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인태가 멈칫하는 순간, 세진이 재빨리 진아를 안아서 현관문 앞으로 데려간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진아야, 진아야”
진아가 엄마를 떨쳐내고 현관으로 달려간다. 누군지 더 물어보지도 않고 문을 열자 할아버지가 천천히 손녀를 안아 올린 뒤 들어와서는 신발을 벗는다. 할머니는 조용히 문을 닫고 뒤따라 들어온다.
그 사이 세진은 빠르게 화장실로 갔다. 인태가 엉거주춤 인사를 드리는 사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세진이 미소 지으며 나온다.
"잘 지냈니?"
안진숙 씨가 며느리를 쳐다보며 웃음을 보인다. 성진기 씨는 근심스럽게 며느리를 쳐다보다 손녀를 내려놓고는 방 한가운데 자리를 잡으며 말한다.
"인태 너 이리 와봐, 이리 앉아봐!"
"아유, 살살 얘기해요 진아 놀라잖아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던 진아는 할머니 말에 용기가 났는지, 슬그머니 할아버지 팔을 붙잡는다.
진기 씨는 숨을 길게 내쉬고는, 톤을 낮추며 말한다.
"인태야 우리, 우리 천천히 한번 생각해 보자. 너 원래 안 그러잖아, 차분하잖아. 감정적으로 울컥하는 사람 아니잖아. 근데 뭔 생각으로 그러는 거야!
진기 씨는 다시 톤이 높아졌다.
"니가 뭘 잘못했냐! 나도 얘기 다 들었어. 결젠가 뭐시긴가 알아서들 하라 그래! 손톱만도 못한 지들 허물 털어버릴라고 근 20년 고생한 사람을 내치는데, 잘됐어! 그런 놈들, 진즉에 내쳤어야 했어. 세상 걸리적거리는 놈들, 나오는 날 귀방망이라도 후려....."
다시 높아진 톤에 진아가 흠칫하자, 진기 씨는 다시 한번 숨을 가다듬고 이야기한다.
"너, 장사도 잘했던 거 안다. 근데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걸 어쩌겠냐. 주방 하다 나간 녀석도 그러려니 해. 지 배속 넓히려는 생각밖에 없는 인간들이 태반이잖아"
인태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본다. 거미줄에 걸린 날벌레 몇 마리, 파닥거리는 나방.
헐떡이는 진아를 품으로 끌어안는 세진. 안쓰럽게 그 모습을 보던 진숙 씨도 한마디 거든다.
"애비야, 진아 애미가 무슨 죄가 있냐. 주말에도 마트 나가면서 애 뒤치다꺼리에 집안일에...... 너 숨 쉬는 거 하나라도 거슬리지 않게 다해주잖아. 요즘 세상에, 그런 여자가 어디 있냐."
점점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진숙 씨.
"돈을 안 준다고 타박을 해, 힘들다고 밥을 안 차려줘. 너 진아한테 소리 지르면서 달겨든다고, 그때 딱 한번 저 책인가 뭐시긴가 집어던졌다매. 그거밖에 없다매. 그것도 못해! 애미가 되어가지고, 새끼 둔 애미가 그것도 못해!"
벌게진 얼굴로 두세 번 짧게 숨을 뱉어내는 진숙 씨. 두 손으로 방바닥을 짚고 인태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말을 이어간다.
"너 모르는 거 같아서 말한다. 누구 칭찬하려는 게 아니야! 내가 사돈댁 뵙기도 민망한데 얘한테 해줄 것도 없고 해서, 블라우스 하나 사주면서 그랬다, 너무 미안하다구, 부모 된 인간이 자식 어려운데 도와주지도 못한 내가, 내가 잘못이라고."
옆에 있던 성진기 씨가 눈물을 글썽인다.
"그랬더니 얘가 뭐라 그러는 줄 아냐, 넌 아무 잘못 없데. 넌 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되는데, 사람들이 자꾸 찔러대서 그렇데. 본인도 찔러댄 잘못이 있다구. 세상에나,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아까부터 훌쩍이고 있던 진아 얼굴을 닦아주는 진숙 씨. 곧 터질 듯하다. 손녀와 며느리를 얼싸안고 말을 이어간다.
"우리가 너한테 엎드려서 빌어야지. 시부모 잘못 만나서, 험한 세상 만나서 고생하는 거지 니가 뭘 잘못했어. 우리 인태는 또, 우리 아들은 뭔 죄를 지었어. 가만히 있는 사람, 조용히 잘 지내는 사람 건드리고 밀어버리는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지들도, 지들도 비틀어질 때까지 말려 들어가 봐야 알지..."
인태의 부모는 입술을 달싹이면서 서로의 눈을 피한다. 바닥에 떨어진 시선이 올라올 줄을 모른다. 진아는 두 팔을 뻗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을 잡는다.
진숙 씨는 한 손으로 손녀를 잡은 채, 방 한쪽으로 몸을 기울여 팔을 뻗는다. 진기 씨가 비닐에 쌓인 옷 하나를 밀어준다. 옷을 잡고 끌어들이던 진숙 씨는 팔꿈치로 퉁, 한번 방바닥을 찍은 뒤 상체를 일으킨다. 비닐을 풀어 옷을 꺼내 살펴본 뒤 조심스럽게 다시 접어 인태의 무릎 위에 올려놓는다. 모자 달린 남색 후드티다.
"이거, 에미가 바꿔 온 거란다. 블라우스를 니 옷으로 바꿔왔대"
인태는 계속 창밖만 바라본다. 파닥거리던 나방은 멈춰 있고, 인태는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가끔씩 깜박이는 눈이 '얘기 잘 듣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는 후드티에 손을 올린다. 몇 번 쓰다듬어 본다. 모자도 들춰보고, 주머니에 손도 넣어 보더니 옷 전체를 펼쳐서 가슴 쪽에 대어 본다.
"좋네요."
"주머니도 큼직하고."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딸이 모두 인태를 쳐다본다. 잃어버린 아들, 남편, 아빠를 네 사람이 동시에 찾아낸 듯한 표정이다. 인태가 계속 저렇게 지내 줬으면 좋겠는데.
진숙 씨를 한번, 그리고 진아와 세진을 차례로 돌아본 인태는 바닥에 뒹구는 비닐을 구겨들고는 진기 씨를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읊조리며 일어선다.
"정리해야죠."
인태는 땀에 절은 윗도리를 벗고 후드티를 걸쳐본다. 주머니에 손도 넣어보고 모자도 푹 눌러썼다가 벗어보고. 그는 창밖을 쳐다보며, 거미줄이 흔들릴 정도로 길고 긴 숨을 내쉬어 본다. 각자의 책상 위 먼지를 쓸어내듯 동시에 눈물을 닦아낸 네 사람. 모두 인태만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