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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Feb 15. 2022

아뿔싸 카피라이터

더 열심히 공부한 <실전카피론>과 카피라이팅 책들

두 번째 내 인생의 책은 <실전카피론>(이만재 著)이었습니다. 지난 글에서 영화 공부 무지 열심히 한 것처럼 적었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쩌다 <영화의 이해> 한 권 들고 끙끙거렸을 뿐입니다.

봉준호나 최동훈 감독 같은 동시대에 젊은 날을 보낸 영화인들이 대부분 그 책에 대한 비슷한 애정과 추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그저 무작정 많이 봤을 뿐입니다.


어차피 전공은 살리기보다는 죽일(?) 생각이었고, 영화보다 더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준비했던 직업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카피라이터! 두 번째 ‘내 인생의 책’은 영화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던 이만재 선생의 책들이었습니다. <카피라이터 입문>과 <실전카피론>, 그리고 기타 등등. 두 번째 서평은 아래와 같이 시작됩니다.     



 …… 한때 시인을 꿈꾸었습니다. 밤새워 쓰고 또 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해가 뜰 무렵에야 들뜬 육신이 가라앉고 비로소 잠이 들었습니다. 밤이라는 시간대에서나 만날 수 있던 그놈의 어설픈 시상(詩想)들... (중략) ... 하지만 철이 들면서, 뭘 해서 먹고살지 결정해야 되는 시기가 오자 머리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회전하였습니다. 감히 ‘전업 시인’이 될 자신은 없었으니까요. ‘카피라이터’는 혼란스러웠던 시절 떠오른 획기적인 ‘발견’이었습니다.

- 경향신문 2019년 8월 19일 자 <내 인생의 책> 중에서     



국민학교 시절부터 시를 썼고 학교 백일장 같은 데서 나름 꽤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겉멋 고개 들기 시작하던 고교 시절 그를 만났습니다. 소설 ‘날개’와 시 ‘오감도’의 시인 이상(李箱, 1910~1937). 오감도 외에도 얼굴, 아침, 역단, 생애, 자상, 가구의 추위,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 아... 또 뭐가 있었더라.     


그때 뭘 알고 그랬는지, 그때 과연 이상의 그 기괴한 작품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아니었겠지요, 사실 지금도 잘 모르니까요, 하지만 사랑은 해석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니까요), 아무튼 푹 빠졌습니다. 그로부터 작정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다소 이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공대생이 된 후 더욱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상도 서울대 공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공업학교 출신이니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네요.) 아무튼 공대생이 하라는 전공 공부는 안 하고 ‘밤을 새워 쓰고 또 쓰는’ 날이 많았습니다.

밤을 새웠으니 낮에 자야 했고, 그러다 보니 학교는 수시로 건너뛰게 되었고요. 비싼 등록금 내고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돈을 많이 냈으니 시간만은 빼앗기지 않겠다’라는 희한한 논리(?)로 그 시절을 버텨냈습니다.     


순문학 지향의 작가들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신춘문예에 대한 열망은 그 시절 매우 뜨거웠습니다. 대부분의 ‘문청’들은 가을바람 불기 시작하면 새 원고지를 준비하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컴퓨터나 프린터가 없었던 때도 아니지만.... 그래도 문학 작품은 원고지에 육필로 적어야 된다는 믿음이 있었던 ‘마지막 시절’이 아니었나 합니다.      


신춘문예 마감일이 다가오면 새로 산 원고지와 펜을 챙겨서 종로로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투고할 원고를 마무리하는 장소가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사동 카페 ‘평화 만들기’. 늦은 밤 맨 구석 자리에서 오랜 시간 들여, 미리 프린트해온 시의 한 자 한 자를 원고지에 옮겨 적는 작업은 그렇게 수년간 이어졌습니다.      


굳이 그 장소를 찾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원래 많은 시인·소설가들이 아낀 공간이기도 했지만, 저에게는 ‘기형도의 추억’으로 기억되는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시인 기형도가 세상을 뜨기 전 자신의 시들을 정리한 장소인 cafe P를 다들 ‘평화 만들기’로 추측합니다.) 그리고 저는 오직, 기형도 선배가 등단한 D일보 신춘문예 한 군데만 고집했습니다.


신춘문예 의존도가 과다했던 시절, 글쟁이들의 계절병이었던 ‘신춘문예 병’은 입대 후에도 이어졌습니다. 해병대 장교로 군 복무를 한 저의 근무지는 북한 땅에서 제일 가까운 최전방 부대였습니다. 야간 경계 근무와 주간 훈련이 병행되는 부대 성격에 더해, 바닷바람까지 휘몰아치는 지역이라 특히 겨울이면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원고지를 새로 사 와서 시를 옮겨 적고, 몰래 읍내 우체국에 들러 ‘투고’ 했으니 저 역시 중증질환자였나 봅니다. 그런데, 그 열악했던 휴전선 코앞 밤의 공간에서 열심히 원고지에 뭔가 끄적거리던 저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소대원들의 얼굴도 생생하게 다시 떠오르네요. 얘들아, 다들 건강하게 잘 살고 있지? 아... 이야기가 곁길로 샜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아무튼 저는 등단에 실패했고, 제대 이후에는 다시는 신춘문예를 기웃거리지 않았습니다.     


한때 시인을 꿈꾸었지만, 감히 전업 시인이 될 자신은 없었고, 카피라이터는 대학 4학년 무렵인가 떠오른 획기적인 발견이었습니다.

