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청승 좀 떨어봤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을 들으며 출근길을 달린다.
꼬리의 꼬리를 문 생각들도 어디론가 흘러간다.
어젯밤 잠들기 전
아이와 침대에 누워 나눈 이야기가 시작이었다.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인데
할아버지 할머니도 엄마 아빠가 있었냐고
물어보는 다섯 살 아이.
문득
얼마 전에 어린이집 선생님이 엄마가 있다며
놀라웠다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도 속으로는 생각이 인과관계를 따지며
제법 복잡하게 흘러가기도 하는구나?
“그럼 있지~”
“어디에 있어?”
“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서 왕할머니 만난 적 있지? 그분이 할아버지의 엄마야.”
“그럼 아빠는?”
“음… 하늘나라에 있어.”
“하늘나라? 죽었어?”
“응, 맞아.”
“너무 슬퍼. 뼈가 된 거야? (팔을 가리키며) 이런 몸은 어디로 갔어?”
“하늘나라에 같이 있지 않을까?”
“하늘나라는 어떤 곳이야?”
“엄마도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다시 태어나길 준비하는 곳 같아.”
“어떻게 다시 태어나?”
“네가 태어난 것처럼 다시 태어나지~”
“다시 원래 엄마 아빠 아기로 태어나?”
“그렇지 않을까~”
“전부? 모든 사람들이?”
“음, 자기가 원하면?”
“그럼 나는 원할래. 엄마 뱃속에 다시 들어갈 거야.
그럼 태어나면 이름을 쑥쑥이라고 지어줄래?”
“그래, 꼭 그럴게. 홍쑥쑥이라고 지어줄게.”
마음이 찡해 눈물이 날 뻔했지만
이제 빨리 눈 감고 자자고 마무리된 대화는
다음 날 아침 내 생각의 꼬리를 덥석 물고 놓아주질 않았다
죽음.
생각 안 하고 살지만 알고는 있는 것.
어쩌면 영원한 이별.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롭게 세상을 알아가는 아이의 시선으로부터
새롭게 슬프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그날 아침 따라 새삼스럽게도)
죽음으로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몇 있기는 했다
아주 가깝진 않았지만 아주 멀지는 않았던
고모, 할아버지, 할머니, 친구의 어머니 그런 사람들.
바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생각할 겨를조차 없어 떠오르지도 않지만
그냥 가끔 스치듯 생각이 나기도 하는 그런 존재들.
그들의 영원한 부재가 문득 슬퍼지려다가
내가 너무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들어
더더욱 마음이 슬퍼졌더랬다.
나는 삶에 엄청난 애착이 있는 건 아니라
영생을 꿈꿨다는 진시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당장 죽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삶의 큰 미련은 없었다랄까.
그런데 아이가 생기니 질척 질척한 미련이 조금씩 조금씩 생겨난다.
내가 부모에게 의지를 못하는 k장녀라 괴롭기도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부모가 살아있는 그 존재 자체에 의지를 하기도 하니까,
우리 아들이 세상에 치여 힘들 때나 그냥 문득 한숨이 쉬어지는 그런 순간에도 내가 아주아주 오래도록 힘이 되고 의지가 되어주고 싶은 거다.
멋지게 살아낸 내 인생 그 자체로 건강한 할머니로서 아주 오래도록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어 진다.
그렇게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원망도 하고 탓도 하고 소리도 질러보았던
나의 부모님과도 언젠가 영원한 헤어짐을 맞이한다고 생각하니
그것 또한 너무 슬픈 일이라 또 한없이 슬퍼진다.
그렇게 출근길 내내 라디오를 들으며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감수성 과다로 인한 청승을 떨다
눈물을 슥슥 닦고 아무렇지 않게 일터로 향한다.
그렇게 또 아무렇지 않은 하루가 지날 것이다.
햇살, 바람, 너와의 부대낌
그냥 그런 순간들로 마음을 채우고
또 해야 할 일들을 해내며
시간은 흘러가겠지
하루하루 그 순간 마음의 최선을 다해
끝까지 살아낼 뿐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이별의 순간이 덜 아쉽도록
무엇을 먼저 두고 무엇을 내려놓을지
우선순위를 잘 정하는 것이라는 것.
행복은
다섯 가지 감각과 사랑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저 내 마음에 오감과 사랑이 비워지지 않아 나눠줄 수 있는 명랑함이 늘 찰랑거리길 바란다.