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엄마와 선생님
건우의 이웃 주민 아주머니와 아파트 경비원으로부터 무시무시한 사실을 전해 들은 보람은 충격에 휩싸였다. 두 사람 말에 의하면 건우의 집에서는 오랫동안 가정폭력이 일어나고 있었다. 의처증이 심한 남자가 술을 마시면 아내를 모질게 추궁하다 아이들한테까지 손을 뻗는다는 거였다. 보람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얼마 전에 건우의 몸에 나 있던 멍을 떠올렸다. 놀이터에서 놀다가 생긴 거라는 말에 남자애라면 그럴 수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실상은 학대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그 멍을 보고도 학대를 의심하지 않고 사진으로 찍어둘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자신이 너무도 한심스러웠다.
905호 아주머니는 남매가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해 일부러 공부도 열심히 하고 말썽도 부리지 않는 거라며, 아이들이 직접 한 말들을 덧붙였다. 그렇게 힘든 환경에서도 꽃을 피우려던 아이들이 지금은 달라진 것이다. 건우는 방학 숙제도 해오지 않고 수업시간에 집중도 제대로 하지 않을 정도로 학업에 소홀해졌는데, 중학생인 건우의 누나는 요즘 불량한 남학생들과 밤늦게까지 어울려 논다고 했다. 가정폭력 피해 아이들의 심경에 찾아온 어떠한 변화가 남매를 좋지 않은 길로 밀어 넣고 있었다.
아파트 경비원으로부터 경찰에 신고했을 당시에 상황이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를 전해 듣고서 보람은 건우의 심경이 변화한 시점이 그날부터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했다. 경찰이 찾아왔음에도 집에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면 매일 아빠의 폭력을 견뎌내던 아이들은 충분히 무기력함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다. 분명 함께 맞고 살았음에도 경찰 앞에서 아빠의 편을 드는 엄마에게 느낀 배신감, 경찰도 무지막지한 아빠의 폭력을 멈추지 못한다는 실망감. 이런 감정들이 뒤섞이면서 단단했던 건우의 마음의 벽이 무너진 건 아니었을까.
905호 아주머니는 자신들이 경찰에 한 번 신고했음에도 달라진 게 없으니 학교 차원에서 어떻게 조치를 해줄 순 없냐고 물었다. 이에 보람은 그렇게 하겠다는 확답을 선뜻 내놓지 못했다. 우선 학생의 가정폭력의 사실을 알았으니 방법을 찾아보겠다는 두루뭉술한 대답만 내놓고서 갑작스레 이루어진 삼자대면을 마쳤다.
보람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로서 학교 학생, 그것도 담임으로 맡은 아이의 가정폭력 피해 사실을 알았으면 즉시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아닌데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먼저 학교에 보고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덜컥 경찰에 신고부터 했다가 뒤늦게 학교에 소식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윗선에 보고도 없이 단독 행동한 거냐며 꾸중을 들을까 봐 겁났다. 스스로 초임 티를 벗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보람에게 이 사건은 혼자 모든 걸 감당할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다음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한 보람은 곧바로 친한 동료 교사 예진에게 달려가 어제 있었던 일을 알렸다. 그동안 보람이 건우 얘기를 몇 번 했던 걸 알고 있어서인지 예진은 많이 놀란 눈치였다. 보람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조언을 구하자 예진은 학년 부장 선생님께 한번 말씀드려보라고 했다. 보람보다 2년 선배인 예진도 윤호 일을 제외하면 재직 중에 경찰에 신고해야 할 만큼 심각한 가정폭력 사례를 접한 적이 없어서 자기도 어떤 절차를 거쳐 신고해야 하는지 잘 모른다고 했다. 예진의 조언대로 학년 부장 규현을 찾아간 보람은 그동안 건우를 관찰한 내용과 어제 아이의 집에 갔다가 같은 층 이웃에게 우연히 들은 이야기를 모두 털어놨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기가 막혔다.
"일단 조용히 있어."
"네?"
