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의 선물

by lightjc

현관문을 열던 세진은 등으로 문을 기대고 서 있었다. 먼저 나오던 진아가 갑자기 뒤돌아 방 안으로 뛰어갔기 때문이다. 금세 노란색 손가방을 들고 나온다. 퇴사하던 날 남편이 사 온 것이다. 긴 끈이 달려서 어깨에 걸칠 수도 있는 게, 나름 예쁘다. ‘나도 하나 사다 주지’, 살짝 질투가 나기도 했었다.


웃으며 잠시 더 기다리는데, 진아는 문 열린 아빠 방 앞쪽에 앉아 천천히 가방끈을 풀고 있다. 흘끔 아빠를 쳐다보고 끈을 풀고, 다시 한번 쳐다보고 길게 더 풀어내고. 그렇게 천천히, 결국은 어깨에 다 걸쳐 매었는데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세진은 현관문을 열어둔 채,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같이 갈래요, 마트?”


늦게 일어나서 10시는 넘어야 나가는 사람이 오늘은 11시가 넘어가는데도 이불 속이다. 한번 나가면 해가 완전히 떨어져야만 들어오는데 늦게 와서는 밥도 잘 먹지 않는다. 이게 밥이라며 막걸리만 먹는다. 처음엔 배부르다더니 며칠 지나자 다 마신 다음에도 입맛을 다신다. 그래도, 하루에 딱 한 병 씩이다.


“같이 가요, 바람도 좀 쐴 겸, 응?”

“일어나자구…”


“아이…이”

인태는 짜증스런 신음과 함께 획, 이불을 젖히며 일어난다. 불어오는 바람에 세진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진아도 어깨를 움찔한다. 바람을 타고 찌든 막걸리 냄새, 시큼한 땀냄새, 이불속에 갇힌 것들이 ‘어린애다’라고 소리치며 뛰어가는 듯하다. 인태는 펄럭이는 이불을 눌러버린다. 고개를 들자 진아와 눈이 마주친다. 빠르게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비비고는 머리를 쓸어 넘긴다. 그리고 최대한 환하게 얼굴을 고치며 무릎을 세운다. 그렇게 인태가 나름 바쁘게 움직이는데, 진아는 일어나서 아빠에게 다가간다. 그리고는 살며시 그의 어깨를 누른다.


“아빠, 미안해요. 더 주무세요”

아이 손이 살짝 걸쳐졌을 뿐인데, 어깨가 이렇게 무거웠던 적이 없었다. 인태는 털썩 주저앉으며 진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진아야, 요즘에 아빠가 좀 아파서......”

“아빠 아프면 안 돼요. 그러니까 많이 쉬셔야 돼요. 아빠 누우세요.”

진아가 인태의 가슴을 밀더니 아빠 볼에 뽀뽀를 하고 일어난다.

“아빠, 나 금방 다녀올게!”

그러고는 조용히 문을 닫는다. 다 닫지도 않는다. 소리 날까 봐 그러는지.


모녀가 신발 신는 소리, 스토퍼 올라가는 소리, 문이 닫히고 열쇠가 잠기는 소리,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닫히며 내려가는 소리까지 끝났는데도, 인태는 이불을 걷지 않았다. 눈도 감지 않고, 한참 동안 송장처럼 누워만 있었다.


* * *


마트에 간 세진은 늘 하던 대로 먼저 카트를 찾아 아이를 태웠다. 카트 손잡이 앞에 아이들 다리만 끼워서 앉히는 곳인데, 어느새 진아가 발도 크고 허벅지도 토실해져서 앉힐 때마다 꽤 곤혹스럽다. 그리고 사실, 이제는 안아 올리는 것 자체가 힘들다.


어쨌든 준비를 다 마치고 카트를 끌고 가는데, 이리저리 둘러보던 진아가 세진을 쳐다보며 말한다.


"엄마, 나 내려줘"


"왜, 딸기우유 가져오게?"


세진은 '왜, 카트 앉는 게 이제 좀 창피해?'

라고 말하려다 말을 바꿨다. 스쳐 지나간 생각이었는데 엄마 얼굴을 보고 그걸 읽어낸 건가?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걸까. 그러고 보니 딸기우유라고 말한 것도 기분이 좀 상했을 것 같다. 주변에 사람들도 많으니. 그래서 대답을 안 하는 거 같기도 하고.


카트에서 내려온 진아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하다.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있어 신난다거나, 창피함에서 벗어나 후련하다거나 하는 것과는 분명 다른 기분인 것 같았다. 뭔가 할 일이 생겼다는 듯, 빨리 해야 한다는 듯, 내려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는 듯 자뭇 진지한 표정이다.


진아는 내리자마자 어딘가로 쏜살같이 사라진다. 세진은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뛰다가 누구랑 부딪힐 수도 있다. 차라리 물건 쓰러트리는 게 낫지, 다른 카트하고 충돌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다. 애들이 이렇게 빠른 줄 몰랐다. 처음 느끼는 공포. 아이가 눈앞에서 안 보이다니, 사라졌다니.


"우리 공주님, 뭐 하시나요"

"이런 거 만지는 거 아니지요 공주님?"


어느 아주머니의 목소리. 혹시나 해서 급히 카트를 두고 달려가 본다. 진아가 뭔가를 손에 들고 있고 마트 직원인 듯한 아주머니가 웃으며 그걸 제지한다.


"왜 그래요. 나두 이거 살 돈 있어요"


악착스럽게 그 뭔가를 품 안에서 지켜낸 진아는 아주머니가 포기하자 얼른 하나를 더 들고뛴다. 엄마를 발견한 진아는 부리나케 달려온다. 그런데 멈추지를 않는다. 엄마를 지나쳐 그 뭔가들을 카트에 집어넣는다.


아이는 찾아서 다행인데, 진아가 가져온 그것들이 궁금하다. 애가 불쑥 커버렸나. 벌써부터 어른들 물건에 관심을 가지나. 그게 뭘까.


진아는 목적을 달성해서 신난다기보다는 뭔가 뿌듯하다는 표정이다. 뭐가 그렇게 갖고 싶었을까, 뭐가 그렇게 먹고 싶었을까, 아빠 퇴직 이후로 조금 소홀했나. 은근히 미안하기까지 한데......


막걸리다. 이게 뭐지? 그것도 두 병이나


"진아야 이게 뭐야. 이건 아이들 먹는 거 아니야"


"왜요, 아빠가 좋아하는 건데"


진아는 한병 더 가져오려는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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