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각과 시산의 대화로 읽는, 존재와 권력, 그리고 희망의 철학
등불이 꺼진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둠을 응시한다.
그러나 그 눈이 익숙해질 때, 어둠은 다시 길이 된다.
휘각(揮珏):
이 시, 기억나세요?
박경리의 유고시집에 실린 시.
“마음 바르게 서면 / 세상이 다 보인다 / 빨아서 풀 먹인 모시 적삼같이 / 사물이 싱그럽다…”
이 구절을 다시 읽는데, 이상하게도 『장길산』이 떠오르더라고요.
시산(詩産):
허허 역시 스승과 제자는 이심전심인가?
사실 그 둘은 서로 다른 장르인데도, 하나의 마음을 그리고 있지.
박경리의 시는 말해—세상은 마음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고.
황석영은 장길산의 눈을 통해, 그 일그러진 세상을 응시하지.
그 눈에는 세상이 ‘해와 달이 없는 벌판’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바람 소리에도 ‘이치’가 담겨 있는 듯 들리기도 해.
그건 마음이 서 있는 위치가 바뀌었기 때문이지.
휘각(揮珏):
그래서였군요.
생각해 보면 장길산은 칼을 들었지만, 그 칼이 증오나 탐욕을 위한 건 아니었죠.
오히려 더 깊은 무언가—‘마음의 바름’을 지키려는 저항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 마음은 언제나 위험에 놓여 있었어요.
혁명은 쉽게 타락하고, 칼은 금방 권력의 도구가 되니까요.
휘각(揮珏):
그런데 자꾸 묻게 돼요.
장길산이 일으킨 봉기,
성공했다면 그게 과연 진짜 세상을 바꿨을까요?
혁명이 늘 반복되는 이유는 뭘까요?
왜 새로 세운 정의가 또 다른 억압이 되는 걸까요?
시산(詩産):
그건 혁명이 흔히 ‘권력을 누가 쥐는가’에만 집중하기 때문이야.
미셸 푸코는 말했지.
권력은 단지 국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교실, 병원, 감옥, 가정—우리 삶의 미세한 틈들에 퍼져 있다고(『감시와 처벌』)
푸코는 이걸 ‘권력의 미시물리학’이라 불렀어.
혁명은 왕을 몰아내지만, 교실의 시험, 직장의 평가, 가정의 침묵은 그대로 유지돼.
이건 전복이 아니라 형식만 바뀐 재현이야.
그래서 혁명은 종종 지배의 서사를 반복하게 되는 거고.
휘각(揮珏):
그러니까 정권은 바뀌었지만, 사람과 삶의 구조는 바뀌지 않았다는 거군요.
시산(詩産):
맞아.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정치적 변화 이전에 ‘존재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지.
우리는 ‘소유하는 인간’에서 ‘존재하는 인간’으로 이행해야 한다고(『소유냐 존재냐』)
프롬에 따르면,
‘소유하는 인간’은 축적하고 비교하고 통제하며 존재를 증명하려 해.
반면 ‘존재하는 인간’은 느끼고 경험하고 나누며 살아가.
혁명은 ‘무엇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정하려 들지만,
그 누구도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묻지 않아.
그래서 혁명은 언제나 실패해.
가진 자가 바뀌었을 뿐,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지
휘각(揮珏):
그렇다면…
요즘은 사람들이 플랫폼을 통해 더 많이 참여하고,
블록체인 같은 기술로 ‘분산된 권력’을 이야기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기술이 희망이 될 순 없을까요?
시산(詩産):
그건 양날의 검이지.
디지털 플랫폼은 참여의 문을 열지만,
동시에 자기 노출, 비교, 인정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해.
블록체인은 신뢰를 자동화했지만,
존재를 ‘토큰화’하고, 자아를 자산으로 전환시키기도 해.
결국 우리는
‘존재’하려고 로그인한 게 아니라,
‘증명’하려고 살아가게 돼.
휘각(揮珏):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거군요.
시산(詩産):
바로 그거야.
푸코도, 프롬도, 그런 기술적 삶의 규율화를 예감했지.
그리고 그것에 맞서기 위해선
기술을 넘는 삶의 철학,
다르게 말하면 ‘보이지 않아도 머물 수 있는 존재’의 윤리가 필요하다고.
휘각(揮珏):
하지만 시산…
그런 말들—푸코의 경고, 프롬의 외침, 노자의 도(道)—
모두 수천 년 전부터 말해온 것들이에요.