"학대 상처 찍어둔 사진도 없고, 애가 한보람 선생한테 직접 말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
"증거라도 있어야 경찰에 신고하든가 하지. 괜히 증거도 없이 신고부터 했다가 별일 아니면 어떡할 거야. 학부모 민원 감당할 수 있어?"
학년을 대표하는 선임 교사로서 뾰족한 대책을 내놓으리라 기대한 것과 달리 규현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보람은 우물쭈물하며 규현의 눈치를 봤다.
"안 그래도 다음 달 학부모 공개수업 때문에 다들 바쁜데 괜히 일 만들지 마. 3년 만에 시행하는 거라 교장, 교감 선생님 지금 엄청 예민한 거 한 선생도 잘 알잖아. 일단 지켜보고, 확실해지면 그때 다시 이야기해."
더 이상 말을 말라는 듯 단호한 지시였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규현의 반에서 나온 보람은 허탈하게 웃었다. 2학기가 시작된 이후부터 줄곧 이어진 고민에 대한 조치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라니. 경찰에 즉시 신고하느냐 학교에 보고 먼저 하느냐로 머리를 싸맸던 지난밤의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조용히 있으라는 얘기나 들을 거였으면 차라리 신고부터 할 걸 그랬다고 보람은 뼛속 깊이 후회했다.
5학년 2반 교실은 등교한 아이들로 소란스러웠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은 저마다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교실에 들어온 보람을 반겼다. 보람도 아이들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주며 슬쩍 건우를 찾았다. 가운데 줄 중간 자리에 앉아있는 건우는 보람과 눈이 마주치자 급히 시선을 돌렸다. 마스크에 반이나 가려졌지만 침울함이 드러나는 얼굴을 보고 보람은 그만 울컥했다. 붉어진 눈시울을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아침 조회도 미루고 교사 화장실에서 한참이나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건우를 데려다주던 날, 고민이 있으면 편지나 문자로 말해도 된다고 분명 이야기했으나 건우는 보람을 찾지 않았다. 보람이 쉬는 시간이나 바깥 활동 시간에 건우에게 다가가면 아이는 친구들한테 가는 척 자리를 옮겼다. 보람은 아이가 자신을 일부러 피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집 앞에서 엄마와 셋이 마주친 그 일이 아이에겐 담임 선생님을 피해야 할 만큼 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건우와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이후로 보람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자신이 아빠에게 학대당하는 아이를, 심지어 담임으로 맡은 아끼는 제자의 고통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선생님이라서 부끄러웠다. 절차가 뭐라고, 상사가 뭐라고, 행사가 뭐라고, 조용히 있으라는 말을 얌전히 따라야 하는가. 가정폭력의 피해자를 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가 있다고.
학년 부장과의 대화 내용을 알고 있는 예진마저 규현의 말을 따르는 게 옳은 것 같다며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보람을 위로했다. 보람에겐 모두 방관자였다. 예진도, 규현도, 별일 아닐 거라고 단정 지었던 동료 교사들도, 학생의 안전과 행복보다 학부모에게 잘 보이는 게 먼저인 학교도,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을 알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기 자신도. 아이의 행복은 모두 어른에 의해서 망가진다 사실을 깨닫자 괴롭고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가정폭력 신고하려고 전화했는데요."
그들과 같은 방관자가 되지 않겠노라. 보람은 마음을 굳게 먹고 112에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렸다.
신고 당시 자신을 가정폭력 피해자의 담임 선생님이라고 밝힌 보람은 경찰이 출동했다가 아무런 조치 없이 다시 돌아가는 일이 없게 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가정폭력으로 인해 아이의 성격이 어둡게 변하고 학업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아이의 누나는 가정 밖에서 행실이 좋지 않은 남학생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는 것도 설명했다. 이대로 아이들을 방치했다간 큰 문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보람은 한시라도 빨리 아빠와 아이들을 분리하고 심리치료 등 적절한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아이들의 엄마도 가정폭력의 피해자임을 알리며 남편의 강압에 의해 폭력 사실이 없다고 거짓 진술을 할 우려가 있음을 지적했다.
