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얼어붙은 우연”이란 표현은 “우발과 패턴(마크 뷰캐넌, 시공사)”이라는 책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한 중년 남자의 삶이 멈춘 장례식장.
그곳에 모인 갈매기 떼들. 그들에게 장례식장은 먹거리가 가득한 부둣가일 뿐이었다. 어린아이 손에 들린 새우깡 한 조각을 날쌔게 낚아채는 검은 부리들.
갈매기 하나는 동료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더 높은 나뭇가지'를 계산하고, 또 다른 갈매기는 예정된 '카드놀이'라는 모이를 놓칠까 봐 안절부절이다. 미망인이 된 갈매기는 남편의 죽음이 가져다줄 '연금'이라는 새우깡의 크기를 가늠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들에게 ‘당신’의 죽음은 ‘나’의 일상을 소모시킬 뿐이다. 그런데 어쩌면, ‘잘 나갔던 당신’의 죽음은 ‘나’의 쾌락과 생존에 새로운 파동을 전해줄 수도 있다…..
그 파동의 근원이었던 이반 일리치는 제법 튼튼한 그네를 타고 태어났다. “똑똑하고 활달하고 예의 바른 인물”로서 “항상 품위 있고 사교계에서 인정받는” 구름을 쳐다보며 열심히 발을 굴렸다. 법률학교 졸업, 지사 특별보좌관, 판사직, 그리고 미모가 뛰어나고 재산도 좀 있는 귀족가문 아가씨와의 결혼… 세상의 평판이라는 그네를 더 높이, 더 멀리 보내기 위해 이반 일리치는 세상이 원하는 궤도를 정확히 설정했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기 파동의 진폭을 넓혀갔다.
결혼은 새로운 그네를 요구했다. 태어나는 아이들과 조금씩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는 아내를 위한 ‘다인승 그네’. 그러나 그는 ‘직무’라는 1인용 그네로 갈아탔다. 계속된 승진, 주변의 존경 어린 시선, 늘어나는 권력의식……여전히 가벼운 몸으로 파동을 키워갔다.
그는 점점 더 큰 그네를 원한다. 그런데 그의 승진 자리로 이미 정해져 있던 ‘새로운 그네’는 다른 자가 가로챈다. 태어나는 아이들은 계속 등을 잡아당긴다. 땅에 발이 끌리는 듯한 굴욕감.
뛰어내린다!
그네 따위에 만족할 수는 없다. 진폭이 “연봉 5,000 루블”이면 무엇이든 탈 수 있다. 그의 과감한 도전은 그네를 롤러코스터로 바꿔준다. 땅에 끌리던 발은 “원하던 연봉”과 “두 계급 승진”이라는 바퀴를 타고 뭉게구름처럼 솟아오른다. 이 롤러코스터에는 아내와 아이들도 태울 수 있다.
영원히 내려오지 않을 완벽한 성전(聖殿)이 될 새로운 집! 이건 그가 직접 꾸며야 했다. 커튼 위치까지 스스로 조정하는 섬세함. 그 와중에 사다리에서 발을 헛디디며 옆구리를 다쳤지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아주 순조롭게 잘 흘러갔다”
그런데 흐르던 것이 멈추고, 얼어붙고, 굳어져 갔다. 옆구리에서부터 시작된 삐걱거림은 입안에 정체 모를 쓴맛과 함께 온몸을 짓누르는 불쾌한 감각들을 키우더니 몸 전체를 갉아먹는 끈질긴 고통으로 변해갔다.
육체의 고통은 타인에 대한 증오를 만들어냈다. 그들에게 ‘너’의 고통은 ‘나’의 귀찮음과 괴로움일 뿐이다. ‘다 맡겨두십시오, 우리가 다 알아서 할 겁니다’라고 말하는 의사는 법정에서의 그와 똑같았다. 이제 그는 한가하고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만 하는 일개 ‘환자’였고 법정에서 무수히 보아왔던 ‘피고’ 일뿐이었다.
