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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내미 이 복 희 Mar 07. 2024

라디오 전성시대

라디오 전성시대        

  

이복희


                                  

  막 잠자리에 들려는데 ‘딩동’ 문자가 왔다. 얼떨결에 핸드폰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조금 전까지 듣고 있던 K 라디오의 모 프로그램 방송 작가라고 했다. 평소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소소한 일상을 사연으로 보내곤 했다. 그런데 좀 전에 내가 보낸 사연으로 ‘인터뷰를 했으면 한다.’라는 문자였다. 처음에 ‘뭐, 이런 전화금융사기도 있냐.’고 생각했다. 방송 작가는 밤늦은 시간에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내일 12시에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귀신에 홀린 듯 어리둥절해져서 밤잠을 설쳤다.



  나는 하루의 일과를 라디오로 시작해서 라디오로 끝마친다. 방송국마다 프로그램을 속속들이 꿰고 있다. 온몸을 다 붙들어 두는 텔레비전보다 귀만 열어두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라디오가 좋다. 라디오를 듣다 보면 내가 겪지 못한 숱한 사연들이 간접적인 경험으로 다가온다. 웃다가 울다가 공감의 문자를 보낼 때도 있다. 라디오 청취자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속상한 일이나 기쁜 일을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방송국에 보낸다. 라디오 진행자의 음성으로 전해지는 전국 방방곡곡의 사연들은 내가 겪었거나, 언젠가는 겪게 될 일이기도 하다. 나와 라디오의 인연은 유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집안에 라디오를 들인 날, 온 가족이 라디오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앉았다. 네모난 상자에서 이상한 남자의 목소리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파수가 맞지 않아 자주 찌지직거렸다. 라디오에 달걀귀신이라도 들어있는 듯 어린 마음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움찔움찔했다. 할머니는 라디오 속에 난쟁이가 여러 명 살고 있다고 했다. 신줏단지처럼 선반 위에 고이 모셔 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웃고 울던 그때 그 시절, 온 가족의 귀는 늘 라디오를 향해 열려있었다.



  라디오를 떠올리면 가을걷이 후 곡식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곳간처럼 이야기가 넘쳐난다. 방바닥에 엎드려 ‘이종환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쨍하고 해 뜰 날’이나, ‘종이학’의 가사를 깨알같이 노트에 적던 언니가 생각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가며 기타만 튕기다가 아버지한테 된통 혼난 오빠도 들어있다. 오빠가 책상 모서리에 기타를 내리찍은 후 더는 집안에서 기타 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오빠를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만 기타 울림통에서 울리는 듯했다.



  어린 날, 우리 집 대문 밖에 아까시나무 그늘에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비단 홀치기를 하며 늘 북적댔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자나 하춘화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비단에 새겨진 점들을 빛의 속도로 홀쳤다. 농한기에도 일에서 해방될 수 없는 엄마들의 유일한 숨통이 라디오였다. 흥겨운 뽕짝에 맞춰 엉덩이를 들썩이던 그 시절 동네 엄마들은 모두 어디에서 곤히 잠드셨는지. 당시 알 듯 모를 듯한 엄마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라디오 음향이 뒤섞여 웅웅대던 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어렴풋이 맴돌곤 한다.



  코흘리개였던 시절에는 라디오 성우가 읽어주는 구전동화나 동화를 들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사춘기 시절에는 곡명도 모르는 팝송을 중얼거리며, ‘두 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를 애청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싱글벙글 쇼’나, ‘정오의 희망곡’의 고정 애청자로 거듭났다. 때론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들으며 다시 풋풋한 시절로 돌아가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사연을 보내기도 했다. 때론 방송 퀴즈에 참여하고, 운 좋게 채택되어 사은품을 받는 재미도 쏠쏠했다. 이렇게 라디오와 함께한 세월이 반세기가 되어 간다. 텔레비전은 뒤로한 지 십수 년이 되다 보니 연속극이나 토크쇼엔 흥미가 없다. 라디오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래된 소꿉친구처럼 친숙한 사이가 됐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유튜브를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것만 영상으로 보고 듣는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집 아이들도 MP3에 좋아하는 음악만 저장해서 들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앉은자리에서 휴대폰 하나로 세계 곳곳의 정보를 총망라하는 다차원적인 접근을 한다. 7080 세대처럼 고정프로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줄 마음의 여유조차 없다. 모두가 숨 가쁜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은 천덕꾸러기 라디오가 한때 사치품으로 단속되었던 때도 있었다. 금성사에서 처음 나온 라디오가 쌀 한 가마니 값이었는데도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뚜·뚜·뚜” 울림과 함께 “정오의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아나운서의 구수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아침 눈뜰 때부터 늦은 밤, 잠들 때까지 라디오가 유일한 소식통이었던 시절이 그립다. 라디오가 전해주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두레반에 둘러앉아 퉁퉁 불어터진 라면을 후루룩거리던 그 시절이.



  다음날 열두 시에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했다. 부재중 전화가 4통이나 와 있었다. 뒤늦게 방송 작가와 인터뷰를 했다. 작가는 나의 근황을 다 꿰고 있었다. 내가 보낸 사연들이 고스란히 방송국에 저장되어 있었나 보다. 최근 동인지를 출간하는 것과 나의 글쓰기에 대해서 구체적인 질문을 했다. 인터뷰 내내 긴장을 하지 않으려고 물을 마시며 목을 축이기도 했다. 끝나고 나니 두서없이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은 것 같아 아쉬웠다. 방송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라디오 작가와 인터뷰한 내용이 방송되길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친구들에게 라디오를 들어보라고 이야기했는데, 방송을 듣는 내내 낯간지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의 사연이 전국적으로 방송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재미있고 진솔한 인터뷰를 하지 못한 게 미련으로 남았다. 방송을 들었다고 지인들이 연락을 해왔다. 쑥스러우면서도 괜히 어깨가 들썩여진다. 라디오는 이처럼 내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애틋하고 소중하고 인연이다. 나의 라디오 전성시대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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