학교에 신고 사실을 알리지 않을 생각인 보람은 경찰에게 제보자 신상 익명 보호를 해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그 후 진행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연락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애타는 심정으로 보냈다. 보람은 아침마다 등교하는 건우를 보면 밤새 별일 없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으나 아이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어 일단은 차분히 기다렸다. 그리고 신고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경찰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보람은 경악했다.
"애들한테 피해 사실을 확인하고 지역 보호소로 이번 주말까지 아빠랑 분리 조치를 해놨는데, 문제는 아이들 엄마예요. 그냥 부부 싸움하다가 한두 번 손찌검이 오간 것뿐이고 애들은 훈육하다 보면 부모가 때릴 수도 있는 게 아니냐면서 남편을 엄청나게 감싸요."
현재 아이들의 아빠는 누가 자기를 가정폭력범으로 신고한 거냐면서 주변 이웃들을 의심하는 중이라고 했다. 순간 보람은 겁이 났지만 신고자 신상 보호는 철저하게 이루어질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경찰의 말을 듣고 안심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의 엄마가 남편의 가정폭력 사실을 계속 부인한다면 남편은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을뿐더러 보호소에 있는 아이들도 결국 아빠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엄마가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야 피해 사실을 토대로 남편을 가정폭력 특례법이나 아동학대 특례법으로 처벌할 수가 있다며 경찰은 아이들 엄마와 대화를 시도하는 중이라고 했다.
보람은 경찰에게 추후 진행 상황도 꼭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신고자인 동시에 아이의 담임 선생님으로서 건우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면 무엇이든 지원하고 싶어서였다. 잠시뿐이지만 아빠에게서 벗어나 누나와 함께 보호소에서 지낼 건우가 괜찮은지 아닌지도 확인할 길이 없어서 보람은 답답하기만 했다. 우선 경찰이 아동학대 전담 공무원과 함께 엄마를 설득할 예정이라고 했으니 부디 좋은 방향으로 풀리길 기대했다.
즐거운 금요일이지만 행사 준비 때문에 퇴근 시간이 훌쩍 넘었음에도 퇴근하지 못한 보람은 하던 업무를 겨우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를 나오며 돌아보니 꽤 많은 교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다들 수업 준비며 행사 준비며 행정업무까지 할 일이 산더미라 교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다른 선생님들에 비하면 일찍 퇴근한 편이라 다행이었다. 보람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문밖을 빠져나갔다.
"선생님."
그런데 교문 근처에서 선생님을 찾는 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호칭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보람은 이내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고 크게 놀랐다.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에서 언짢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그녀는 분명 건우의 엄마였다.
예기치 못한 만남인 데다가 건우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람은 바짝 긴장했다. 다가오는 그녀에게 웃으면서 인사했으나 돌아온 것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질문이었다.
“선생님이죠. 애들 아빠 경찰에 신고한 사람.”
“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선생님밖에 없는 것 같아서요. 저번에 건우 데리고 집까지 찾아오신 것도 그렇고.”
이미 확신하고 찾아온듯한 건우의 엄마에게 보람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시치미 떼지 못했다. 곤란해하는 보람을 보고 건우의 엄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 쉬었다.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지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거나 이마를 짚으며 머뭇거렸다. 보람은 우선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 나누는 게 어떻겠냐고 건우 엄마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마침 학교 앞에 작은 카페가 있어서 두 사람은 그곳으로 향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결제한 보람은 유리컵에 나온 커피를 들고 건우 엄마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갔다. 팔짱을 끼고서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커피를 흘끗 보더니 보람에게 시선을 맞췄다.
“선생님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일단 애들 아빠한텐 말 안 하고 와본 거예요. 솔직히 아니길 바랐는데 진짜 선생님이 신고하셨을 줄이야. 기가 막혀.”
