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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 제약회사 신입 영업사원 일곱 번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by 러블리 이지


힘들게 처음 제약회사 신입 영업사원으로 취업을 했을 때는, 나에게 주어지는 옵션이 거의 없었다. 소위 말하는 협상 파워 (BATNA : 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라는 뜻으로 협상이 성사되지 않았을 때 선택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의 대안을 말한다. 즉 협상이 결렬되었을 경우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옵션이다.)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는 나 말고도 수많은 지원자들이 있으며 지방 발령을 거부하면 바로 탈락시키고 다른 사람을 선발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단 회사에 들어오고 나면 나에게 투여되는 회사의 자원이 상당히 많다. 일반적으로 신입사원을 뽑아서 회사에게 이득이 될 정도가 되려면 최소 1-2년 이상 되어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좀 쓸만하다 싶어 지려면 3-4년은 되어야 한다. 즉, 입사 과정에 소요되는 회사의 노력, 입사 후 교육 등에 들어가는 비용 등 여러 가지 회사가 투여한 몰입비용 (sunken cost) 아쉬워지기 시작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여기에 만약 내가 일을 잘하는 하이퍼포머라면 나의 협상력은 굉장히 강력해진다.


따라서 지방에 발령 났을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행동은 실적을 잘 내는 것이다. 즉 회사에서 놓치기 아까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물론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이제 막 입사한 신입사원이 얼마나 뛰어나서 다른 회사로 옮길 수 있겠는가? 지금도 겨우 겨우 잡은 첫 직장인데 말이다.


지방에 발령이 나면 대부분 최소 2-3년은 근무를 하는 게 일반적이다. 아주 특수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통상 그 시간 내에 자리를 옮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나도 당연히 지방에 발령받은 첫날부터 연고지로 돌아가고 싶었다. 매 주말마다 차를 몰고 2-3시간씩 운전해서 집으로 갔으며, 일요일 저녁에 내려오는 것조차도 하기 싫어서 월요일 그 새벽에 2-3시간을 운전해서 다시 지방 사무소로 출근했다. 지금은 재택근무가 일반화되고, 지방 사무실들도 많이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주에 1-2회, 특히 월요일 아침은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이 일과였다.


다행히 당시의 지점장님도 서울에서 지방으로 발령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랑 같은 처지였다. 일종의 동병상련도 느껴졌다. 지점장님도 주말마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서울로 갔다가 월요일 아침에 돌아오는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이 분에게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일을 하는 방법이나 노하우보다는 어떻게 보면 일을 하는 자세에 대한 것이었던 것 같다. 그때 해주셨던 말 중 기억나는 건 , ‘하려면 제대로 하고 하기 싫으면 그냥 놀아라’였다. 하는 것도 아니고 노는 것도 아닌 의미/의욕 없는 활동은 안 하니만 못하다는 것이었으리라. 즉 매사에 집중에서 제대로 하고, 정말 힘들어서 쉬고 싶을 땐 제대로 쉬라는 의미였다. 난 아직도 그분의 조언을 새기고 있다. 하고 싶을 때 열심히 하고, 물론 놀면 안 되지만 정말 하기 싫을 땐 그냥 쉰다.


신입 사원 때 일을 잘하려면 일단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일단 신입사원은 근면, 성실이 기본이다. 9-6시까지 제대로 계획을 세워서 일해야 하고, 농땡이나 건성으로 일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만 해도 일단 절반의 성공은 이룬 셈이다.

나머지는 센스다.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걸 회사의 규정에 맞는 방식으로 충족시키는 것이 영업의 핵심이다. 그걸 찾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같이 술도 마시고, 취미활동도 한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고, 영업에도 왕도가 없다.


회사가 나를 서운하게 할수록 나는 더 열심히 해서 나의 BATNA를 만들어야 한다. 회사가 내가 떠나는 것을 아깝게 여기도록 해야 한다.


정말 3년간 죽기 살기로 일했고, 결국담당하던 제품 3개 중 1개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시장 점유율을 만들고, 나머지 하나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주력 경쟁품 보다 높은 시장 점유율을 만들었다. 그렇게 전국 랭킹에 이름을 올리고 나자, 그때부터는 연고지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를 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충분히 나의 역할을 했고, 나의 가치는 내가 원하는 연고지로 가고 싶다는 요구를 할 정도는 된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단순히 실적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그럴싸한 사연도 따라와 줘야 한다. 당시 나는 형제 중 막내였는데 형님은 외국생활을 하고 있었고, 부모님은 당시 여러 질환으로 입퇴원을 반복하면서 고생하고 계셨다. 이러한 내용들을 위에서는 다 고려해 줘서 결국 연고지로 갈 수 있었다.


입사 이후 지방에 발령난지 딱 3년째 되는 해였다. 군대 제대하는 느낌이 이런 것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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