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내비게이션을 켜고
이복희
서류 가방을 든 남자가 PC방으로 들어간다
게임기 앞에서 혼잣말 퍼붓다가
문을 박차고 나온다
우산 받쳐 든 여자가
멀찍이서 남자를 지켜본다
남자와 여자 사이,
하늘 쓸던 버드나무가 쓰러져
가을비에 젖고 있다
햇살 아랫선 와불 같은 나무
어둠이 내리면 시커먼 미라가 된다
퍼석한 몸에 벌레 몇 마리 숨겨주느라
목이 마를 거라고 여자는 중얼거린다
빗줄기는
나무의 한 생을
시간의 태엽으로 한 겹씩 풀어내고
남자는 먼 하늘 비구름을 바라본다
일터에서 한순간에 내몰린 어처구니
눈앞의 길은 까마득하고
등 위에선 천둥이 운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
줄곧 내비게이션을 눌러대고
하릴없는 와이퍼만 무한 반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