이런 문제로 학부모와 대면으로 이야기하는 일이 처음이라 보람은 심장이 두근두근 뛸 만큼 무서웠다. 그래도 이 기회에 건우의 상태를 자세히 말씀드리고 그녀가 경찰에 협조할 수 있도록 설득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선생님 때문에 우리 집이 어떻게 됐는지 아시냐며 타박하는 그녀에게 보람은 뭐든 다 말씀해달라고 진지하게 부탁했다. 경찰의 말대로 건우의 엄마는 남편을 감싸기만 하며 아이들과 강제로 떨어지게 만든 보람을 원망했다.
“집이 떡하니 있는데 애들이 밖에 나가서 자는 게 말이 돼요? 보호소인지 뭔지 거기 사람들을 어떻게 믿겠냐고요 내가.”
네. 어머님 마음 다 알죠. 그러시겠어요. 공감의 리액션만 짧게 하는 보람에게 울화를 분출하다시피 말을 쏟아낸 건우 엄마는 숨을 골랐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찾아왔다. 말을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길어지는 침묵에 내내 고민하던 보람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런데 어머님, 아이들한테 물어본 적은 없으세요?”
“뭘요?”
“아빠 때문에 힘들지 않은지, 집에 들어오기 싫지는 않은지. 이런 아이들의 솔직한 마음을요.”
“그건...”
보람의 질문에 그녀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어머님, 아이들은 어쩌면 집이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을지도 몰라요.”
보람은 그날 어쩌다 건우를 데려다주게 된 것인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방학 이후에 의기소침해지고 어두워진 건우의 변화를 자세히 말하며 혹시 이런 변화를 알고 있었는지 물었다. 역시나 건우의 엄마는 전혀 알지 못했다는 양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보람이 우연히 만난 이웃 주민에게 들은 이야기까지 차근차근 전하자 날카로웠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풀어지더니 곧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 아이들이 착하고 바른 아이로 살았던 건 어머님을 위해서였대요. 어머님이 아버님 때문에 힘드시니까, 어머님께 짐이 되지 않으려고 그 어린아이들이 아프고 힘든 걸 참아가면서 버텼어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건우 엄마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처음엔 울음소리를 삼키려는가 싶더니 얼마 안가 소리까지 내며 흐느꼈다. 듣기에도 서러움이 묻어 나오는 소리였다.
보람은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고 그녀의 감정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울음소리가 멎었을 때쯤 천천히 운을 뗐다.
“이번에 건우가 해온 방학숙제를 읽었어요. 어머님을 인터뷰했더라고요.”
“네...”
“어머님의 소원이 아이들의 엄마로서 가정을 지키는 것이라고 쓰여있던 게 기억이 남아요.”
“...”
“어머님께서 가정을 지키려고 할수록 아이들의 마음은 오히려 병들고 있어요. 어머님의 마음도 같이요.”
보람의 말을 듣고 한동안 가만히 커피잔만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맞고 사는 것이 힘들어서 이혼도 여러 번 고민했지만, 경제권이 남편에게 있어서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고. 그리고 만약 이혼하게 되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아빠 없는 애라는 놀림을 받을까 봐 미우나 고우나 집에 아빠와 남편이라는 존재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결국엔 이혼을 포기하게 된다고. 코를 훌쩍이며 속내를 털어놓은 그녀는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혼자서만 생각하고 판단해왔던 자신을 책망했다.
보람은 건우 엄마의 마음을 전적으로 공감해주고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한 조치들을 설명해주며 어머님께서 용기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님께서 용기를 내야 아이들이 행복해지고 어머님도 행복해질 수 있음을 강조했다. 선뜻 긍정의 대답을 하지 못했던 그녀는 한참 상념에 빠져있더니 알겠다고 대답했다. 가슴을 쓸어내린 보람은 그녀에게 감사하다고 진심을 표현했다.
두 시간이 넘는 대화를 마치고 카페에서 나온 두 사람은 횡단보도 앞에 섰다. 들어갈 때와 달리 밖에 나온 건우 엄마의 얼굴은 한결 후련해 보였다.
