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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Apr 17. 2022

허허로운 봄날의 몸짓, 나들이

감우(感遇) 감우(甘雨)

공자 왈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늘 가까이에 근심이 있다.” 현재 치료 중인 암환자가 암을 떠나 멀리 미래를 계획한다는 게 어렵기만하다. 그래서인지   소확행으로 나 자신을 다독일 때 앞으로의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덮쳐오곤 한다. 노후대책, 독사 등등, 어지러운 마음을 다독이고자 읽은 책이 『오십에 읽는 논어』이다. 책머리에 저자는 스물의 미숙함, 서른의 치열함, 마흔의 흔들림도 줄어든 오십은 일관성 있는 일을 시작하기에 좋은 나이이며 자기 자신만 생각해도 욕하지 않을 나이 즉 살아가는 이유를 스스로 정하는 것이 바로 지천명 50대라고 말한다. 적잖이 위로가 됐으나 이 책 읽기는 성공지침서류의 저자의 설교 조가 느껴져서 중반 이후 그만두었다. 책 읽기 자체로 소확행을 찾아 나 자신을 일시적으로 다독일 뿐, 나이 오십이 면 추상적인 남의 말이 잘 들리지도 않고, 오히려 이룬 것 없이 병치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한탄만 늘어졌기 때문이다. 대신 몸을 움직여보았다.  

 정신적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근시안이 될 수밖에 없는 날들의 연속인듯하여 혼자는 엄두가 안나고 친구들에게 압박을 가해 당일 치기로 지난 3월엔 전주 이 4월 중순엔 강릉에 다녀왔다. 눈 호강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몸이 혹사당하는 것이지만 하루 이틀 끙끙대고 나면 천근 같던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방구석과 병원 밖 세상을 나서는 것에 마음도 설레고 몸도 가벼워지고 결과는 소확행 이상 중확행은 얻고 온듯하다.  


한옥마을 내려다보며


지난 3월 19일 전국에 가뭄에 단비갸 내리는 가운데 전주로의 여행 준비는 아침에 머리를 감고 가발 쓰느라 끙끙대는 것부터 시작됐다. 집 근처나 병원이야 탈모가 있어도 모자를 눌러쓰면 되니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지만 기차 타고 멀리 간다 생각하니 비 오는데 모자도 어색하고 항암 탈모에 기가 죽어 다니긴 싫어 가발을 쓰기로 했다. 허나 오래간만에 가발을 쓰니 시간이 많이 걸려 친구들의 애를 태우며 기차 시간에 아슬아슬 도착을 했다.  

 어쨌거나 기차를 용산에서 무사히 탔다.  코로나 감염 걱정을 했지만 비 때문에 사람이 많지 않아 걱정을 덜었다. 비 때문인지 남부시장 콩나물 국밥도 기다림 없이 먹고 한옥마을 근처 물짜장집도 바로 먹을 수 있었고 가랑비 내리는 거리를 걷는 낭만도 오래간만에 즐겼다. 당일치기라도 여행의 묘미는 지역의 색다름이다. 아직 서울은 벚꽃 개화전인데 전주는 이미 개화를 했고 나무들도  잎이돋고 푸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한번 봄 나들이에 맛을 들이니 갑갑함이 차오르기 시작하던 4월 15일 강릉행을 감행했다.  강릉은 몇 번 다녀왔지만 허난설헌 생가와 안목해변을 못 가봐 꼭 가고 싶었다. 강릉행 KTX가 생긴 후부터 한번 간다 하며 다음으로 미루던 것을 더 이상 그렇지 않기로 하고 친구와 떠났다. 허초희와 허균 남매의 생가터를 꼭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조선 중기 최고 명문 명문가 자제들의 혁신적인 사고와 글이 움튼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 것을 한스러워한 난설헌 허초희의 시들을 읽고 나서  내내 소소한 일상부터 전쟁과 사회를 꽤 뚫어보는 진보적 글쓰기의 정기를 받아오고 싶었다.

    

秀色縱凋悴 수색 종조체

淸香終不死 청향 조불 패 

 빼어난 그 모습은 이울어져도

 맑은 향기 끝내 죽지 않으리

 -허난설헌 ‘감우(感遇)’ 중-


허난설헌의 시, ‘느낀 대로 하는 노래'라는 ‘감우(感遇)’는 내 불우한 처지를 서글퍼하는 메마른 마음에 단비가 되었다.  좋은 가문에서 자라 좋은 가문으로 시집갔어도 이렇게 불행한 처지를 한탄하는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걸 보고 위로가 되기 하고 한계를 벗어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것 같기 하여 마음이 아렸다. 허초희는 시대가 서럽고 나는 그 집안 배경이 없어 서럽다고 애써 동질감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허난설헌 생가 장독대와 겹벚꽃

방구석에서 모니터로 세상을 보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충전할 시간이라고  그렇게 애써 위로할 필요 없이 아날로그 감성이 내 나이엔 진짜 나를 충전한 시간이다. 50대 봄날의 감우가 이렇게 다가왔다. 

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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