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박경리의 마음과 장길산-1

혁명, 우리말, 민속학, 국학, 의미 있는 패배, 살결좋아 전대야

by 시산
마음 바르게 서면
세상이 다 보인다
빨아서 풀 먹인 모시 적삼같이
사물이 싱그럽다

마음이 욕망으로 일그러졌을 때
진실은 눈멀고
해와 달이 없는 벌판
세상은 캄캄해질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욕망
무간지옥이 따로 있는가
권세와 명리와 재물을 좇는 자
세상은 그래서 피비린내가 난다

-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중


1. 박경리의 '마음'과 『장길산』


표지는 10여 년 전쯤 가족과 함께 통영으로 여행을 갔다가 미륵산에서 박경리 선생의 시를 보고 찍었던 사진이다.


당시 이 시를 읽고 황석영 선생의 소설 『장길산』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십수 년 전 직장을 서울시청 근처로 옮기고, 예전 직장보다 비교적 여유가 생겼었다. 당시 서울시청 구청사는 서울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그 덕에 걸신들린 듯 도서관의 책들을 탐했다.


황석영의 『장길산』은 그 초창기 읽었던 작품들 중의 하나였다. 왜 위 시를 읽고, 『장길산』이 바로 떠올랐을까?


1.1 『장길산』을 읽고 받았던 문화적 충격


사실『장길산』은 책 커버에 있는 홍보성 문구들이 마음에 들어 책을 읽게 되었다. 어떤 책이길래 북한에서도 공식적으로 출판되었을까 몹시 궁금했었다.


책을 처음 읽고 받았던 문화적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내게는 너무나 생경한 우리말 어휘들이 너무 많았다. 토속어와 옛 사물의 명칭, 고어들의 한바탕 향연이었고, 소설을 읽으며 이렇게 우리말 단어를 빈번하게 찾아가면서 읽기는 처음이었다.

각종 외래어와 일본식 표현들에
오염되었던 내 언어 창고가

『장길산』의 우리말 장맛비에
깨끗이 씻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비단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장길산은 우리 문학과 국어학에서 묻혀가는 어휘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옛 사물에 대한 고유 명사 등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한국일보 독자와 다시 만나는 장길산」, 『한국일보』, 1981.1.27) - 어느 주부 독자의 글

*『장길산』은 1974년 7월 11일부터 1984년 7월 5일까지 거의 10년에 걸쳐 『한국일보』에 연재, 한국 근현대 문학사상 가장 긴 신문 연재소설 중 하나다.

심지어 『장길산』에 대해서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는 학자(김현)도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어휘 구사”의 풍부함에 대해서만큼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1.2 1970년대 국학의 총체, 우리말의 향연


이런 풍부한 어휘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먼저는 사학자 정석종과의 협력 및 문예중흥 정책을 통해 축적된 방대한 자료가 있었다. 그리고 『한국일보』의 사장이었던 장기영이 “당시에는 집 한 채쯤 살 수 있는 자료비”를 내놓았고, 이 돈으로 확보한 막대한 자료는 『장길산』 집필에 있어 중요한 밑천이 되었다.


따라서 『장길산』은 단지 작가 혼자의 작품이 아니라, 1970년대 국학과 민속학의 공동 창작물이었다.


고어, 현대어, 방언, 토속어, 속어, 욕설, 구비문학 언어 등 모국어의 광범위한 지층들이 혼합되어 단일한 언어의 장 위에 종합되었다. 그리고 일본을 경유해 수입된 근대 한자어, 서구어 어원을 가지는 외래어 등은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장길산』의 언어는 고어와 현대어를 종합하는 기묘한 언어적 혼성을 통해 순수한 모국어의 가상적 총체를 구성하며 역사소설 양식을 위한 새로운 언어가 되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1.3 살결좋아 전대야


1. 맥락

이 표현은 『장길산』 초반, 장시 묘사 장면에서 등장한다.


