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변경 (上)

달콤한 팔짱 끼고 죽변항으로

by 나철여



​"가끔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해내거든요."

​(Sometimes it is the people no one imagines anything of who do the things that no one can imagine.)

앨런 튜링과 그의 업적을 다룬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의 대사가 가슴을 울린다.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팔짱,

팔짱에도 달콤한 팔짱이 있고 부축하는 팔짱이 있다. 오랫동안 부축했다.

오늘은 달콤하기로 했다. 가끔 하는 착각이다.


그동안 남편보다 늘 한발 뒤에서 걸었다. 부인처럼.


남편이 아프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아닌 일에 앙탈을 부렸다. 무탈이 기적이라는 거, 일상이 감사하다는 걸 알고 나니 영부인이 아니어도 남편의 그림자로도 감지덕지다.


강릉행 6시 반, 첫 시간 기차표를 예매하고서야 희망이 보였다. 우리라는 조용한 희망.

하지만

급 유턴!!! 차표 취소, 환불, 남편에게 열차는 무리였다. 승용차로 떠난다. 강릉도 아닌 울진 죽변항으로 변경되었다.


예행연습까지 한 오랜 계획인데 변경은 참 쉽다.





동해안 고속도로를 달린다. 속도의 빠름이 아닌 흐름이 보인다. 동해안의 흐름. 우리라는 생각의 흐름.


오늘만이라도 천천히 의식의 흐름대로 드라마를 찍자.


로맨틱 트립은 각본대로 될지 모르지만 편의 애드리브 하나로도 분할 수 있지.


그랬다.

여행의 설렘은 만약이라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다.


만약에 사고라도 당하면

만약에 다녀와서 손발 저림 후유증이 더 심해지면...


집에 두고 가도 걱정,

같이 가도 걱정,

몹쓸 염려증 달고 사는 는 남편의 팔짱을 꼭 끼고, 보폭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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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둘은 거의 말이 없다.

밥묵자

자자

묵언수행 중 아주 가끔 티브이 채널로 말을 건다.


설 지난 오늘은 봄기운이 불쑥,

드라이브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의식의 흐름을 자유롭게 두고 나니 남편의 엉뚱한 구석이 반갑고 반갑다. 보조석에 거의 눕다시피 한 남편은 어찌나 이야기를 잘하던지.


한참을 달리는데 갑자기 내 오른손을 꼭 잡았다.

'달리는 고속도로, 차 안에서 손 잡혀 본 지 얼마만인가...'

그 옛날 잡혀본 뜨겁던 손이 아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9년 전 놓칠 뻔했던 손이다.


"이제 더 손 쓸 수 없습니다. 준비하시죠."

주치의 단언에


'하나님 들으셨죠, 이젠 하나님이 손 쓰실 차례예요!'

나의 화살기도는 빠르게, 정확히, 전달되었다.


호흡기내과를 중심으로 비뇨기과 순환기내과 신경과 감염내과 5개 과의 협진으로 다시 살아났다.

그때 손 놓쳤으면 어쩔 뻔, 이 미지근한 손도 못 잡았을 듯.


슬그머니 뺀 남편의 손은 휴대폰을 꺼낸다.

믿을구석으로 저장된 지 오래다.

뭔가 자리가 바뀐 거 같지만, 그 시점은 걸핏하면 응급실과 원실을 내 집 드나들듯 한 그 시점부터였다. 이름표 대신 보호자라는 목걸이가 걸린 지 벌써 9년째다.

상관없다.

남편은 금세 테트리스 게임에 빠져 있다.

또 상관없다.

티브이를 켜놓고도 귀와 손은 따로 놀고 있다.

한때 바둑만 두고, 어느 땐 골프채널만 고정시키던 눈, 이제 귀만 열어놓고 손은 테트리스에 무척 빠른 눈이다. 이럴 때의 손가락은 항암 후유증으로 남은 손발 저림 아랑곳 않고 치매예방에도 좋다는 제법 그럴싸한 논리다.


____


나에게 네비양이 계속 말한다. 시뻘게진 화면으로 속도를 줄이라고. 경로를 이탈 재 검색 중 그 틈에


풍경하나 들어온다.

선경후정 先景後情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엔 풍경을 읽고 후에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나타낸다.

남편의 애드립은 추억을 떼로 몰고 왔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어, 천생연분."

_ "갑자기?"


"​늘따라 당신이 너무 멋져 보여!" - (딸꾹.)

_ "당신, 마음에 없는 말 하 딸꾹질 나잖아?"


부부일심동체 누가 그랬어.

부부니까 일심?

일심이니까 동체?

천만에 눈치가 백 단이라 일심동체다.

남편도 나도 눈치하나는 척하면 척척이다. 환자와 싸워봤자 백전백패, 보호자와 싸워봤자 자신만 손해라는 걸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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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上下편 순서는 상관없지만,

하편은 이어서 바로 달린다. (사진폭탄 주의)

그래도

상편부터 보면 더 좋지... 상편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