그런데 세상은…
왜 이렇게 똑같죠?
희망은 없는 거 아닌가요?
시산(詩産):
그나저나 이름 참 멋있구나 ‘휘각’ 휘두를 揮, 쌍옥 珏.
젊음의 패기가 느껴지는데,
뭘 그리 휘두르고 싶은 게냐?
휘각(揮珏):
에이, 대답 곤란하니까 말 돌리시는 거죠?
시산(詩産):
허허.
거, 성질머리 급한 것이
꼭, 내 옛 모습을 보는 것 같구나.
그런데 네가 희망이 없다는 걸 묻는 순간,
우리는 이미 희망의 문턱에 있단다.
희망은 미래의 결과가 아니라,
반복 속에서도 다시 묻는 윤리적 결단이야.
푸코는 이렇게 이야기해:
“말이란 지배를 당하지 않는 순간을 만들기 위한 장치다.”
희망은 효율이 아니라 저항이고,
성공이 아니라 반복이고,
응답이 아니라 지속이지.
휘각(揮珏):
그러니까 희망은 ‘변화가 온다’는 믿음이 아니라,
‘변화가 없더라도 오늘 내가 다르게 살겠다’는 자세라는 거군요.
시산(詩産):
Exactly!
이런 나도 모르게 또 이런 외래어가 나오네.
넷플릭스 끊던지, 이거 원.
네가 말한 그 자세는 종종
물처럼 낮은 곳에 머물지.
휘각(揮珏):
…그러니까 희망은
언젠가 도달할 결과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다르게 살아보려는 작은 결심이라는 거네요.
시산(詩産):
정확해!
그 작은 결심이 매번 실패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희망이지.
그건 감정이 아니라 윤리적 자세야.
매번 질 줄 알면서도 싸우고,
매번 묻힐 줄 알면서도 쓰고,
매번 무너질 줄 알면서도 말하는 것.
휘각(揮珏):
…영화 미션 생각나요.
가브리엘 신부는 끝까지 기도로 맞섰고,
로드리고는 과거의 죄를 속죄하듯 검을 들었죠.
그리고 결국 둘 다 죽었어요.
시산(詩産):
허허, 너도 이제 구세대구나.
요즘 신세대들은 미션의 주제곡 가브리엘의 오보에를 변주한 넬라 판타지아만 알았지
미션과 같은 명작 영화를 본 사람들은 거의 없을걸.
어쨌든 그래도 우리는 그 둘을 잊을 수 없지.
그들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에 대한 선언이야.
로드리고가 택한 검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정의 없는 평화를 거부한 윤리적 결단이었고
희망은 그런 거야.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세상이 나를 무너뜨릴 때조차 나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묻는 태도.
그 물음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희망 안에 있는 거란다.
시산(詩産):
노자는 말했지
“上善若水(상선약수)”
“가장 훌륭한 도는 물과 같아서,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으며, 낮은 곳에 머문다.”
— 『도덕경』 제8장
그리고 또 말했어
“和其光同其塵 (화기광동기진)”
“그 빛을 조화시켜, 그 티끌과 함께하라.”— 『도덕경』 제56장
이건 겸손을 말하는 게 아니야.
보이지 않아도 작용하는 힘,
침묵 속에서 이어지는 윤리,
지배가 아닌 흐름의 철학이야.
혁명이란, 폭풍처럼 와서 모두를 휩쓸고 가는 것이 아니라,
물이 길을 내듯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흐름을 바꾸는 거고.
휘각(揮珏):
…다음 혁명이 다르길 바란다면,
우리는 정권이 아니라
삶의 조건을 바꾸는 방식부터 혁명해야겠군요.
요즘 우리나라를 보면
촛불혁명이 아무것도 성취한 게 없어 보이는 게
다 그런 이유들이 있었네요.
시산(詩産):
그리고 그 방식은 어쩌면
물처럼 조용하고, 티끌처럼 사라지며,
그러나 가장 오래도록 작용하는 것일지도 몰라.
휘각(揮珏):
방금 시산이 말한 “물처럼 조용한 혁명”이 마음에 남아요.
하지만 또 이런 생각이 들어요.
‘물처럼’ 사는 것만으로는 현실의 집단적 욕망과 구조적인 악을 감당하기 힘든 게 아닐까요?
