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내 인생의 책도 <영화의 이해>였건만…
운이 좋은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운이 좋아 항상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간의 삶에서 겪은 행복과 불행, 또는 환희와 고통의 시간을 각각 무게 달아본다면 뒤쪽이 결코 가볍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분 나빠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애매한 말이었는데... 나중에 곰곰이 생각하니 괜스레 납득이 갔습니다. 알고 보니, 저에 대해서 매우 잘 아는 친구였습니다.
“너는 개고생을 정말 많이 하는데... 이상하게 엔딩이 좋아. 이번에도 그럴 거야, 힘내.”
사실 스스로에 대한 ‘운이 좋았다’는 말은 계산된 겸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타고난 능력과 노력에 비해 과분한 결과물을 자주 만났다는 생각은 진심입니다. 돌이켜보면, 고생 고생 개고생 했던 일은 막판 반전을 맞아 기막힌 해피엔딩을 맞이했고, 반면 술술술 순조로웠던 일은 피눈물 결말로 막을 내렸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아주 힘들 때 어떻게 이겨내냐는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대답은 명확합니다. 더 힘들었던 시절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하면서 버틴다고(지금의 고통은 그때에 비하면 ‘껌’이라고!). 맞습니다. 제 인생은 버티고 버티고 버티다 보면 항상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살아남았고, 종종 새로운 자리에서 ‘반전의’ 새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맞습니다.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구면이든 초면이든, 영화 일 한다고 하면 대부분 관심을 가집니다. 영화는 많은 사람들의 꿈이기 때문일까요?
극소수만이 자기 꿈을 ‘직업’으로 삼는 행운을 만납니다. 많은 고민 끝에 첫 번째 ‘내 인생의 책’으로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를 선택한 것은 ‘현직’에 대한 저의 예의였습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기회 닿는 대로 싸돌아다닌 장돌뱅이 인생이지만 아무튼 현재의 저는 ‘영화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 영화는 많은 이들의 꿈입니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드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문득 나는 언제부터 그런 기적을 꿈꾸었는지 돌이켜 보았습니다. 오랜 세월 영화학도들의 ‘교과서’였던 그 책, 제 책장에도 노란 표지의 <영화의 이해>가 아직 꽂혀 있습니다. L.쟈네티 지음, 김진해 옮김. 현암사. 발행 1987년 10월 31일. ... ... 아주, 아주 오랜만에 펼쳐본 책갈피에 적힌... 1991년 12월 26일 천호동 신사거리 교민문고. 두꺼운 책 페이지 페이지마다... 주황색 색연필 밑줄이 가득했습니다.
- 경향신문 2019년 8월 18일 자 <내 인생의 책> 중에서
아주 오랜만에 그 책을 펼쳐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페이지마다 색연필 자국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고시 공부를 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더 깜짝 놀란 것은... 지금 다시 봐도... 무슨 소린지 모를 내용이 많았습니다. 명색이 영화인인데... 그래도 이제는 의미 있는 작품을 꽤 많이 만든 제작자인데 말입니다.
아무튼 전공은 일찌감치 집어치우고, 이해도 안 되는 <영화의 이해>나 밑줄 좍좍 그으며 공부하던 전자공학도는 졸업과 함께 군대를 갔습니다. 그것도 복무 기간 40개월의 ‘빡센’ 코스를 굳이 선택했으니 ‘개고생’도 팔자인 듯합니다.
제대 직전 구인광고를 통해 '영화제작도 한다는' 종합 엔터테인먼트사에 합격했고 성대한 신입사원 환영회까지 불려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드디어 첫 직장에서 영화 일을 하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환영회 이후 이유도 모른 채 연락이 끊겼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신생사였고 전화가 안 되니 어디로 출근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업계 인맥도 정보도 없던지라 ‘대체 뭔 상황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딱 한 번외에는 대체 어찌해야 영화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포기하고 현실적인 다음 선택지를 찾았습니다. 지금도 ‘그 좋았던 회사’로 기억되는 외국계 IT기업 H사에서 엔지니어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고작 3개월 다니다 사표를 던졌습니다. 그 후로 계속 취직와 사직을 반복했습니다.
