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 일보의 기적
민서가 정호에게 다시 찾아온 것은 이틀 후였다. 점심때가 되어갈 무렵, 정호가 분리수거장을 정리하고 있는데 민서가 훌쩍 다가와 인사했다. 정호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민서는 신문 만들 때 쓸 사진이 더 필요할 것 같다며 사진을 몇 장 더 찍어도 되는지 물었다. 정호는 흔쾌히 그러라고 허락했다.
민서는 정호를 따라다니며 핸드폰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분리수거장을 정리하는 모습, 아파트 순찰 도는 모습, 아파트 입구를 청소하는 모습, 좁고 더운 경비실에서 도시락을 먹는 모습 까지. 정호는 사진을 찍는 내내 이 일은 왜 하는 것이고 힘들지는 않은지 재잘재잘 질문하는 민서가 귀엽고 기특하기만 했다. 민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은 정호는 아파트 앞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 왔다. 경비실 안에서 민서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하는 인터뷰도 꽤 재미있었다.
"근데 여기 너무 더워요 할아버지. 아이스크림이 벌써 녹고 있어요."
"다 녹기 전에 얼른 먹고 들어가. 부모님이 걱정하시겠다."
"엄마한테 말하고 나와서 괜찮아요."
5학년이라는 민서는 성격이 참 똑 부러지고 야무졌다. 손녀가 나중에 커서 이런 아이가 되면 좋겠다고 정호는 생각했다. 그러다 번뜩, 902호에 사는 아이들이 떠올라서 민서에게 물었다.
"너 혹시 저기 101동 902호에 사는 남자애 알아? 걔도 5학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남자애요?"
"왜 머리 덥수룩하고 삐쩍 마른 애 있잖아."
"아, 박건우요?"
민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정호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랑 아파트 근방에 가까운 초등학교가 한 군데뿐이라 이 동네 사는 아이들은 대부분 명화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물은 건데 아니나 다를까 민서는 건우가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애라고 말했다.
"걔랑 친해?"
"아니요. 3학년 때 계속 온라인 클래스로 수업 들어서 반 애들이랑 만난 적이 별로 없어요."
"그래? 그럼 요즘은? 건우가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잘 지내?"
"음... 그런 것 같아요. 걔 공부도 잘해요. 아마 지금 반에서 부반장일걸요?"
건우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정호는 가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아이가 학교에서는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공부도 잘한다고 하니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건우 얘기는 왜 묻는 거냐는 민서에게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기에 그냥 자주 보는 아이라 궁금했다고 얼버무렸다. 민서도 건우에게 딱히 흥미가 없는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다 먹었으니까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래. 신문 만들면 이 할아버지도 보여주고."
"당연하죠! 안녕히 계세요."
밝게 웃으며 인사한 민서는 뒤돌아서 폴짝폴짝 뛰어갔다. 정호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이 주인공인 신문이 어떻게 만들어질지 내심 기대했다.
정호는 경비실 에어컨 설치 안건으로 입주민들에게 찬반 조사를 다시 실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6월에 했을 땐 동의 수가 절반 정도에 그쳐 에어컨 설치가 무산됐는데, 두 달이 지난 지금 조사 결과가 과연 그때와 얼마나 다를지에 대해 정호는 솔직히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기대해봤자 돌아오는 건 실망뿐이었으니 한두 달만 지나면 여름도 다 간다는 마음으로 무더운 나날들을 버텼다.
집집마다 동의서를 돌리는 일은 경숙이 맡았다고 했다. 경숙은 오후에 하던 재가방문 요양이 중단되면서 시간 여유가 많아졌으니 자신이 동의서를 돌리겠다며 나섰다고 한다. 동의서를 돌리러 가기 전에 경비실에 들른 그녀는 자기가 입주민들에게 잘 이야기해볼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정호에게 일렀다. 입주민 대다수는 있든지 말든지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경비원을 이토록 생각해주고 노력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했다. 정호는 경숙에게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막상 동의서가 집집마다 돌아갔을걸 생각하면 결과가 어떨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정호가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여름 철에 가장 힘든 점은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더위였다. 근무시간 대부분을 선풍기와 부채에 의지한 채 경비실 안에서 지내야 하는데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런 환경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30도를 넘나드는 날씨에 분리수거장을 정리하다가 골이 띵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 모 경비원이 과로사로 쓰러지거나 죽었다는 뉴스를 접하면 남일 같지가 않아 무서웠다.
이번엔 정말로 에어컨 설치를 할 수 있을까. 기대 반 걱정 반인 마음으로 하루를 쉰 정호는 다음날 여느 때처럼 새벽 일찍 나와 동산07 버스를 탔다. 버스에 몸을 싣는 순간 시원한 공기가 피부에 닿으면서 일하는 동안 더위 걱정을 하지 않을 버스 기사가 새삼 부러웠다. 버스가 명랑 아파트에 가까워질수록 이 시원함도 끝이라는 생각에 아쉽기만 했다.
