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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Feb 06. 2022

고맙다, 인생을 열어준 책들아

두 번째 프롤로그. 내 인생의 책



2022년 설 연휴의 마지막 날인 2월 2일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우연히 이런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2007년 ‘신문 1면 서평’을 시작한 경향신문의 <내 인생의 책> 코너의 오랜 연재가 마무리됐다는 소식이었습니다.      


15년 1개월 동안 2,150명의 다양한 분야의 필진이 참여해서 3,525권을 소개했고, 1월 28일 자 시인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 마지막 서평이었더군요. 그 시집은 저에게도 ‘인생의 책’ 중 하나입니다. 15년 연재의 종료를 알린 다른 기사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맙다. 인생을 열어준 책들아”     


기사를 접한 순간, 어, 하고 충격에 빠진 듯 잠시 멈칫했습니다. 사실 저는 15년 연재물의 열혈 독자는 아닙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랬냐구요? 저는 2,150명의 필진 중 한 명이었고, 브런치 작가가 되면 ‘그때, 인생을 열어준 책들에 대한 추억’을 가장 먼저 담을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리 떠올렸던 글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고맙다. 내 인생의 책들”     


2019년 초여름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있던 세월이 점점 더 늘어지던 그 무렵, 예기치 않은 제안이 왔습니다. 과거에도 직업으로 쓰고, 계약하고 쓰고, 청탁받아야만 쓰는 습관이었던지라, ‘절필 아닌 절필’이 길어지던 차라 자신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과거 필진들을 살펴보니, 으아아 아... 아무튼 사회적 명망이 대단한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주 짧게 망설이고는 덥석 물어버렸습니다.      


필자 1인당 1주일에 다섯 권을 소개합니다. 한 꼭지씩 보내도 되고, 한 번에 모두 보내도 된다고 합니다. 짧은 서평이지만 꼭지 수가 있는지라 시간은 약 2개월 넉넉히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지옥문이 열렸습니다.      


책의 선택부터 난항이었습니다. 이메일조차 길게 쓰지 않는 인생이 10년도 더 지난 것 같으니... 막상 한다고 해놓고는 제대로 할 수 있을지 하루하루가 번뇌의 나날이었습니다.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었습니다. 담당 기자에게 다시 전화해서 ‘나 못해요’ 할까 하기도 했습니다. 단 한 글자도 적지 못하고... 아니 노트북조차 펴지 못하고 마감일이 점점 다가왔습니다.     


글을 쓰는 일은 사실 쓰는 것보다 ‘아이템의 확정’이 더 중요합니다. 소재와 주제와 집필 방향이 정해지면 쓰는 일은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습니다. 마감일이 있는 글쓰기의 공포는 원고를 터는 그 순간까지는 하루 24시간 중 깨어있는 시간 내내 ‘뭘 어찌 써야 하나’ 하는 걱정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천상 글쟁이’들에게도 글쓰기는 크나큰 고통입니다. 탈고의 환희는 고통의 깊이가 깊을수록 더 짜릿하지만, 아무튼 그건 맨 나중의 일입니다.     


인생의 책 다섯 권을 고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해야만 했습니다. 아무튼 정했습니다. 그리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선택한 제 인생의 책 다섯 권은 모두 푸르렀던 시절 읽은 책들이었고, 그것들은 모두 ‘미래의 직업’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영화인을 꿈꾸게 했고, 돌아 돌아 결국 그렇게 만든 <영화의 이해>(루이스 자네티 著>가 첫 번째 선택이었습니다. 꼭 되고 싶었고, 그래서 가장 구체적으로 준비했던 카피라이터는 <실전카피론>(이만재 著)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시인을 꿈꾸었던 젊은 날의 추억으로 시집 한 권 꼭 넣고 싶었던 저의 선택은 <햄버거에 대한 명상>(장정일 著)이었습니다.(각축 끝에 밀린 작품이 바로 연재 최종작인 <입 속의 검은 잎>.)        

사회생활 초기 잡지 기자였던 저는 ‘수구초심’을 발휘해서 월간지 <월간팝송>(1971~1987)도 기억에서 되짚어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나중에 DJ나 음악인이 될 줄 알았거든요. 마지막 책 <레오나르도 다빈치>(세르주 브람리 著)는 그간 제가 섭렵한 모든 다양한 직업들의 ‘정신적 밑바탕’이었습니다.      


결국 저의 ‘내 인생의 책’은 서평이 아니었습니다. 저라는 사람이 인생에서 하고 싶었던 많은 일(또는 직업)이 책을 통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돌이켜 본 뒤늦은 일기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2019년 8월... 저는 지나간 인생을 한달음에 되돌아보는 놀라운 시간을 만났습니다. 글쓰기의 희열을 다시 느꼈습니다. 모두 집필의 기회를 준 경향신문의 <내 인생의 책> 지면 덕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 그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막상 어찌할지 감을 못 잡아 2년이 더 흘렀습니다. 그러다 문득 브런치를 만났고, 어젯밤 첫 글을 발행하고 오늘은 눈뜨자마자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때의 씨앗이 브런치라는 좋은 땅을 만났으니 이제 무럭무럭 자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인생은 역시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저는 다시 글의 힘, 책의 힘을 믿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지쳐가던 생에 새로운 에너지가 주입된 듯합니다. 더 열심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인생의 책들.          



PS. 프롤로그가 두 편이라 죄송합니다. 게다가 길기까지 해서 더욱 그렇네요. 주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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