사직도 습관입니다. 한 번은 모든 준비가 됐다며 ‘기획실장’을 맡아달라던 어느 영화제작자의 부름에, IMF 시절임에도 고액 연봉으로 스카우트됐던 고마운 직장을 또 그만뒀습니다. 스탭 구성도 다 되어있었고 밤마다 모두 모여서 술만 진탕 마셨는데 어느 날 제작자가 사라졌습니다.
망연자실한 스태프들이 저한테 몰려와서 ‘제작자’가 되어달라고 하더군요. 그때가 20대 후반... 대학 시절 <영화의 이해> 조금 봤던 거 외에는 영화 경력 전무. 웬만하면 오는 기회 마다하지 않는 인생을 지금껏 살고 있지만…. 그때는 정말 자신이 없어서 ‘자신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영화계 진입 두 번째 기회는 멀쩡한 직장과 함께 그렇게 날아갔습니다. 제작자가 도망갔으니 마지막 술자리 계산은 제 몫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프리랜서는 낭만이 아니었고, 사표를 썼으니 프리랜서가 되었습니다. 곧 반전이 있었습니다. 많은 베스트셀러로 소문난 출판사의 제의로 단행본 집필 기회가 주어져 젊은 나이에 ‘작가 선생님’ 소리를 들었습니다.
바로 또 반전이 찾아왔습니다. 책은 안 팔렸고 다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다음 인생 경로는 파격적으로, 나이 서른의 월간지 편집장이었습니다. 무한 애정과 책임감으로 열심히 했고, 최고의 성과와 보람도 거두었다고 자부합니다.
또 반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과 2년 후 또 사직을 결심합니다. 이번에는 아예 퇴사도 전에 창업을 먼저 해놨습니다. 그런데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지 오래지 않아 ‘만든’ 회사를 접었습니다. 이번에도 영화는 촬영장 근처에도 못 가봤습니다.
잘 들어가고 잘 그만뒀던 것이 사실상 제 사회생활의 요약입니다. 돌이켜보면 대부분의 퇴사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네요. 퇴사와 영화사 창업의 반복은 그 후에도 또 있었지만 글이 너무 길어지고 있습니다. 중략하겠습니다.
드디어! 돌고 돌아 마흔에야 직장인 신분으로 첫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 나이에도 철이 들지 않아 또 좋은 회사 그만두고 다시 영화제작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망하기 직전까지 가고... 돌고 돌아... 투자사로 이직... 다시 제작사 대표로 복귀.... 경상비를 벌기 위해 또 취직... 다시... 또 ... 다시...
세월이 흐르고, 어쩌다 보니 꽤 많은 영화를 만들어낸 ‘영화인’이 되어있습니다. 운이 좋아 투자자 역할의 기회도 있어서 기획, 제작, 제작투자, 공동투자 등 공식 크레딧 영화도 50편 가까이 됩니다. 전공도 아니고, 유학파도 아니고, 현장 경험도 없고, 인맥조차 전혀 없었는데, 이토록 많은 ‘기적’에 참가하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어쩌다 영화인이 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 시절 <영화의 이해>를 열심히 봐서일까요? 그럴 리는 없겠지요. 그때도 ‘이해는 안 가지만’ 그냥 외우다시피 했던 것 같으니까요.
코로나 시국이라 다들 어렵습니다. 영화판은 특히 심하고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참고 견디고 노력하면 반전이 있게 마련입니다. 인생이든 영화든 멋진 반전이 있으면 더욱 가치가 올라갑니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고 잘 버티고 있습니다. 또 반전을 만들어내야 하니까요. 저는 항상 운이 좋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