"오늘도 일찍 오셨구먼."
"버스 타려면 일찍 나와야 돼. 내가 늦으면 동생이 퇴근을 못하잖어. 별 일은 없었고?"
"별 일은 없었지."
경비원 선후배 사이지만 형님 동생 하며 가까워진 정호와 영남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열악한 경비원 생활을 버텼다. 버스 시간 때문에 20분 일찍 출근하는 정호는 영남이 퇴근하기 전까지 각자 근무하는 동안 아파트에 발생한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둘이서 24시간 교대근무이다 보니 함께 일할 시간이 없어서 교대시간이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때였다.
"근데 형님, 그 종이 보셨어?"
"종이? 무슨 종이?"
"못 봤으면 이따 한번 가서 봐보셔. 몇 호 사는 애인지 몰라도 아주 맹랑하게 잘 써놨더라고."
"써놔? 뭔데 그래."
"아 직접 가서 보셔. 사진은 또 언제 그렇게 찍었대. 아무튼 난 이만 갑니다. 수고하셔요."
퇴근 복장으로 갈아입은 영남은 손바닥을 눈썹 앞에 갖다 대며 웃었다. 어딘가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영남이 한 말의 의중을 당최 모르겠는 정호는 저벅저벅 걸어가는 영남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오전 순찰을 돌 겸 밖으로 나온 정호는 영남이 말한 종이가 어디 있는지 찾으러 갔다. 투박한 운동화를 신은 두 발은 경비실과 가장 가까운 101동으로 향했다. 보통 아파트 내 공지사항은 각 동 1층 게시판이나 엘리베이터 안에 게시해놓았다. 그래서 당연히 게시판을 확인하려던 정호는 투명한 아파트 현관문에 붙어있는 어떤 종이를 발견했다. 누가 이런 걸 붙여놨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까이 다가갔다가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명랑 일보>
명랑 아파트의 든든한 경비원 곽정호 할아버지를 소개합니다.
알록달록한 글씨로 쓰인 명랑 일보 네 글자 밑으로 손으로 직접 쓴듯한 줄글이 이어졌다. 정호는 크고 반듯한 글씨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글의 내용은 얼마 전 민서와 주고받았던 인터뷰를 토대로 경비원이 아파트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하는지 소개하고 있었다. 종이엔 세 장의 사진도 함께 붙어 있었다. 분리수거장을 정리하는 정호의 모습, 도시락을 먹는 정호의 모습, 좁은 경비실에 앉아 환하게 웃는 정호의 모습. 모두 민서가 찍은 것이었다.
[이렇게 24시간 아파트를 위해 애를 쓰시는 경비원 할아버지는 에어컨도 없는 좁은 경비실에서 밥을 먹고 잠도 자고 있어요. 경비원 할아버지가 힘내서 일할 수 있게 경비실에 꼭 에어컨 설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103동 권민서 기자]
정호는 마지막 문단까지 읽었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입주민들에게 때로는 갑질의 대상이 되고, 때로는 주차요원 내지 청소부 취급을 받고, 때로는 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며 일해왔다. 그런데 입주민 중 누군가가 자신을 아파트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라고 말해준다는 것은 경비원이 하나의 직업으로서 존중받고 나라는 사람 자체를 존중받는 기분을 들게 했다.
민서가 만든 신문은 101동뿐만 아니라 102동, 103동 입구에도 붙어있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입구를 드나들다가 볼 수 있도록 여기에 붙여놓은 듯했다. 민서의 세심함에 또 한 번 감동받은 정호는 가슴이 벅차올라 자꾸만 눈물이 고였다.
"아저씨! 경비 아저씨!"
민서로부터 얻은 위로에 정호가 오늘따라 힘든 줄도, 더운 줄도 모르고 즐겁게 바깥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경숙이 아파트 주변을 청소하고 있는 정호를 멀리서 불렀다. 정호는 빗자루질을 멈추고 경숙에게 뭐가 그리 급하냐고 물었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경숙은 한껏 호들갑을 떨었다.
"아저씨, 이번에는 정말로! 에어컨 설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
"제가 방금 집집마다 돌면서 동의서 다 걷어왔는데 글쎄 여태 수거한 종이만 봐도 찬성한 사람이 훨씬 많았어요."
"세상에.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다니까요! 그 103동 애가 종이 붙여놓은 거 보셨어요? 다들 그거 보고 찬성으로 마음 돌렸나 봐요. 누군지 몰라도 기특해 죽겠어."
얼떨떨한 정호와 달리 경숙은 손뼉까지 치며 기뻐했다.
"내가 얼른 부녀회장님 부추겨서 에어컨 알아보라고 말씀드릴게. 더워도 며칠만 참으셔요. 아셨죠?"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정호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하지만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경숙을 보고 있으니 그녀 역시 경비실 에어컨 설치를 위해 두 팔 벗고 나서 준 인물이란 걸 깨달았다. 정호는 경숙에게 고맙다 말하며 여러 번 고개를 숙였다.