세상은 착한 사람 하나의 결단만으로 바뀌지 않잖아요.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고, 욕망덩어리 아닌가요?
시산(詩産):
아주 좋은 질문이야.
역시 내 수제자답구나.
사실 그런 관점을 가장 날카롭게 설명한 철학자가 바로 순자야.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지.
‘성악설’이라고 하면 마치 순자가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쁘다,
혹은 악하게 태어난다고 말한 것처럼 받아들이는데,
그건 사실 표피적인 해석이야.
휘각(揮珏):
그럼 진짜 순자의 핵심은 뭐죠?
시산(詩産):
그는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대로 내버려 두면 인간은 자기 욕망대로 흘러가게 마련이며,
그 욕망들이 집합될 때 쟁탈과 혼란, 무질서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본 거란다.
그러니까, 순자의 핵심 명제는 이거야:
“인간의 본성은 악하고, 선한 것은 인위이다.”
— 『순자』 「성악 편」 (人之性惡 其善者僞也)
여기서 ‘僞’는 위선이 아니라 ‘위조(僞造)’의 위,
즉 ‘만들어진 것’, 인위적으로 길러낸 것을 말해.
휘각(揮珏):
그렇다면 인간은 혼자 두면 악해지지만,
제도와 교육, 실천을 통해 선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이야기군요.
시산(詩産):
바로 그거야.
역시 하나를 가르치면 그다음은 스스로 깨닫는구나.
하산할 날이 멀지 않았어.
순자의 사상은 인간에 대한 냉철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지만,
결코 염세적이지 않아.
오히려 그는 인간 집단이 제도와 문명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어.
그는 또 이렇게 말했지:
“법이 없이 다스리려 하면 혼란이 된다.”
(無法而治者 亂也)
혁명도 마찬가지야.
감정으로 들끓고, 정권을 전복했어도
욕망이 조직되고 조절되지 않으면
다시 쟁탈전으로 되돌아갈 뿐이지.
휘각(揮珏):
(시산, 사실... 저 몰래 이미 하산했어요.
최근에 브런치 만들었걸랑요 ㅋㅋ)
그러니까 순자의 말은
‘인간은 원래 악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악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 치열한 실천과 구조가 필요하다는 거군요.
이거야말로 지금 우리가 고민하는
혁명의 부조리와 순환성을 뚫고 나갈 하나의 실마리 아닌가요?
시산(詩産):
(휘각이 브런치 만든 건 이미 알고 있어.
내 보이지 않는 눈이 있으니
어찌 그럴 모르겠느냐 허허허...)
네가 이야기한 게 맞아.
노자가 “물처럼 낮게 흐르라”라고 말했다면,
순자는 “흐르기 전에 물길을 잘 짜라”라고 말한 거지.
•푸코가 ‘권력은 일상 속에 있다’고 말했을 때,
•프롬이 ‘존재 방식 자체를 바꾸자’고 했을 때,
그들은 개인의 내면적 실천을 강조했지만,
순자는 여기에 집단적 제도화, 윤리적 형식의 체계화까지 요구한 사람이야.
휘각(揮珏):
그 말대로라면,
혁명이란 단지 정권 교체가 아니라
집합적 욕망을 어떻게 길들이고 구조화할 것인가의 문제네요.
시산(詩産):
그래서 순자의 핵심은 이거야:
“성위지분(性偽之分)”
“본성은 그대로 두면 악하지만, 위(僞)로 길들이면 질서와 선이 가능하다.”
혁명의 성공은 결국
개인의 내면을 바꾸는 ‘도덕적 결단’과,
그 결단을 제도화하는 ‘윤리적 정치 기술’이 함께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어.
다음 혁명이 다르길 바란다면,
우리는 사람을 믿는 동시에 사람을 조절할 구조도 함께 만들어야 해.
그게 바로 순자가 말한 가장 현실적인 희망이지.
휘각(揮珏):
아, 오늘 수업 너무 좋네요.
제가 오늘 수업을 한 편의 논문 같은 에세이로 만들어서 제 브런치에 올려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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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詩産):
허허, 내 한번 읽어보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면 좋아요 눌러주지.
마음이 없는 좋아요 100개보다
진심이 담긴 좋아요 하나가 귀한 법이니.
나는 나대로 다음 편에 오늘의 대화를 한번 요약해 보마.
그런데 나는 니 좋아요가 필요 없다. 허허허
- 3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