도자기와 옹기, 생과일, 떡장수, 각설이패 등이 어우러진 혼잡한 시장 장면 속에서,

사기전 상인이 지게작대기로 그릇을 두드리며 외친다.

사기전에서는 각색 그릇을 벌여놓고
지게작대기로 두드리며 외치는데,

“결새고운 안성유기,
장맛나는 서흥옹기,
살결좋아 전대야 …”

2. 어휘 분석

즉,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이 세숫대야는 여인의 살결처럼 부드럽습니다!

고어인 ‘전대야’와 감각적 속어 ‘살결좋아’를 생생한 시장의 언어로 재현해 문학적 재창조를 이뤄냈다. 『장길산』은 이런 언어들로 가득 차 있다.


3. 같은 장면에 함께 등장하는 표현들


“결새고운 안성유기” (결이 고운 유기)

“장맛나는 서흥옹기” (김장이나 된장 보관 시 맛을 더해주는 전통 옹기)


이 모든 표현들은 ‘지역 명칭+감각 비유+상품 특성 강조’라는 구술 상업 언어를 서사적으로 재현했다.


2. 소설의 주된 서사


왜 내가 박경리의 마음을 읽고 『장길산』이 바로 떠올랐는지 알 수 있는 소설 서사의 대체적인 흐름은 다음과 같다.


황석영의 『장길산』은 1970~80년대 한국 문학에서 보기 드물게 광대를 주인공으로 삼아 민중의 역사와 혁명의 가능성을 조망한 대하 역사소설이다.


조선 숙종 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실존 인물인 의적 장길산의 전설을 토대로 하되, 그를 단순한 영웅으로 형상화하기보다, 농민·광대·백정·승려·유생 등 다양한 주변 인물들의 존재와 고통을 중심으로 역사의 이면을 되짚는 문학적 실험을 감행한다.


『장길산』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정의감으로 봉기를 이끄는 인물이지만, 그의 진정한 내면은 끊임없이 고뇌하고 물러섬을 반복하는 인간이다. 그는 “칼을 드나 그 칼에 물들지 않으려는 자”이며, “민중을 구하겠다”는 이상과 “자기 욕망의 회오리” 사이에서 번민하는 존재다.


무엇보다도 『장길산』은 전통적인 역사소설과 달리, 혁명의 영광을 약속하지 않는다.


소설 속 봉기들은 반복적으로 배신당하고, 혁명의 동지들은 하나씩 무너진다.


관료 체제에 포섭되는 자,

명분을 앞세운 위선자,

더 큰 욕망을 좇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길산은 끝내 “의미 있는 패배”를 선택하는 존재로 남는다.


그는 승리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권력의 무한 반복 구조를 고발한다.


특히 광대 출신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를 전개한 점은, 당시 한국 소설에서는 거의 처음 있는 시도였다.

광대는 조선 사회의 가장 하층 계급으로, 말할 수 없는 자, 역사의 바깥에 존재하던 자다.


그러나 황석영은 이 ‘광대’를 역사의 중심으로 불러내, 말할 수 없었던 자들이 말하기 시작하는 장을 열었다. 이로써 『장길산』은 역사를 승자들의 기록으로만 소비하는 관행에 균열을 가하며, 패배자의 기억과 고통, 실패한 혁명의 감정사를 꿰뚫는 동아시아 민중사적 미학을 제시한다.


결국 『장길산』은 봉기를 다룬 소설이 아니라, 반복되는 배신과 실패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의 ‘존엄한 고집’에 관한 서사다.


황석영은 이를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 혁명이란 가능한가,

그리고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나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라는

윤리적 질문을 소설의 가장 깊은 층위에 배치한다.


- 2부에서 이어집니다.


2부 혁명 이후의 얼굴

휘각과 시산의 대화로 읽는, 존재와 권력, 그리고 희망의 철학


참고문헌

유승환(2016), 황석영 문학의 언어와 양식, 문학박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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