자꾸 반복해서 죄송하지만, 전공은 죽일 생각이었으니 뭘 해서 먹고살지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화인이 되고 싶었고(그때는 감독이었지요) 시인을 꿈꾸었지만, 현실성이 별로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온라인으로 책을 살 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네마다 크고 작은 서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보와 종로의 양대 산맥으로 대표되는 대형 서점들의 전성기였지요. 그때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마도 4학년 초였던 것 같습니다. 광고 관련 서적이 모여있는 코너에 꽂힌 <실전카피론>이 확 눈에 들어왔습니다. 첫 책이었습니다.


당시 탁월했던 카피라이터였던 이만재 선생은 다작의 저자였습니다. <카피라이터 입문>과 기타 다른 책도 모두 곧 구입했습니다. 사실 그 시절 ‘광고업계’는 이미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던 분야였습니다. 특히 ‘카피라이터’는 ‘광고의 꽃’이라고 하더군요.

광고 선진국이었던 일본에서는 카피라이터가 엄청난 고액 연봉을 받는 최고 인기 직종이라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다닌다든 문장도 기억납니다. 돈 잘 번다는 말에 혹했는지, 그로부터 카피라이터 관련 모든 책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고, 그 범위는 광고 분야 전체로 넓혀졌습니다. 아무튼 카피라이터가 되면 재미있게 잘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영화는 공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저 많이 봤습니다. 그런데 카피라이터의 경우는 정말 열심히 팠습니다. 이 글에서 제가 ‘학교도 잘 안 갔어요’ 운운하다 보니 대학 시절 학업은 아예 접은 것 같은데, 꼭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3학기는 정말 열심히 나갔는데... 문제는 경영학 부전공을 신청해서... 공대가 아닌 경영대 건물로 등교했다는 점입니다. 마케팅 관련 과목을 주로 들었으니 ‘광고인’이 될 수 있는 기본적인 학부 공부도 한 셈입니다.

마케팅과 광고, 그리고 카피라이터는 아주 매력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지였고, 아무리 철이 없어도 ‘시를 써서’ 밥 먹고 살기 어렵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당시 구입한 카피라이터 관련 책들은 지금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제대를 앞두고 ‘영화인’과 ‘카피라이터’의 두 길을 함께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찌해야 되는지 감조차 잡기 힘들었던 영화와 달리 카피라이터는 명확하더군요. 대부분의 광고회사가 대기업 계열사인지라 정기 공채를 통해 채용했습니다.

전역일은 7월 31일이었는데, 여름 전후에 공채를 하는 기업은 별로 없었습니다. J사를 필두로 유력 광고회사 몇 군데를 희망했으나 뽑지를 않으니 지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딱 한 군데 따로 공채 소식이 있었는데 서류에서 똑 떨어지더군요. ‘전자공학’이 당시 꽤 인기 학과였는데 아무래도 ‘카피라이터’ 하기에는 도움이 안 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갑자기 전공을 다시 살려서(?) ‘엔지니어’가 됐고, 3개월 만에 그만두고 어쩌다 ‘잡지 기자’가 됐고, 그것을 계기로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는 잡탕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가장 많이 준비한 직업이었던 카피라이터는 그렇게 물 건너갔습니다. 한편 아깝기도 합니다. 그토록 하고 싶었고, 준비도 많이 했고, 기회가 주어졌으면 참 잘했을 것 같은데, 시도도 별로 못해보고 그냥 접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묘한 생각이 듭니다. 아... 곰곰이 따져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이선생께는 죄송스럽게도, 생의 여러 소용돌이를 거친 후 저는 카피라이터가 아닌 영화인이 됐습니다. 하지만 기획과 창작, 예술성과 대중성의 조화라는 핵심은 두 분야가 동일합니다. 이 책을 통한 배움은 인생의 경로마다 ‘실전적’ 도움이 됐고, 영화를 하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중략)..... 이 책은 영화는 물론, 모든 분야의 창작, 기획, 마케팅에 관련된 일을 준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 경향신문 2019년 8월 19일 자 <내 인생의 책> 중에서     



저의 <실전카피론> 서평 제목은 ‘모든 분야의 창작자들에게’입니다. 일반적으로 신문 기사 제목은 글 쓰는 기자가 아닌 편집 기자가 작성합니다. 그런데 제가 뽑아서 보낸 글 5편의 제목은 변경되지 않고 모두 신문에 그대로 실렸습니다. 저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나 아직 카피 실력 안 죽었구나!     


지금은 영화를 만듭니다. 그런데 참 다양하게 창작하면서 살았습니다. 공식적으로 크리에이터라고 불린 적은 없지만 ‘창작자’는 저의 기본적 정체성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간 참 많은 카피를 뽑았습니다.


기자와 잡지 편집장 시절은 당연하고, 처음 책을 집필했을 때, 다양한 보도자료를 쓸 때, 숱하게 만들었던 사업계획서와 투자제안서 PPT의 문장들... 그리고 이미 세상에 나왔거나, 아직 영화로 익지 못한 많은 시나리오 표지에 적힌 제목들... 알고 보니 저는 인생 내내 ‘자부심 강한’ 카피라이터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평에 적었듯, ‘카피라이터’가 되기 위한 지난 공부와 열정은 제 인생의 경로마다 ‘실전적 도움’이 됐고, 영화를 하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많은 가르침을 주신 이만재 선생님께 이번에는 ‘죄송’이 아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선생님, 덕분에 ‘재미있게’ 먹고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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