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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골 샌님 Nov 16. 2022

잊을 권리, 잊힐 권리

우정이 흔들릴 때

우정은 내게 무엇을 하는 건가. 생각하다 쓴웃음을 짓는다. 우정으로 무엇을 하다니……

 정신적으로 내 필요충족을 위해 우정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친구를 위해 자발적 희생도 마다 하지 않는 일도 다반사라 우정이란 추상명사의 실체를 찾는 것은 하릴없는 시간 낭비인지 모르겠다.   사전적 의미로 친구란 가깝게 오랫동안 사귄 사람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제 연락이 끊긴 어릴 적 동네 친구들은 더 이상 친구라 할 수 없는가. 그저 지인 혹은 아는 사람이라 해야 할지, 어지러운 마음이 든다.

 

 한 동네에 살아서 초등학교 이전부터 몰려다니며 놀던 친구가 나 포함 여섯이다. 우리는 죽마고우라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생활 반경이 다르고 관심사가 달라지며, 일 년에 두세 번 경조사가 있을 때나,  스트레스 풀 겸  큰 맘먹고 여행 갈 때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그마저도 생활이 팍팍하고 여유가 없어지면 여행 가자는 소리가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부담스럽다. 그래도 처음엔 일이 바쁘다거나 돈이 없다거나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당연히 내 상황을 이해해 줄거라 믿었는데 전혀 이해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으면 허탈하다. 그러다  힘들다고 푸념하는 내 말에 한숨이라도 쉬면 마음에 굳은살이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다. 게다가 말로는 부담스러울까봐 그랬다고 하지만 경조사 소식마저 연락하지 않으면 왕따 정도가 아니라 무시받는는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알아줄 거라 기대하던 마음이 내동댕이쳐진 기분이 든다. 서럽고 아프다. 발에 굳은살이 매기면 아프고 도려내야 걸을 수 있듯 우정도 도려내야 할 때가 있는 듯하다.


   어떤 작가가 우정을 하등 쓸모없는 것인 냥 표현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은 내가 선별해서 사귈 수 없지만 친구는 가능하다. 어릴 적엔 집이 가까워서, 록은  학교 짝꿍이라서 같이 놀고 공부하지만 대개 학년이 바뀌면 멀어진다. 그 중  마음 맞는 아이들과는 관심사와 취미를 공유하며 관계가 지속되고 우정이라 말하게 된다. 주로 또래가 친구가 되니 부모형제보다 더 공유할 것이 많아진다.  성장통, 세상사를 겪으며 서로 처음 겪는 일에 막막할 때 함께 해주려는 마음. 이런 오랜 시간 쌓여온 기억들 때문에 우정은 헤어진다거나 포기가 안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이는 아마 우정이 사생활이라 할 수 있는 가족과 달리 사회와 사생활의 접점에 있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가족이 없다 보니 친구들에게 많이 의지하게 되고 서로 고민 상담도 하고 스트레스를 함께 풀 수 있는 중요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더 이상 공감대 형성 형성이 어려워지면 우정은 오히려 스트레스가 된다. 헤어진 연인 때문에 아픈 마음은 세월이 약이지만 미묘하게 얽힌 우정은 매몰차게 끊기 어렵다. 잊을 권리가 있었으면 하면서도 잊힌 존재가 되었다 생각하면 또 서운하고 아프다.  사생활과 사회 사이, 사랑과 믿음 사이, 우정은 늘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다. 연락도 안 하고 만난 지 십 년이 넘어 친구라 칭하기 어려워도 애써 우정이란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성장통을 함께 겪으며 나이 든 나를 부정하는 것 같아서는 아닐까.

 잊을 권리와 잊힐 권리가 필요하다.  내 마음이 그런 권리를 인정해 주면 좋겠다.



https://brunch.co.kr/publish/book/6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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