"아유, 됐어요. 아저씨가 애쓰는 것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안 했지. 동의서 결과 나오면 내가 또 와서 얘기할게요. 수고하셔요!"
쾌활하게 웃고서 자리를 떠난 경숙은 101동 안으로 들어갔다. 정호는 그제야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잠시 멈췄던 빗자루도 조금 전보다 더욱 힘찬 박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찬반 조사 결과, 80%가 넘는 입주민이 경비실 에어컨 설치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왔다. 따라서 명랑 아파트 경비실에 드디어 에어컨 설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부녀회장으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정호는 감개무량했다. 만약 이번에도 반대 여론이 많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일찌감치 체념하려 했는데 예상을 뒤엎고 과반수가 훌쩍 넘는 입주민들이 에어컨 설치에 동의를 해준 것이다.
입주민들의 마음을 움직인 데에는 역시 민서가 붙여놓은 명랑 일보의 공이 컸다. A4용지에 만든 신문을 복사해서 각 아파트 입구에 붙여놨었다는 민서는 신문의 최종 완성본을 만들어 정호에게 선물했다. 아파트 입구에 붙여놨던 것과 달라진 게 있다면 많은 입주민들의 동의로 경비실에 에어컨 설치를 할 예정이라는 내용이 추가된 것. 민서는 똑같은 신문을 한 개 더 만들어놨다며 이 완성된 신문을 여름 방학 숙제 결과물로 낼 생각이라고 했다. 정호는 민서에게 몇 번이고 고마움을 전했다.
일을 하면서 그만두고 싶었던 순간이 참 많았지만 정호는 이번 일을 계기로 명랑 아파트에 대한 애정이 커졌다. 그래서 새벽에 20분 일찍 나와 버스를 타는 일도, 뙤약볕 밑에서 분리수거장을 정리하는 일도 예전처럼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명랑 아파트를 내 집처럼 아끼고 입주민들을 내 가족처럼 여기면서 몸이 버텨주는 날까지 일하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의욕이 넘치는 상태였다.
그런 정호에게 가장 풀리지 않는 문제는 101동 902호에서 일어나는 가정폭력이었다. 902호 남매에게서 아빠에게 당하는 폭력 사실을 직접 들었다는 경숙은 정호에게 찾아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논의했다. 아이들이 직접 신고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역시 대신 경찰에 신고해주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인듯했다. 그렇게 결론 내린 두 사람은 902호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가 또 폭력이 발생하면 즉시 경찰에 신고하자고 입을 맞춰놨다.
-아저씨...! 지금이에요 지금. 또 애들이 맞고 있어요. 얼른 올라와보세요!
고요한 저녁시간에 경비실로 호출 전화가 걸려왔다. 정호가 전화를 받자마자 경숙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호는 알겠다며 전화를 끊은 뒤 헐레벌떡 101동으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가 9층에서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땐 복도 중앙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경숙이 보였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정호에게 얼른 오라고 손짓하더니 울상인 얼굴로 속삭였다.
"어떡해요 정말...! 애들 우는 소리 좀 들어봐 봐요. 이게 생지옥이지 어떻게 집이야...!"
정호가 발소리를 낮추고 902호 앞으로 다가갔다.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자 안쪽에서 남자의 무지막지한 고함과 잘못했다 비는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듣자마자 인상이 절로 찌푸려질 만큼 끔찍한 소리였다.
"내가 신고할 테니까 아주머니는 집에 들어가 계셔요."
"저도 같이 있어야죠...! 저 아저씨가 아니라고 발뺌하면 어떡해. 내가 대신 얘기라도 해줘야지."
"그러다 아줌마까지 해코지당하면 어쩌시려고. 내가 경찰한테 잘 얘기해볼 테니까 얼른 집에 들어가 계셔요."
경숙의 등을 떠밀어 집으로 들여보낸 정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칼을 빼 든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굳게 결심했지만 112 버튼을 하나씩 누르는 손가락은 덜덜 떨렸다.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을 듣는데 심장도 쿵쾅쿵쾅 뛰었다.
"예. 여기 칠복동에 명랑 아파트인데요. 가정폭력 신고 좀 하려고 전화했습니다."
다른 집에서 듣지 못하도록 비상계단에서 조용히 112에 전화한 한 정호는 즉시 출동하겠다는 경찰의 말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일이겠지. 신고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엇이 두려운 건지 쿵쿵 뛰는 심장은 진정되지 않았다. 그보다 문제는 다시 902호에 안에서 여전히 아이들과 남매의 엄마가 매 맞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부디 경찰이 빨리 도착해야 할 텐데. 센서등이 꺼졌다 켜졌다 하는 복도 위에서 정호는 일렬로 늘어선 차들이 보이는 창밖을 하염없이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