"선생님 혹시... 경찰에 신고하신 거 학교도 알고 있나요?"
신호등이 켜질 무렵에 건우 엄마가 물었다. 보람은 아무도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안도하는 표정을 지은 건우 엄마는 보람에게 부탁했다. 건우 친구들이 알게 되면 아이가 상처받을 수 있으니 부디 비밀을 끝까지 지켜달라고. 보람은 꼭 그럴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녀를 안심시켰다. 신호등에 초록 불이 켜지고, 길을 건너는 건우 엄마에게 보람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녀 역시 몇 번이고 뒤돌아 보람에게 인사했다.
건우의 엄마가 택시를 잡고 떠날 때까지 건너편에서 바라보던 보람은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야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였다. 무려 두 시간이나 폭풍이 휘몰아치고 간 여파가 상당히 컸다.
보람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왜인지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났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건 후회나 자책의 눈물이 아니었다. 아마도, 기쁨과 보람의 눈물일 것이었다.
경찰에게 다시 연락이 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평소처럼 등교하고 평소처럼 친구들과 잘 지내는 건우를 보며 집안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했던 보람은 경찰의 연락을 받고 크게 기뻐했다. 방어적이었던 건우 엄마는 태도가 바뀌어서 남편이 가족에게 저지른 폭행 사실을 모두 증언하고 경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가 남편 몰래 찍어둔 자신과 아이들의 상처 사진까지 증거로 제출하면서 건우의 아빠는 가정폭력 혐의로 체포되었고, 일시적으로 가족에게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졌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해 남편과 이혼할 의향이 있다고 밝힌 건우의 엄마는 여성가족부에서 지원해주는 가정폭력 피해자 무료 법률 상담을 받으며 이혼 절차를 밟을 예정이라고 했다.
접근금지명령 때문에 아빠가 집에서 퇴거했으니 보호소에 있던 건우 남매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아이들은 더 이상 집에 들어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아도 되는 거였다. 비록 접근 금지 명령이 일시적인 조치이지만, 경찰은 남편이 가정폭력 특례법에 의해 처벌받고 피해자 가족들이 하루빨리 폭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도록 여러 기관과 연계해서 수사와 지원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모든 이야기를 전달받은 보람은 어렵게 용기를 내주신 건우 어머님이 그저 너무 감사할 뿐이었다.
일이 좋은 방향으로 풀리고 있다는 걸 알아서일까. 보람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건우의 표정이 밝아지고 활기가 생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둡고 의기소침해 보였던 모습이 많이 사라지면서 꼭 여름방학 전의 건우로 돌아온 느낌을 받기도 했다. 밝고 씩씩했던 당시에도 가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지만, 이제는 건우가 상처를 씻어내고 엄마와 누나와 함께 행복을 이루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랐다.
[제37회 학부모 공개수업의 날]
시간이 흐른 10월의 어느 날, 모든 교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다는 학부모 공개수업이 열렸다. 3년 만에 시행되는 행사인만큼 학부모들의 참여도가 꽤 높았다. 교문 위에 커다랗게 걸린 현수막을 아래를 지나 부랴부랴 출근한 보람은 수업 준비와 학부모님들을 맞을 준비로 아침부터 분주했다. 하나둘 등교한 반 아이들은 오늘 학교에 엄마랑 아빠가 온다며 잔뜩 들떠있는 상태였다. 처음 해보는 공개수업이라 속이 바싹 타들어가는 보람은 신바람 나있는 아이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을 만큼 정신없었다.
체육관에서 공개수업 설명회를 듣고 온 학부모들이 하나둘 복도에 모이기 시작했다. 보람은 공개수업을 찾아와 준 학부모들과 직접 인사를 나누며 그들을 교실 안으로 맞이했다. 아이 열한 명의 엄마 또는 아빠는 기대에 찬 얼굴로 교실 뒤편에 일렬로 섰다. 누군가는 뒤돌아 히죽히죽 웃는 자기 자식에게 손 흔들며 인사를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엄마! 하고 크게 부르는 아이에게 조용히 하라며 검지 손가락을 세우기도 했다. 열 한 명의 학부모 중에서도 단연 보람의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건우의 엄마였다.
