 꺽지 않았다. 박지성 씨가 어디 박 씨인지 몰라도 한국의 박 씨가 박혁거세 후손이니 영 틀린 생각은 아니고, 덕분에 싱싱한 오렌지나 사과를 덤으로 주기도 했으니 나는 박지성의 나라에서 온 미스 박으로 남기로 했다.  물론 시장에 가면 나는 사투리를 흉내 내어 발음했다. 헝그리(hungry)를 훙그리로 발음하는 식으로... 요즘 실전 영어로 네이티브 발음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어학원들의 광고를 보면 나는 왜 이 시장에서 쓰던 영어가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내 노트북이 완전히 망가져서 온라인 주문을 했는데 이주일이 다 되도록 배달이 안되었다. 처음엔 이메일로 문의하니 곧 도착할 거라는 성의 없는 답변에 여기저기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어제 배달하러 갔는데 내가 집에 없었다는 거짓말까지 들었다. 어제 하루 종일 집에 있었는데 무슨 소리냐며 항의하는 내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말은 빨라졌다. 그러자 전화를 받던 직원이 착오가 있었다며 사과를 했고 내일 꼭 배달되도록 하겠으며 배달 전에 전화하겠다고 말했다. 나 역시 큰소리쳐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서로 행운까지 빌어주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퍼뜩 든 생각이 내가 영어로 게다가 전화로 말싸움까지 했네, 더구나 상대와 오해를 풀고 화해까지 자연스럽게 서로 대화(?)를 계속했단 생각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절실한 필요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한 번은  런던 히드로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려 대기 중에 어떤 노 신사와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내게 영국 북부 출신이냐고 물었다. 그는 내게 북부 억양의 영어가 간간이 섞인다며 웃었다.  딱 한국에서 외국인이 전라도나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 신기해하듯... 뭐 그런 느낌을 준거 같다.           

 이런 현지 경험들은 항상 발음 때문에 기죽어 살던 내가 나름 영어를 좀 더 편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였다. 물론 다시 한국에 돌아와선 발음이 안 좋다는 말을  다시 듣고 기가 죽었지만..... 하지만 이제는 말한다. 의사소통하는데 문제없는데요.  그러면서 나는 영국 북부 대법원에서 통역으로 일했던 경력을 들이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 자체가 여전히 영어 울렁증을 유발한다. 

 

 한국인이 네이티브처럼 영어 못한다고 핀잔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학원가 원장들이었고 외국물 좀 잠깐 먹어봤다는 사람들이었던걸 보면 한국에서 영어 울렁증은 일정 부분 사대적인 자본주의의 폐해가 낳은 산물 아닌가 생각한다.    


p.s.

코로나가 끝나고 영국 혹은 유럽에 처음 간다면  영어를 잘하려고 일부러  혀 굴려 “워러(water), 버러(butter), 컴퓨러(computer)"라고 말해봤자 잘 못 알아듣는다. 중간 t발음이 문장 중엔 약화되는 건 사실이지만 영국에선  T 발음 정확히 하면 좋다.   21도 트웨니~ 원이 아닌 트웬티 ~로 발음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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