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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 14

걷다

by 이효범

걷다


구녕 이효범


나는 걷는다.

할 일 없어 걷는다.

걷다 보니

걷는 일도 참 할 일이다.

거친 밥도 고맙고

공짜 좋아하는 친구도 밉지 않다.

머리가 희었다고 슬퍼할 일인가.

지갑이 비웠다고 기죽을 일인가.

걷다 보니

고목에 까치집도 새롭고

발아래 큰개불알풀꽃도 인사를 한다.

급히 허리를 굽히니

모두들 살아있다.

세상이 참 공평하다.





후기:

세상에 먹이를 찾아 정신없이 쫓아가는 것은 고달프지만 아무 이해나 목적 없이 두리번거리며 걷는 것은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걷는 길이 물론 가장 기쁘겠지만 가끔은 혼자 걷는 길도 좋을 때가 있습니다. 함께 걸으면 상대방에게 집중해야 하지만 혼자 걸으면 자유롭게 주변 모두에게 사랑의 눈길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퇴직하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을 혼자 걷고 싶었습니다. 그 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며 스페인의 수호성인인 성 여고보의 무덤까지 걷는 길입니다. 그 길에는 다양한 순례 루트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프랑스 남부 국경마을인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시작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약 800km의 ‘카미노 프란세스’ 루트가 가장 유명합니다. 짧게는 30일 길게는 40일 정도 걸립니다. 이 길을 걸으면 평소에 지은 죄가 속죄된다고 합니다. 나는 워낙 많은 죄를 지어 이 길을 몇 번 걸어도 죄가 완전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보다는 이 길을 걸으면서 나의 내면과 솔직하게 조우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아쉽게도 코로나 때문에 갈 수 없지만 스페인과 프랑스가 잠잠해지면 꼭 한 번 걷고 싶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고등학교 동창들하고 알프스 3대 미봉 트레킹을 계획했습니다. 스위스 인터라켄에 있는 융프라우와 마테호흔 그리고 프랑스 몽블랑 트레킹을 대비해서 틈틈이 몸을 만들었는데, 그것도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어 계약금을 돌려받았습니다. 사실 세계에는 걷고 싶은 멋진 길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제 걸을 시간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그 중에서 몇 개나 걸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세계적인 명소를 찾는 일은 너무나 신나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우리 주변도 곳곳이 좋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동양화가 중에 靑田 이상범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산하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린 우리 시골의 평범한 정경이 어떻게 그리 정겨울 수가 있으며 아름다울 수 있습니까. 돼지의 눈이 아니라 부처의 눈을 갖는 것, 그것이 걷기의 요체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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