그녀는 보람과 인사를 나눌 때 이전에 본 적 없던 수줍은 눈웃음을 지으며 보람을 바라봤다. 보람은 그녀에게 잘 지내셨냐며 다른 부모들에게 한 것과 똑같은 질문을 했으나 속에 담긴 뜻은 많았다. 그걸 눈치챘는지 건우의 엄마는 선생님 덕에 잘 지내고 있다며 항상 감사하고 있다는 말을 건넸다. 그 대답에 용기를 가득 얻은 보람은 한껏 자신감 있는 자세로 교단 앞에 섰다.
"자, 여러분. 우리가 이번 수업에서 이야기해볼 주제는 바로 행복이에요."
칠판에 행복 두 글자를 크게 써놓은 보람은 3교시 국어수업의 서막을 알렸다. 뒤에 지켜보는 부모님들이 있어서 그런지 아이들은 평소보다 진지하게 수업에 집중했다.
보람은 열심히 준비한 수업자료를 TV 화면에 띄워놓고 이번 시간에 함께 읽어볼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에게 질문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이냐고. 그러자 아이들은 너도나도 손을 들어 대답하길 원했다.
한 아이는 맛있는 걸 먹을 때 행복하다고 했고, 한 아이는 재밌는 유튜브 영상을 볼 때 행복하다고 했고, 한 아이는 가족들이랑 놀러 갈 때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정의와 행복을 느끼는 이유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다양한 답변이 나오자 학부모들은 저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명만 더 이야기해볼까요?"
발표하지 못한 아이들이 다시 번쩍 손을 들었다. 보람은 누구를 선택할까 고민하다가 힘차게 손들고 있는 건우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건우가 한번 말해볼래? 보람이 말하자 건우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엄마가 웃는 걸 볼 때 제일 행복해요!"
기특한 대답에 학부모들이 감탄사를 보냈다. 보람 역시 눈썹을 으쓱하며 아이를 바라봤다. 모두의 이목이 건우에게 집중되었을 때, 딱 한 사람. 건우의 엄마만 아이를 바라보지 못했다. 가장 끝에 서있던 그녀는 건우의 대답을 듣더니 뒤를 돌아 손으로 눈가를 닦았다. 보람은 그녀가 현재 느끼는 감정이 무엇일지 잘 알 것 같아 덩달아 코끝이 찡했다.
"맞아요. 건우가 엄마가 웃는 걸 볼 때 제일 행복한 것처럼, 선생님은 여러분이 밝고 씩씩하게 웃는 걸 볼 때 제일 행복하답니다."
감정을 추슬렀는지 그녀는 다시 뒤돌아 붉어진 눈가로 건우를 바라봤다.
"어떤 사람은 행복이 저 멀리 있고 나는 영영 가질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곤 해요. 그렇지만 행복은 늘 우리의 가까이에 있고 찾기 쉬운 곳에 있어요. 선생님은 우리 5학년 2반 친구들이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훌륭한 학생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보람은 사랑하는 아이들을 한눈에 담으며 진심을 전했다. 그에 화답하듯 아이들은 모두 반짝이는 눈빛으로 보람을 바라봤다. 아이들과 마음이 통하고 있음을 느끼는 지금 이 순간, 보람은 교사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어느 때보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고 어떻게 얻는 걸까. 사람이 살아가며 한 번쯤 해볼 그 문제를 보람도 늘 고민하며 해답을 찾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고민하지 않아도,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행복은 언제나 나와 우리의 곁에 존재하고 있음을 아이들을 가르치며 많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보람은 모두에게 이야기한다. 가까이 존재하는 행복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고. 그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며, 누구든지 해낼 수 있는 아주 쉽고 간단한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