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팔짱 끼고 죽변항으로
"가끔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해내거든요."
(Sometimes it is the people no one imagines anything of who do the things that no one can imagine.)
앨런 튜링과 그의 업적을 다룬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의 대사가 가슴을 울린다.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팔짱,
팔짱에도 달콤한 팔짱이 있고 부축하는 팔짱이 있다. 오랫동안 부축했다.
오늘은 달콤하기로 했다. 가끔 하는 착각이다.
그동안 남편보다 늘 한발 뒤에서 걸었다. 영부인처럼.
남편이 아프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아닌 일에 앙탈을 부렸다. 무탈이 기적이라는 거, 일상이 감사하다는 걸 알고 나니 영부인이 아니어도 남편의 그림자로도 감지덕지다.
강릉행 6시 반, 첫 시간 기차표를 예매하고서야 희망이 보였다. 우리라는 조용한 희망.
하지만
급 유턴!!! 기차표 취소, 환불, 남편에게 열차는 무리였다. 승용차로 떠난다. 강릉도 아닌 울진 죽변항으로 변경되었다.
예행연습까지 한 오랜 계획인데 변경은 참 쉽다.
동해안 고속도로를 달린다. 속도의 빠름이 아닌 흐름이 보인다. 동해안의 흐름. 우리라는 생각의 흐름.
오늘만이라도 천천히 의식의 흐름대로 드라마를 찍자.
로맨틱 트립은 각본대로 잘 될지 모르지만 남편의 애드리브 하나로도 충분할 수 있지.
그랬다.
여행의 설렘은 만약이라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다.
만약에 사고라도 당하면
만약에 다녀와서 손발 저림 후유증이 더 심해지면...
집에 두고 가도 걱정,
같이 가도 걱정,
몹쓸 염려증을 달고 사는 나는 남편의 팔짱을 꼭 끼고, 보폭을 맞춘다.
___♡
집에서 둘은 거의 말이 없다.
밥묵자
자자
묵언수행 중 아주 가끔 티브이 채널로 말을 건다.
설 지난 오늘은 봄기운이 불쑥,
드라이브하기엔 안성맞춤이다.
의식의 흐름을 자유롭게 두고 나니 남편의 엉뚱한 구석이 반갑고 반갑다. 보조석에 거의 눕다시피 한 남편은 어찌나 이야기를 잘하던지.
한참을 달리는데 갑자기 내 오른손을 꼭 잡았다.
'달리는 고속도로, 차 안에서 손 잡혀 본 지 얼마만인가...'
그 옛날 잡혀본 뜨겁던 손이 아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9년 전 놓칠 뻔했던 손이다.
"이제 더 손 쓸 수 없습니다. 준비하시죠."
주치의 단언에
'하나님 들으셨죠, 이젠 하나님이 손 쓰실 차례예요!'
나의 화살기도는 빠르게, 정확히, 전달되었다.
호흡기내과를 중심으로 비뇨기과 순환기내과 신경과 감염내과 등 5개 과의 협진으로 다시 살아났다.
그때 손 놓쳤으면 어쩔 뻔, 이 미지근한 손도 못 잡았을 듯.
슬그머니 뺀 남편의 손은 휴대폰을 꺼낸다.
믿을구석으로 저장된 지 오래다.
뭔가 자리가 바뀐 거 같지만, 그 시점은 걸핏하면 응급실과 입원실을 내 집 드나들듯 한 그 시점부터였다. 이름표 대신 보호자라는 목걸이가 걸린 지 벌써 9년째다.
상관없다.
남편은 금세 테트리스 게임에 빠져 있다.
또 상관없다.
티브이를 켜놓고도 귀와 손은 따로 놀고 있다.
한때 바둑만 두고, 어느 땐 골프채널만 고정시키던 눈, 이제 귀만 열어놓고 손은 테트리스에 무척 빠른 눈이다. 이럴 때의 손가락은 항암 후유증으로 남은 손발 저림에도 아랑곳 않고 치매예방에도 좋다는 제법 그럴싸한 논리다.
____♡
나에게 네비양이 계속 말한다. 시뻘게진 화면으로 속도를 줄이라고. 경로를 이탈 재 검색 중 그 틈에
풍경하나 들어온다.
선경후정 先景後情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엔 풍경을 읽고 후에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나타낸다.
남편의 애드립은 추억을 떼로 몰고 왔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어, 천생연분."
_ "갑자기?"
"오늘따라 당신이 너무 멋져 보여!" - (딸꾹.)
_ "당신, 마음에 없는 말 하면 딸꾹질 나잖아?"
부부일심동체 누가 그랬어.
부부니까 일심?
일심이니까 동체?
천만에 눈치가 백 단이라 일심동체다.
남편도 나도 눈치하나는 척하면 척척이다. 환자와 싸워봤자 백전백패, 보호자와 싸워봤자 자신만 손해라는 걸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___♡___♡___
덧)
上下편 순서는 상관없지만,
하편은 이어서 바로 달린다. (사진폭탄 주의)
그래도
상편부터 보면 더 좋지... 상편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