곧 자리에 물러날 사람을 보듯 조심스럽게 그의 동정을 살피는 동료들, 멀리 있는 카드도 집지 못할 만큼 약해졌다고 보는 친구들…… “도대체 저분은 말을 듣질 않아요. 우리만 괴롭히는 거죠(아내)”,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저러시는 거예요(딸)”…… 누구도 아프지 않았고, 누구도 롤러코스터에서 내리기 싫어했다. 1인용 그네에서 열심히 발돋움하며 진폭을 넓혀가던 예전의 이반 일리치처럼, 그들은 각자의 그네를 타거나 비행을 즐기고 있었다. 얼어붙고 부서지는 건 이반 일리치의 일이었다.
추락의 진폭이 잦아든 순간도 있었다. 가족도 아닌 하인 게라심, 그는 이반의 용변을 치우고 밤새 그의 다리를 어깨에 올려놓고 있으면서도 그가 불편해할까 봐 조심스럽게 시선을 돌려가며 “우린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요. 그러니 수고를 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말할 뿐이다.
여기까지다.
죽음직전, 고통의 몸부림도 부질없다. 신경질이나 증오도 진동을 멈춘다. 이제, 그는 혼자서 검은 자루로 들어간다. 머릿속 가득한 생각만이 그 검은 자루의 입구에서 그를 매달아 놓고 있다. 그를 죽음으로 들어가지도, 삶으로 빠져나오지도 못하게 하며 고통의 검은 자루에서 헐떡이게 만드는 건 “도대체 왜”라는 생각뿐이다.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불행이 생겼을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그때, 자기 손을 잡고 울고 있는 아들, 절망적인 표정으로 바라보는 아내,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 “내가 모두를 괴롭히고 있구나, 용서해 줘…..”
죽기 한 시간 전까지, 그가 붙잡고 있던 것은 세상이 바라는 궤도였다. ‘삶이란 가볍고 즐겁고 품위 있게 흘러가야 한다’는 그 길. 그네에서 롤러코스터로 갈아타며 궤도의 진폭을 넓혀왔고 마침내 파도와 같은 흐름을 만들었다. 그는 혼자 그 흐름을 즐기고 있었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궤도에 타인이 간섭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었다. 아내의 하소연,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재판을 받는 당사자들의 호소는 그와 무관한 얼음들이었다.
그는 흐름이었고 다른 이들은 얼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만 얼음이 되었고 아내와 딸과 친구들 모두 각자 흘러가고 있었다. 가족이나 직장동료나 의사나 모두 자기 진폭을 넓혀갈 뿐 얼음이 된 자신을 외면해 왔다. 예전에 이반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평생을 외면해 왔던 얼음의 하나로 변해버린 자신, 그런 운명을 원망하며 고통에 신음하다 검은 자루로 들어가기 직전의 그 순간, 아들의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그가 쌓아 올린 견고한 빙벽에 떨어졌다. 얼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왜 나만?’이라는 얼어붙은 질문이 ‘나 때문에’라는 따뜻한 연민으로 녹아내리며, 그를 옭아매던 검은 자루의 저항은 힘을 잃었다. 그는 더 이상 흐름의 중심이 아니었다. 다른 이를 얼어붙게 만드는 고통의 근원이었다. 그 진실을 마주하자, 그를 밀어 넣던 힘은 사라지고, 그는 빛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높이, 멀리, 그리고 최대한 빠르게……이건 “혼자여야” 가장 빨리 할 수 있는 일이고 “앞만 봐야” 먼저 갈 수 있는 길이며, “나만 생각해야” 몸이 가벼워져 높이 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전의 그에게 누군가의 외침은 소음으로 들리고 얼음으로 보였다. 그렇게 혼자만의 얼음으로 굳어져 가던 그는, 검은 자루의 입구에 도달하기 직전에 갑자기 얼음을 녹여냈다. 맹목적으로 새우깡을 낚아채는 갈매기의 부리가 아니라, 얼어붙은 타인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손이 만져졌던 것이다.
빛이 쏟아졌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가 아니라, “죽음은 끝났다”는 환희였다.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공포였던 허황된 삶의 파동이 마침내 멈춘 것이다. 그가 탔던 화려한 그네들은 사라졌지만, 그는 서서히 진폭을 멈춰가며 조용히 땅에 발을 딛고 평온을 얻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