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는 WHY고, 승진은 또 승진이고
난 나의 욕심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잡힐 때가 있다.
어떨 때는 경쟁에 뛰어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발 뒤에서 지켜보는 걸 좋아하다가도, 또 내가 그 중심에 끼어들지 못하면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있다. 앞에 나서고 싶어 하다가도 어떨 때는 내가 굳이 나서야 하나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다. 한마디로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욕심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욕심이 많지만 닿을 수 없기에 욕심이 없는 척하거나, 닿을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이 없어서 욕심을 갖기조차 포기한 것은 아닐까?
난 욕심은 많은데 그렇다고 모든 걸 다 희생해서 (욕심을 이루러면 남들보다 더 많이, 잘해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쟁취하기는 싫은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성격인 것 같다. 과거처럼 라테는 말이야라고 회사에 올인하기보다는 일과 개인적인 삶과 즐거움의 중간 어딘가에 머무르고는 싶지만 동시에 또 남들보다 앞서가고 싶기도 그런 오묘한 생각 말이다.
MBTI 검사를 해보면 세상의 소금인 ISTJ이며, 성격을 color로 나타내는 검사를 해보면 cold blue & earth green이라는 조합이 나온다. 사람들을 아끼지만 또 문과답지 않게 논리와 분석을 중요시 여기기도 하다.
4번째 회사이자 처음으로 희귀 질환 전문 회사로 왔을 때, 무엇보다 소외받는 소수의 하지만 큰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을 위해서 일해보자 라는 목표가 컸다.
WHY를 처음으로 나의 일에 접목시켰던 때였다.
하지만 사람이 간사한지라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어느 정도 인정도 받으며 자리를 잡고 나자 승진 욕심이 생겼다. 이유는 승진을 해야 연봉이 올라가니까.
이때쯤이 내가 제약회사를 다닌 지 11년 정도 되는 해였다. 영업 경력과 마케팅 경력이 적절히 섞여 있었고 나이도 3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으며 나름 열심히 한 덕에 인정도 받기 시작했다. 소위 자신감도 생기고 머리도 굵어지기 시작한 때였다.
이 정도 경력이 쌓일 때 가장 크게 느끼는 경력개발욕구는 피플매니저가 되는 것이다. 즉, 혼자서 스페셜리스트로 근무를 하는 것보다는 밑에 사람을 몇 명 두고 팀으로 일하고 싶어진다. 나 혼자 일을 잘하는 건 기본이고, 사람 관리에 대한 리더십이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그래야 향후 더욱 큰 조직에서의 역할을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피플 매니저 경력을 쌓기가 참으로 힘든데 그 경력이 없으면 승진이 어렵다. 신입을 뽑을 때 경력이 있어야 합격률이 높아지는데 경력을 쌓으려면 회사를 다녀야 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지금은 조직들이 더욱 lean 한 조직을 추구하기에 (단계를 최소화시키는 조직) 더욱더 심하지만 당시에도 마케팅 조직 자체는 인원이 많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곳도 외국에서는 큰 회사였지만 한국지사는 그리 크지 않았고, 부서에 사람이 적으니 당연히 밑에 누군가를 붙여주거나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두가 수평하게 매니저에게 다 각각 보고하는 구조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냥 현실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매니저를 지속적으로 괴롭 힐지(?)는 성향에 따라 갈린다. 난 후자였다. 나대는 성격도 아니고 소위 말하는 어그레시브 한 성격도 아니다. 하지만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지속적이고, 꾸준하고,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설득해서 쟁취하는 타입이다. 결국 당시 매니저분은 나에게 만약 죽어도 피플매니지 경험을 쌓고 싶다면 세일즈 매니저 자리로 이동해 보는 건 어떻냐라고 제안을 했었다.
세일즈 자리로 이동하여 피플 매니저 경험을 쌓는다.
마케팅 부서에서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서 경험을 쌓는다.
라는 두 개의 선택의 기로에 있었고 난 후자를 선택했다. 세일즈 부서에 1-2년 파견을 가는 것도 아니고 영구적으로 포지션을 옮기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마케팅에서 영업으로 이동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지만, 영업에서 마케팅으로 돌아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마케팅을 하면서 선별적으로 일부 고객을 만나는 것은 해볼 만해도 매일 고객들을 보는 건 사람 스트레스를 받는 나에게는 꽤 고단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는 몰랐지만 후자의 선택을 했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구하면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당시에 일부 제품들의 특허가 만료됨에 따라 사업부들이 합쳐져 조직이 커지다 보니 조직 내에 계층이 생길 기회가 있었고 정말 천운으로 사람을 밑에 둘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때 세일즈 자리로 갔으면 나의 커리어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지금의 자리에는 와 있지 못했을 가능성이 클 것 같다. 영업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나처럼 다 파헤쳐야 직성이 풀리는 까칠한 성격에,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와 저질체력으로는 사무실에 앉아서 일하는 게 오히려 맞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영업팀의 직원들을 위해서도 그렇다.
사실 이전에도 그랬지만 나의 BATNA를 높이는데 노력해야 한다. 이 말은 또 다른 옵션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인데, 회사에서 BATNA를 올리려면 대부분 이직이라는 방법을 쓰게 마련이다. 다행히 다른 회사를 알아보던 와중에 기회가 와서 진행을 취소했다. 자리도 때가 있고 운이 있어야 하나보다 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승진을 하거나 자리를 옮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의 능력? 연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내가 갈 자리가 있는지의 여부다.
이왕이면 한 회사에 정 붙이고 다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비록 이직을 하면 연봉이 오른다고는 하지만 어딜 가나 그에 걸맞은 사람 스트레스가 있을 것이고, 이왕 일은 힘들더라도 좋은 사람들과 마음 편하게 일하고 싶은 게 나의 솔직한 마음이다.
그렇게 처음으로 피플 매니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